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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5화 (5/150)

5화

쌰앙…, 참 잘도 말한다. 그래서 어쩌라고? 나 같아도 황당하겠다. 침묵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끊을까?

[…우리 집 어딘지 알아?]

“뭐?”

[집 위치 아냐고.]

당연히 나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조현우가 알고 있으면 이상할 것 같다.

“아니, 몰라….”

[…너 지금 어딘데?]

“여기… 학교 근처 공원인데, 이름이 한빛….”

뚝.

전화가 끊긴다.

배터리가 다 닳아 버렸다.

“…좆같다.”

세상이 날 엿 먹이려는 것 같다. 완전히 혼자라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엄마랑 누나가 보고 싶다. 서럽고 외로워서 눈물이 나온다. 난 원래 잘 안 우는데, 여기 와서 벌써 두 번째다. 진짜 싫다. 벤치에 웅크리고 앉아 이 처참함이 얼른 흩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마음은 더욱 갑갑해지기만 했다. 상황도 기분도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부정적인 생각이 깊이를 더해 가 모든 것이 까마득히 느껴질 즈음이었다. 늦은 밤의 고요 속에서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자박자박,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발소리는 점차 가까워지는데 나는 고개조차 들 수 없다. 그럴 기운이 없었다. 그냥 이런 생각이나 했다. 아, 순찰 나온 경찰이면 파출소에서 잘 수 있겠구나.

“야, 조현우. 일어나.”

처음엔 대답하지 못했다. 조현우가 나를 부르는 이름인 줄 몰랐다. 그런데 상대가 내 어깨를 잡으며 “야.” 하고 다시 부르길래,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유령이야?”

“헛소리할 거면 그냥 간다.”

“한우주?”

진짜 한우주다.

“그래, 나 맞아. 일어나라니까.”

지금 나 데리러 나온 건가? 한우주가 내 팔을 잡아끈다. 현실감이 없다.

“가자.”

그리고 한우주를 따라 걸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못 하고 내내 훌쩍였다. 여전히 서러웠고, 한편으론 안도했다. 그러다 한 번은 넘어질 뻔했는데, 한우주가 뭐라고 하는 걸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고 괜히 슬퍼서 더 울었다. 한우주는 그 뒤로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답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한우주는 복층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았다. 도착하자마자 방에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내 쪽으로 옷을 대충 던지고는 말했다.

“씻어. 너 고기 냄새 난다.”

“…응.”

“그리고,”

떨어진 옷을 주섬주섬 줍는데, 한우주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씻고 나면 잠깐 얘기 좀 해.”

“…무슨 얘기?”

“일단 씻어. 고기 냄새 거슬려.”

“응.”

고분고분 한우주의 말을 따랐다. 샤워실에 들어가 씻는데, 샴푸 향이 너무 좋아서 또 울었다. 수도꼭지가 제대로 열렸나 보다. 한우주가 준 옷은 조현우 몸에는 제법 커서 헐렁했다.

옷까지 갈아입고 나오니 한우주가 없다. 게임하는 내내 본 곳이라 구조는 익숙했다. 2층에 올라갔다. 한우주의 방이 살짝 열려 있는 게 보였다. 문틈으로 슬쩍 살펴보니 한우주는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너무 오래 씻었나.

다시 거실에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집중하고 있는 걸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시간은 벌써 새벽 2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잠이 쏟아졌다. 자면 안 되는데….

눈꺼풀이 무겁다.

한우주는 뒤늦게 거실에 나왔다. 소파에 엎어져 곯아떨어진 놈을 보곤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잠든 얼굴이 고단해 보여 깨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결국, 손님방에서 이불을 꺼내 와 덮어 주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문득, 이 집에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 굉장히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쁘지 않았다. 그 덕분인지 평소보다 아주 조금,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

몸이 무겁다. 큰 바위가 몸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눈두덩이는 따갑고 온몸에 기운이 없다. 향이 좋은 폭신한 매트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최대한 몸을 파묻으려 몸을 비트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무시하고 더 자고 싶은데 자꾸만 건드린다.

“…엄마?”

방학이잖아. 왜 깨우는 거야. 나 몸 안 좋아. 분명 제대로 말하려 하는데 졸린 탓인지 발음이 자꾸만 뭉개진다.

“나는 분명 깨웠다. 네가 안 일어난 거야.”

“으…?”

웬 남자 목소리? 누나가 남친이라도 데려왔나? 누나 남친이 날 왜 깨워?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고작 반 정도 뜨는 게 최선이었다.

쿵.

