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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7화 (7/150)

7화

2. 공략캐의 기본 소양

느릿느릿, 겨우 도착한 매점에서 한우주는 초코 빵과 바나나 우유를 계산했다. 제가 한 말은 까먹은 것인지, 다행히 나더러 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제와 같은 곳으로 향한다. 마찬가지로 옥상 문은 잠겨 있었다. 한우주는 미간을 살짝 좁히더니 바로 앞 계단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 옆에 앉아 한우주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웬 초코 빵을 내게 건넨다.

“뭐, 뭐야? 나 배 안 고프다니까?!”

“뭐래.”

한우주가 심드렁히 말한다.

“빵 봉지 좀 뜯어 보라고.”

“아….”

요즘 들어 쪽팔린 짓을 왜 이렇게 많이 하냐. 아무렇지 않은 척 빵을 건네받고는 봉지를 뜯었다.

툭.

“…….”

“…….”

너무 세게 뜯었나 보다. 초코 빵이 힘차게 튀어나오더니 데굴데굴, 계단을 타고 굴러간다. 빠르게 한우주 눈치를 살폈다. …한우주의 눈빛이 평소보다 공허하게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일까? 착각이길 바란다. 새로 사 줄 수도 없다. 조현우 지갑은 그냥… 장식품이니까….

“미, 미안….”

“…….”

“많이 배고프냐…?”

“굶어 죽을 정도는 아니야.”

“…다음부턴 날 믿지 마. 그냥 서연준을 데려와.”

한우주는 대답 대신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았다. 쭉 빨아 먹더니 오만상을 짓는다.

“너무 달아.”

“단맛에 먹는 거지.”

“내 취향 아냐.”

“그럼 왜 샀는데?”

“어제 네가 맛있게 먹길래 궁금해서.”

내가 어제 초코 빵에 바나나 우유를 먹긴 했지.

“조현우 입맛 못 믿겠네.”

“아니, 지가 멋대로 사 왔으면서?”

어이가 없어 노려보는데 신경도 안 쓴다. 게다가 취향 아니라고 말한 것치고는 잘만 마신다. 진짜 이상한 놈이다. 나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고개를 돌려 한우주를 바라봤다.

“할 얘기 있다며.”

“음….”

한우주가 텅 빈 바나나 우유를 옆에 내려놓고는 눈썹을 찡그렸다가, 풀었다가 한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어 한우주를 유심히 살폈다. 곧 시선이 마주친다.

“어제.”

“응.”

“네가 그랬잖아. 갈 곳이 없다고.”

아, 이거 물어보려고 뜸을 들였나.

“왜 그랬어?”

“…갈 곳이 없어서 그랬지.”

한우주는 대답 없이 눈만 깜빡였다. 그래, 부족한 대답인 거 나도 안다.

“얼마 전에 도어 록 비밀번호를 바꿨는데 까먹었어. 그래서 못 들어가.”

적당히 그럴듯한 말로 답했다. 비밀번호를 몰라서 못 들어가는 건 맞으니까…. 한우주는 여전히 대답이 없다. 더 말해 봐, 시선이 독촉한다.

“들어가려면 열쇠 집 불러야 해.”

아직도 대답이 없다.

“그런데 부를 돈이 없어.”

그제야 한우주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질문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기 냄새가 심하던데.”

“…그건 내가 고깃집 알바를 해서.”

“알바를 하는데 돈이 없다고?”

이 자식이?

“수입이 적어.”

“아.”

꽤 얄밉다. 한우주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갈 곳이 없는데 왜 나한테 연락을 해?”

“…그러게?”

한우주가 눈이 가늘어진다. 아, 알겠다고.

“연락할 사람이 마땅찮아서 연락처 뒤지다가 실수로 통화 버튼 눌렀는데 네가 받았어.”

“음.”

그만 물어봤으면 좋겠다. 생각하기 무섭게 한우주가 다시 물었다.

“그때 왜 울었어?”

“…그걸 묻는다고?”

“어.”

“꼭 대답해야 해?”

“왜, 말하면 또 울 것 같아?”

“그건 아닌데.”

“그러면 말해.”

