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머리가 어지럽다. 시선을 떨궈 대리석이나 본다. 한우주는 남의 얼굴을 대놓고 들여다보더니,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안도하는 한편 의아했다. 내가 왜 긴장을 하지? 어차피 남자끼리인데. 체육복 갈아입을 때나, 수영할 때나, 심지어 이유 없이 벗고 뛰어다니는 놈들도 있잖아.
‘…역시 비엘 게임이라 그런 거겠지?’
게임 장르 탓에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심장이 뛰고 얼굴에 열이 오른 것이다. 거기에 순수한 감탄이 살짝 섞였을 뿐이다. 그렇게 결론짓는다. 그런데도 여전히 어딘가 찜찜하다.
“왜 넋이 나갔어?”
“악!”
한우주가 기척도 없이 불쑥 나타났다. 그새 교복까지 갖춰 입었다.
“왜 이렇게 놀라냐.”
“아니, 갑자기 나타나니까 그렇지!”
“네가 넋 놓고 있어서 눈치 못 챈 거겠지.”
“그….”
그런가?
“됐고, 이거 입어.”
교복이다. 그런데 사이즈가 조금 큰 것 같다?
“내 거야. 교복 여분 있더라.”
“내 교복은?”
“방금 건조기에 넣었어. 더 늦어도 괜찮으면 1시간 기다리고.”
“…네 거 입을게. 고마워.”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샤워실 안에 들어가 교복을 갈아입었다. 상의는 품이 좀 넉넉한 수준이라 입을 만했다. 문제는 바지다. 바지가 길어서 꼴이 조금 웃기다. 아니나 다를까 한우주가 나를 보곤 조금 웃었다. 내 몸은 아니지만 대놓고 비웃으니 분하다. 다리 길이 좀 줄여 보라는 억지를 피우며 투덕대다가 겨우 집을 나섰다.
교문에 도착하고 보니 지각이라 부르기엔 양심이 찔렸다. 4교시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이건 그냥 오전 결석이잖아. 살면서 이렇게 학교 늦어 본 적이 없는데…. 나는 몸이 아파 병원에 가야 하는 지경이 아닌 이상 절대 지각하지 않는 학생이었다. 그러니 이 상황이 익숙지 않은 건 당연하다.
교문 앞에서 발이 딱 붙어 버렸다. 코앞에 닥치고 보니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선생님께 혼나는 거야 당연히 싫고, 지각해서 반 아이들의 시선이 모이는 건 더 싫다. 싫은 걸 피하려고 최선을 다해 성실히 살아왔는데….
“뭐 해? 안 들어가?”
한우주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다. 그렇겠지. 어제도 지각하고 아주 당당했으니까. 들어간다. 들어갈 거라고. 심호흡하는데 옆에서 계속 신경을 긁는다.
“겁나?”
“아니? 내가 왜?”
“겁먹은 것 같은데.”
“전혀 아닌데.”
“거짓말한다.”
“아니라니까?”
찔려서 눈에 힘을 주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와서 하기엔 좀 웃긴 말이긴 한데, 한우주 앞에서 약하거나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결국, 오기로 한우주를 앞질러 걸었다. 운동장을 빙 둘러 본관을 향해 거의 뛰듯이 걸었다.
“야!”
한우주가 뒤에서 날 부른다. 거리가 꽤 벌어졌는지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무시하고 마저 걷는다. 그런데도 계속 무어라 소리를 치더니, 내 쪽으로 달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곧, 가방이 강하게 당겨졌다.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가려는 걸 한우주가 붙잡았다.
동시에 코앞에서 야구공이 빠르게 스쳐 갔다. 미친. 심장이 벌렁거린다.
“멈추라고 했잖아!”
“아, 아파.”
“…….”
움켜잡힌 팔이 시큰거렸다. 한우주는 한숨과 함께 나를 놓아주었다. 동시에 한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야구공이 날아온 방향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거리가 점차 좁아진다. 야구복 차림에, 한 손에는 글러브를 끼고 있었는데 모자가 긴 그늘을 드리운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모자를 조금 들어 올리며 인사한다. 가라앉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
“…공 못 보셨어요? 여기 어디에 있을 텐데.”
역시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인하성.
화를 내야 마땅한 상황인데도 그러지 못했다. 우연이라 여기고 싶지만, 아닐 것이다. 상대는 인하성이다. 나를 못 봤을 리가 없다. 공을 잘못 던졌을 리도 없다. 분명히 이쪽을 겨냥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 해도 그렇다. 나를 향한 인하성의 시선에서 날카로운 적의가 느껴졌다.