끝내주게 잘생긴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라서 소파에서 굴러떨어졌다. 바닥이 미치도록 차갑다. 이거 뭐야, 대리석?

“뭐 하냐?”

“허, 허억. 잠…잠깐만.”

익숙한 얼굴이다. 곧이어 어제의 기억이 뇌리에 스쳤다. 아, 비엘 미연시 게임. 망할….

끝내주게 잘생긴 남자는 한우주였구나. 머리가 부스스하고 표정이 멍한 게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모양새다. 굳이 비유하자면 숙면 마약 매트 침대 광고에 출연한 모델이 푹 자고 일어난 모습을 연기하려고 세팅한 것 같다.

“…너 못생겨졌다.”

“뭐?”

나는 한우주 외모에 감탄하고 있었는데 돌아오는 말이 저 꼬라지다. 그야 물론 눈 붓고 얼굴 붓고 장난 아니겠지만…, 조현우도 못생기기 힘든 외모이지 않나? 한우주쯤 되면 인간들이 다 오징어로 보이는 건가? 한우주를 조금 노려본다. 아마 붕어눈이라 티도 안 날 테지만.

한우주가 불쑥, 잔을 내게 내민다. 고급스러운 찻잔에 얼음이 동동 뜬 커피가 담겨 있었다. 건네받은 잔의 표면으로 조현우의 얼굴이 비쳐 보여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주섬주섬 일어나 소파에 앉는다. 못생기기는 어디가 못생겼다는 거야. 꽤 처연미 있지 않나? 엉뚱한 생각이 줄줄이 이어졌다.

“커피 못 마셔?”

아, 맞다. 커피.

“아니, 아니야. 마실 수 있어. 고마워.”

재워 주고, 아침에 커피까지 타 주고. 한우주 생각보다 친절하구나. 제대로 인사해야겠지. 다짐하며 한 모금 마셨는데,

“켁.”

미친. 바로 뿜을 뻔했다. 달다. 달아도 너무 달다. 커피에 무슨 짓을 한 거야?

“하, 한우주. 커피에 설탕 넣었어?”

“너 단 거 좋아하지 않나?”

“싫어하지는 않지만…. 얼마나 넣은 거야…?”

한우주는 말없이 눈을 몇 번 끔뻑이다가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엎다시피 하긴 했지. 실수였어. 손이 미끄러졌거든.”

“…….”

“아침이고, 졸리고, 정신없어서.”

“…….”

“뭐, 단 거 먹으면 잠도 더 잘 깨겠거니 싶었어.”

…쟤 지금 찔려서 변명하는 건가? 제법 새로운 모습이라 나도 모르게 지그시 바라보았다. 한우주는 그걸 무슨 뜻으로 받아들인 건지, 다시 마주친 시선에 억울함이 담긴 것만 같았다.

“못 마시겠으면 이리 줘. 버리게.”

“뭐? 왜 버리냐? 아깝게!”

도로 뺏으려 들기에 서둘러 커피를 원샷 해 버렸다. 기침이 절로 나온다. 뇌가 설탕에 절여지는 맛이다. 커피인지 액상 설탕인지 정체성이 모호할 정도다. 그렇지만 음식은 남기거나 버려선 안 되잖아.

“미련하긴.”

기침을 해 대는 나를 보고 한우주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간 것 같다. 뭐지. 아침의 한우주는 뭐랄까… 평소보다 친근한 느낌이다.

“잘 마셨어.”

“그래.”

“…야, 한우주.”

“왜.”

“고마워.”

한우주는 대답 없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민망함에 괜히 헛기침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어제 갑작스러웠을 텐데 도와줘서 고맙다고. 재워 준 거랑 또, 커피도….”

여전히 답이 없다. 반응이 없으니 더 민망하다.

“그, 너 아니었으면 곤란할 뻔했어. 진짜로.”

“그러게.”

한마디 툭 내뱉고는 빈 잔을 들고 가 버린다.

…한우주 설마 쑥스러움 타나?

‘에이, 설마.’

한우주가 어디 그럴 인물인가. 일어나서 정리나 해야겠다. 10분 전까지만 해도 꼭 끌어안고 있던 이불이 눈에 띄었다. 잠든 기억도, 이불을 덮은 기억도 없으니 아마도 한우주가 챙겨 줬나 보다. 한우주는 생각 이상으로 조현우를 친한 친구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성격은 아닐 테니까.