한우주가 원래 이렇게 탐구심이 깊었나? 원망스레 흘겨보았지만 꿈쩍 않는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이유야 많지. 막막하고, 외롭고, 짜증 나고, 슬프고. 그래서 운 것도 있고….”

공연히 손등을 쓸어내리다가 겨우 다시 입을 연다.

“누가 와 주니까 안심돼서. 그게 다야.”

“아.”

적막이 이어진다. 기껏 대답했더니 반응이 ‘아.’ 이게 다다. 저기서 뭘 더 말하나 싶긴 하다마는.

“끝이야? 다 물어봤어?”

한우주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

지금이라면 뭔가 질문해도 괜찮지 않을까. 흐름을 타 어떻게든 한우주의 머릿속을 캐낼 생각이었다.

“뭔데.”

“아? 아, 그러니까.”

한우주에게 묻고 싶은 것을 리스트로 만들면 한 트럭은 가뿐히 채울 것이다. 그러나 당장 신경 쓰이는 것, 알고 싶은 것을 굳이 하나 꼽자면….

“인하성한테 왜 그랬어?”

공략 캐릭터에 대한 태도다.

“누구?”

“…야구하는 애. 그, 공 던지는.”

“아.”

이름조차 까먹은 거야? 인하성 이거 미운 놈도 못 되는 거 같다. 관계에서 제일 무서운 게 무관심인데…. 인하성은 공략캐라고…. 한우주는 별생각 없다는 듯 허공만 응시했다. 결국, 내 쪽에서 다시 말을 꺼냈다.

“걔는 너랑 친하게 지내려는 것 같던데.”

“으음.”

반응이 시큰둥하다.

“또 보게 되면 대화라도 해 봐. 의외로 잘….”

…잘 맞을 수도 있잖아. 뒷말이 턱 끝에 걸린다. 하필 지금 인하성 루트의 한우주가 떠오른 탓이었다. 인하성 루트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싶어 최대한 좋게 말하려 했는데, 양심이 쿡 찔렸다.

정말 이래도 괜찮을까? 나는 인하성이 어떤 놈인지 빤히 알고 있잖아.

그때, 어떤 생각이 머리에 박혔다. 엉뚱하고 민망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 그런 거.

“한우주.”

“응.”

“이상하게 듣지 말고 진지하게 대답해 줘.”

“뭔지 들어 보고.”

마른침을 삼킨다. 진중하게 눈을 맞추고, 소리를 낮추어 말한다.

“너 혹시, 혹시 말이야. 그… 맞는 거 좋아해…?”

“…….”

“아니, 이상한 뜻으로 물어보는 건 아니고. 만약 그렇다고 해도 뭐라 할 생각 없거든.”

“…….”

“…그, 아니다. 내가 너무 사적인 걸 물어봤나? 역시 그렇지? 나도 참 예의가 없다. 그치.”

“…….”

싸늘하다. 한우주의 표정도, 주변의 공기도, 나의 체면과 용기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기타 등등 모든 게 얼어붙어 버린 것만 같다. 그래, 내가 미친 질문을 했다. 피폐물 게임을 하더니 사고의 흐름이 어떻게 되어 버렸나 보다.

창피해서 고개를 숙였다. 한우주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냥 당장 머리 치고 기절해서 기억 잃은 척하고 싶다. 진심으로.

“왜….”

차디찬 적막을 먼저 깬 것은 한우주였다.

“그런 걸 왜 물어보는 거야?”

되묻는 목소리에서 당혹감이 느껴진다.

“…….”

“장난은 아닌 것 같고.”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겠지? 왜 항상 이런 식으로 질러 놓고 후회하는 걸까. 만약, 만에 하나 정말로 한우주가 그런 성향이라고 해도 내게 솔직히 말해 줄 리가 있나? 어쩌면 본인 성향에 대한 자각이 없을 수도 있잖아.

왜 이걸 간단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을까. 친구가 내게 ‘안태원 너는 좀… 바보같이 굴 때가 있어.’라고 말했을 때, 놀리지 말라고 웃으며 넘어간 일이 떠올랐다. 돌이켜 보니 놀린 게 아니라 진심이었던 것 같다. 뒤늦게나마 친구의 말에 동의한다. 난 바보다.