어째서? 의아했으나 깊이 생각하기 어려웠다. 두려움에 뇌까지 얼어 버린 듯했다. 인하성은 말 그대로 또라이다. 광기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놈. 웬만해선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이로웠다. 과격함과 행동력으로만 따지면 이 게임에서 인하성을 이길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한우주가 내 앞을 막아선다. 팔이 자연스레 한우주의 움직임에 따랐다. 나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한우주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우주 선배, 안녕하세요.”
인하성의 표정이 가면을 갈아 끼듯 순식간에 변했다. 눈을 접으며 온화하게 웃는다.
“저 기억하세요? 어제도 만났는데.”
“응.”
한우주의 목소리가 유난히 나긋하다. 그러곤 내게 잡힌 소매를 보기에 아차, 싶어 놓아주었다. 한우주는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지극히 일상적인 행동, 차분한 목소리.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인하성과 시선을 바로 맞춘다.
“공 못 던지는 애잖아.”
“…….”
인하성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웃는 얼굴은 여전했으나 행동이 부산했다. 글러브를 쥐었다 피기를 반복한다.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 보는데요.”
“그래?”
한우주는 몸을 돌리며 인하성을 흘겨봤다.
“그럼 앞으로 많이 듣겠네.”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듯 마냥 무심한 말투다. 무거운 적막 속에서 한우주의 발소리만이 선명히 들렸다.
“뭐 해? 우리 늦었어.”
나를 부르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가던 길을 향했다. 독한 시선이 뒤통수에 매달린 듯했다. 차마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혹시라도 인하성이 우리에게 달려들어 주먹질이라도 할까 봐 속이 타들어 갔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디링-
「System:이벤트 목록이 갱신되었습니다. :: 인하성 :: 공 못 던지는 애」
***
4교시가 거의 끝나갈 즈음에야 교실 앞에 도착했다. 또 앞문으로 향하는 한우주를 끌고 뒷문을 통해 교실에 들어선다. 한우주가 지옥의 입을 열기 전에 90도로 허리를 접어 가며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한우주는 옆에서 고개만 까딱였지만, 선생님은 크게 무어라 하지 않고 넘어가셨다.
다만 반 애들이 저들끼리 뭐라 소곤대는 탓에 교실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간간이 한우주가 어쩌고, 조현우가 어쩌니, 익숙한 이름이 들려와 신경 쓰였다.
“아직 수업 안 끝났다. 집중해!”
소곤거림은 선생님의 외침과 동시에 사그라들었다. 별 얘기 아니겠지. 한우주야 그렇다 쳐도 조현우는 밥 먹듯 지각하는 학생은 아닐 테니, 보기 드문 광경에 말 한두 마디 얹었을 것이다. 그러려니 하고 넘긴다.
선생님께는 죄송하지만 남은 수업은 한쪽 귀로도 듣지 않았다. 인하성과 한우주의 일을 곱씹기에 바빴다. ‘공 못 던지는 애’라니. 완전히 처음 보는 이벤트다. 아마도 히든 루트에 추가된 것일 터이다.
뭔 놈의 히든 루트가 이렇게 살벌해? 인하성이랑 한우주 연애할 수 있는 거 맞아? 인하성의 태도는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그런데 한우주는 거절 선택지를 누르다 못해 찢어 구겨서 인하성 얼굴에 던지는 것만 같다.
‘이거 그건가? 첫인상이 나쁠수록 더 깊이 빠지게 되는 사랑…?’
무섭다. 이 게임에서의 ‘더 깊은 사랑’이란 무엇일까. 인하성 루트가 어땠더라, 기억을 되짚어 본다.
우선 한우주는 지금처럼 재수 없게 굴지 않았다. 오히려 치대는 거 다 받아 줘서 인하성이 제대로 꽂혔지.
인하성은 지금까지 그 또라이 같은 폭력성과 집착을 야구에 쏟아서 겨우 사람 구실을 한 거다. 그런데 그 대상이 야구에서 한우주로 바뀌고, 한우주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전부 경계했다. 그러다가 사고 친 거다. 폭력 건수가 여럿 잡혀 야구부에서 퇴출당하고, 창창한 미래는 사라졌다.