이불을 가지런히 개어 소파 위에 올려 둔다. 소파 구석에 콕 박혀 있던 핸드폰이 드러났다. 어제 충전기 꽂아 놓고 대충 근처에 두었던 게 이리로 굴러떨어졌나 보다. 집어 들어 화면을 켰다.

“…?”

당혹감에 눈을 비비고 액정을 다시 본다.

「Wed 4월 2일 AM 10:30」

…10시 30분? 지금이 10시 30분일 수가 있나? 공휴일인가? 그건 아니다. 핸드폰 시간 설정이 잘못된 건가?

“한우주!!”

한우주는 주방 쪽에서 상체만 빼꼼 내밀어 나와 시선을 맞췄다.

“무슨 일 있어?”

“지금 몇 시야?”

“10시 31분인데.”

태평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헛웃음이 나온다.

“지각이잖아!!”

“그러네.”

그러네? 그러네?? 지금 저걸 말이라고. 아니, 됐다. 실랑이할 시간이 없다. 내 교복. 교복을 입어야 하는데 안 보인다. 주변을 몇 번이고 둘러보지만, 옷자락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우주! 내 교복 봤어?”

한우주는 어느새 소파에 앉아선 바삐 움직이는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학교 갈 생각 없냐고.

“네 교복….”

급해 죽겠는데 뜸을 들인다.

“고기 냄새가 너무 심해서 아까 세탁기 돌렸는데.”

“뭐라고?”

“세탁 망에 넣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지금 그걸 걱정하는 것 같아?!”

“아니.”

속 터져. 내가 제명에 못 사려나 보다.

“어차피 지각인데 천천히 해.”

“넌 지각이 그렇게 쉽냐?”

“어렵진 않지.”

순간 은혜를 잊고 한 대 쥐어박을 뻔했다. 진정해, 안태원. 휘말리지 말자. 일단 씻고 생각하자. 곧장 화장실에 날아가다시피 했는데, 칫솔이 하나뿐이다.

“한우주!”

“또 왜.”

“…미안한데 혹시 칫솔 여분 있어?”

“없어. 대충 내 거 써.”

“뭐?!”

“농담이야. 오른쪽 선반 보면 가글 있으니까 그거라도 쓰던지.”

“너, 이, 아악!”

상상 속 한우주에게 꿀밤을 10대쯤 먹이며 가글을 머금었다. 그리고 하나뿐인 칫솔에 치약을 묻혀 한우주에게 건넸다. 녀석은 얌전히 받아 들고는 양치를 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섬세하고 꼼꼼하던지. 세수에 샤워까지 하고 나왔는데도 양치 중이더라. 한우주 이놈은 치과에서 돈 깨질 일은 없을 것이다.

한우주는 길고 긴 양치를 끝내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간은 자비 없이 흘러갔다. 쟨 안에서 뭐 하는 거야? 방에 쳐들어가서라도 한우주를 꺼내 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야, 한….”

한우주, 빨리 준비해. 보채는 말이 갈 길을 잃고 사라져 버렸다. 한우주는 벗고 있었다. 아니, 바지를 입긴 했다. 정확히는 상체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수분을 머금은 머리카락은 평소보다 더 짙었다. 미처 마르지 못한 물이 굴곡진 몸 위로 흐르다가 방울져 떨어진다. 고개를 내리고, 눈을 내리뜬 채로 머리카락을 헝클이며 물기를 털어 낸다. 움직임에 따라 미세하게 모양을 달리하는 근육이 왜 이리 노골적으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잔 근육이 적당히 붙은 하얀 몸이 예쁘다. 그리고 조금, 아주 조금 야한 것 같다.

뭐?

‘나 미쳤냐?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정정한다. 한우주는 몸이 좋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우주의 몸이 마음에 들었다거나 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누가 봐도 감탄할 만하니까. 거장의 예술 작품을 보고 모두가 공통으로 느끼는 감정 같은 것이다.

“나 부르려던 거 아니었어?”

어느새 한우주가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와선 말한다. 아니, 좀. 떨어졌으면 좋겠다. 너무 가깝잖아. 맨살 좀 어떻게 가려 봐.

“너….”

한우주가 몸을 살짝 숙이더니 얼굴을 가까이 했다. 살펴보는 눈길에 나도 모르게 숨까지 참아 버린다. 귓가에 심장 소리가 울리는 것만 같다.

“뺨이 붉은데.”

“…….”

그럴 리가 없다. 한우주 눈이 이상한 거다. 아닌가? 얼굴이 조금 뜨거운 것 같기도. 더워서 그런 걸 거야. 분명 그렇게 말하려 했는데 입술이 달라붙은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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