아오, 안태원. 뭐든 좋으니까 해명해. 뭐라고 해? 몰라!

얼굴 근육에 자아라도 생긴 것처럼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쪽팔려서 찡그렸다가, 자신에게 분노했다가, 이미 벌어진 일에 절망해 끝에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는다. 그 난리를 치는 동안 한우주는 그냥 나를 봤다.

“나한테 바라는 거 있어?”

“어?”

“목적이 있는 건가 싶어서.”

“아니, 그게 아니라….”

“날 때리고 싶어?”

“뭐?!”

목적이야 있다. 연애시켜서 엔딩 보고 여기를 나가야 한다. 그것뿐이다. 살면서 폭력으로 희열을 느낀 적은 절대 없다. 온몸으로 항변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한우주는 내게서 조금 떨어지곤 말했다.

“변태.”

“…….”

이 게임에 변태가 얼마나 많은데. 내가 변태면 걔네들은 다 뭐야?! 한우주는 아까부터 허둥지둥하는 나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아까 내가 떨어트린 초코 빵을 주우며 말한다.

“교실 갈래. 변태랑 단둘이 있기 좀 그렇다.”

그러곤 먼저 가 버리기에 서둘러 쫓아갔다. 걷는 내내 옆에서 무어라 조잘거렸는데 내용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오해를 풀기 위해 발악했다는 것만 알겠다.

한우주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아.”, “음.”, “어.” 같이 짧은 반응만 늘어놓다가 끝내 울적해진 나를 보고 픽 웃었다. 나는 그제야 한우주가 장난을 쳤다는 걸 알았다.

얼이 빠져 입을 못 다물겠다. 한우주는 또 웃었다. 이 녀석의 숨겨진 취향이나 성향 같은 건 하나도 건지지 못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한우주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짓궂다.

한우주는 굳이 먼 길로 둘러서 교실로 갔다. 이유를 물으니 그냥 걷고 싶어서, 라고 하더라. 말 한마디 없이 있다가도 예고 없이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건다.

“조현우.”

지금처럼 말이다. 이번에도 나를 놀리려는 것일까 봐 경계하며 답했다.

“응?”

“내가 야구하는 애랑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갑자기 그건 왜?”

“그냥. 그래 보여서.”

어리둥절하다. 여기서 내가 ‘응. 꼭 친하게 지내 줘!’ 하고 말하면 따를 건가? 굳이 나한테 물을 필요 있어? 속마음을 짐작하기 힘들다. 그리고 내 마음도 모르겠다. 아까의 의문, 인하성과 한우주에 대한 고민은 매듭지어지지 못한 채로 생각의 구덩이 한편에 남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꼭 그런 건 아니야.”

“그럼 뭔데?”

“적어도 걔는 너한테 친근하게 구니까…?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잖아.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라는 얘기였어. 꼭 인하성이 아니어도, 상대가 누구든 간에.”

한우주는 기껏 물어 놓고 반응이 없었다.

“한 번만 제대로 대화해 봐. 네 마음에 들면 친구 하고, 아니면 마는 거지.”

아무래도 이게 내 최선인가 보다. 한우주를 인하성 루트로 밀어 넣기엔 양심이 아프다. 딱 한 번만이다. 딱 한 번만 가능성을 열어 두고 보는 거다. 나머지는 한우주의 뜻에 맡기는 게 맞을 것이다. 한우주가 싫어하면 인하성 루트는 깔끔히 포기하자.

내게 있어선 큰 결심이었다. 원래 몸으로 돌아가고, 말고의 문제가 관련되어 있으니까. 비장하게 마음을 다지던 때였다.

“야, 조현우.”

“어?”

“네가 왜 그런 걸 신경 써?”

“그런 거?”

“내가 누구랑 어떻게 지내든 상관없잖아.”

“야, 그게 뭔….”

생각보다 말이 앞섰다.

“상관있어. 너잖아.”

“…….”

조만간 입을 틀어막든가 해야지. 내가 생각해도 표현이 이상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너는 내 친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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