인하성의 세상은 순식간에 좁아져 오직 한우주뿐인 삶을 살아간다. 불안과 집착은 나날이 깊어지고, 한우주의 모든 것을 의심한다.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을 빌고, 협박하면서. 망상과 의심, 질투가 끊이질 않는다. 한우주는 그런 인하성을 내치지 않는다. 이게 트루 엔딩이다.
이 루트에서 인하성은 한우주를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았다. 무슨 루트든 ‘이게 사랑이야?’ 하는 의문은 있었지만, 인하성 루트는 유독 심했다. 오히려 한우주를 증오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우주마저 잃으면 제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두려움과 이기심, 공포와 집착. 내가 너를 사랑함으로써 혼자가 되었으니, 너도 혼자가 되어야 한다는 비이성적 생각. 그 외에도 온갖 폭력적인 감정이 서로를 병들게 했다.
결국, 인하성의 망상은 극에 달하고 급기야 한우주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진짜 개미친놈이다. 싸움의 끝에 가선 미안하다, 내가 정신이 나갔었다, 널 사랑한다는 등의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 인하성이라는 놈이다.
이전엔 게임이니까, 현실이 아니니까 그럭저럭 넘길 수 있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무게감이 다르다. 고작 이틀이지만, 내가 겪은 한우주는 숨을 쉬고, 생각하고, 말하고, 제멋대로인 것 같으면서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가상의 인물로 여기고 넘어가기가 힘들다.
괜한 생각일까? 어쨌든 이 게임은 미연시잖아. 잘만 하면 한우주도 인하성을 사랑하게 될 테고…, 비록 엔딩은 그따위지만 사랑하니까… 행복…하려나?
‘…미치겠다. 한우주가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 둘이 사랑하길 바라야 하는 거야?’
여기서 나가기 위해선 그래야만 한다. 한우주는 게임 캐릭터다. 여기서 나가면 다시 볼 일 없다. 아니 근데 당장 내 눈앞에… 아니, 한우주는 게임 캐릭터… 생각이 쳇바퀴를 돌았다.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가, 관자놀이를 짚고 끙끙 앓으며 고뇌했다. 그때, 누군가 내 이마를 꾹 눌렀다. 고개가 뒤로 젖혀진다.
한우주다. 내 자리 앞에 서서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한다.
“뭐 해.”
뭐 하긴, 네 미래의 연애 사정 때문에 머리 굴리고 있었다.
“그냥… 이거저거 생각하고 있었어.”
“생각 그만해. 나가자.”
주변이 조용하다. 교실에는 한우주와 나, 둘뿐이었다. 점심시간인가? 언제 종이 쳤지.
“어디 가려고?”
“매점.”
…조현우는 돈이 없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한우주에게 빵과 우유를 갚기로 했다. 나는 머쓱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다녀와! 난 배가 안 고프네. 좀 피곤하기도 하고.”
“…….”
“그, 연준이. 서연준이랑 같이 먹어.”
“걔 방금 돌려보냈어.”
“어? 왜?!”
아니, 어떤 미연시 주인공이 공략캐를 돌려보내냐고! 황당함에 큰 소리가 나왔다. 한우주는 못마땅한 듯 눈을 가늘게 뜨며 팔짱을 꼈다.
“어제 기억 안 나?”
“…어제 뭐?”
설마 빵 사 달라는 건가? 급격히 불안해졌다. 한우주 너 지금 벼룩 간을 빼 먹으려는 거야.
“내가 얘기 좀 하자고 했는데.”
헛다리 짚었다. 다행이다.
“그냥 자 버렸잖아.”
“…….”
“일어나. 나가자.”
기어코 이렇게 되는구나.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점심시간을 한우주랑 보내게 되었다. 심지어 이번엔 서연준도 없다.
공략캐한테 욕하고, 쫓아내고…. 얘는 연애할 생각이 있긴 한 걸까? 문득 텅 빈 이벤트 목록이 떠올랐다. 처음엔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는데, 가능하겠더라.
그도 그런 게, 한우주 이놈… 아무리 봐도 연애 생각 없잖아.
미연시 주인공이면서….
이래도 되는 거냐고…….
막막함에 걸음이 축 처졌다. 한우주가 몇 번인가 나를 재촉했지만, 저놈 목소리를 들으니 상심이 깊어져 머리까지 가라앉는다. 답답하면 혼자 매점 가라지. 차라리 그랬으면, 싶은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 속도에 맞추어 걷고 있더라.
한우주 골 때리는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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