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한우주는 아침잠이 많다. 진작 알고 있었지만 겪어 보니 상상 이상이다. 오늘은 절대 지각하지 않겠다는 일념 아래 알람을 단단히 맞춰 두어 6시에 기상했다. 그리고 한우주의 방문을 마구 두드렸다. 대답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방 안에 들어섰다.
살면서 이 정도로 아침에 약한 놈은 처음 본다. 6시에 한우주 깨우기, 1차 실패. 그래, 6시에는 그럴 수 있다. 씻은 후 6시 40분에 한우주 깨우기, 2차 실패. 교복 입고 와서 7시에 한우주 깨우기, 3차 실패.
한우주의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20분. 7시에는 일어나야 느긋하게 준비해도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다. 나는 한우주를 흔들다 못해 살짝 때리기 시작했다.
“야! 한우주! 일어나!! 일어나라고!”
“시끄러워….”
한우주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린다. 기가 찬다. 이불을 거두려 드니 어떻게든 붙잡고 버틴다. 뭔 줄다리기를 하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한쪽 팔을 못 쓰는 처지에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자, 잠깐!”
결국, 그대로 이불과 함께 끌려가 한우주의 위로 엎어져 버렸다. 민망함은 둘째 치고 왼쪽 팔이 눌려 아팠다. 앓는 소리를 내자 그제야 한우주가 눈을 뜬다.
“…너 뭐 하냐?”
“야…아, 아프다. 팔, 팔.”
한우주는 도통 잠이 깨지 않는 듯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나를 떼어 내며 깁스한 팔을 흘긋거리더니 하품과 함께 고개를 떨군다.
“…지금 몇 신데.”
“7시 5분? 10분. 그 정도.”
한우주가 퍼뜩 고개를 들곤 매섭게 나를 쏘아봤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8시에는 출발해야 한다, 언제까지 지각할 셈이냐, 잘 거면 학교에서 자라, 잔소리를 한참 쏟아 내고 나니 겨우 침대에서 기어 나온다.
“씻고 준비하고 나와. 알았지?”
“알았다고….”
어쨌든 해냈다. 오늘 드디어 정시 등교하는 한우주를 보겠구나. 생각하기 무섭게 샤워하러 들어간 한우주가 도로 나와 방을 빠져나간다. 뭐야, 쟤 어디 가?
보통 졸린 게 아닌지 비틀비틀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이 불안하다. 조심해, 눈은 뜨고 있는 거지? 건네는 말에 대답이 없다.
한우주는 그대로 주방으로 향했다. 뭘 하나 싶었는데 남은 죽을 데워 내놓고는 나더러 먹으란다.
“야, 무슨. 내가 하면 되는 걸 가지고.”
“다 나을 때까지 주방 쓰지 말라고….”
“내가 이 정도도 못 할 것 같아?”
“어. 넌 엎을 것 같아….”
비척비척 다시 씻으러 가는 모습이 이제는 안타까워 보인다. 녀석, 말은 저렇게 해도 의리가 보통이 아닌 게 기특하다. 살면서 크게 아픈 적이 없다 보니 간호받을 일도 없었는데, 간지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씻고 나온 한우주에게 아침 식사를 권했지만 자긴 원래 아침을 먹지 않는다, 속이 안 받는다며 거절했다.
7시 50분, 천천히 걸어도 지각은 안 할 시간이다. 나갈 채비를 하는데 한우주가 내 오른쪽 손목을 잡아 들더니 무언가를 채웠다. 시계다.
“갑자기 뭐야?”
“시계.”
“그 정도는 보면 알거든?”
“시계 겸 녹음기.”
웬 녹음기? 한우주는 내게 채운 시계를 만지며 입을 열었다.
“오늘 야구부 사람이랑 인하성 부모가 널 찾을 거야.”
“아.”
“건드리지 말고 그냥 차고 있으면 돼. 지금부터 24시간 뒤까지 작동하도록 설정해 놨으니까.”
“…증거 같은 거야? 소송이라도 걸려고?”
“글쎄, 상황 봐서. 말이 안 통하면 그래야지.”
“…….”
인하성 쪽 사람들이랑 뭔가 얘기하긴 하겠지. 예상한 일이다. 인하성 루트에서도 폭력 건이 생길 때마다 보통 난리가 아니었으니까. 쉬쉬하며 넘기다가 더는 감쌀 수 없을 지경이 되고서야 징계를 받았다.
그건 그거고, 지금의 상황은 꽤 당황스럽다. 아무래도 한우주는 마음먹고 인하성을 사회적으로 묻어 버릴 모양이다. 기분이 이상하다. 인하성 루트에서의 한우주가 떠오른 탓이다. 만약 한우주가 인하성과 원만히 관계를 쌓았다면? 소송은 무슨. 합의금을 대 주면 대 줬지. 그 인하성이 괜히 한우주에게 의존했겠는가?
한우주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인하성을 꺼리게 된 걸까. 첫 만남 이벤트 직후만 해도 원작과 다를 게 없었는데.
“적당히 대화하고 나와.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알았어.”
나는 시계를 내려다보며 이런저런 가능성을 계산해 보았다. 야구공. 한우주가 인하성에게 야구공을 돌려주지 않은 것이 시작이었던 것 같은데….
“가자. 지각하기 싫다며?”
한우주가 나를 생각의 늪에서 끌어낸다. 한우주의 얼굴은 무척 평온해 보였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다. 뺨에 남은 멍 자국만 빼고.
***
오늘의 작은 목적은 완벽히 달성했다. 지각하지 않고 한우주를 무사 등교시킨 것이다. 그러나 작은 성취감을 누릴 틈도 없이 긴장감이 몰려와 온몸을 덮었다.
인하성 쪽에서 무슨 말을 할까, 한우주는 적당히 하고 나오라 했지만, 상대는 ‘적당히’를 모르는 미친놈이다. 상황이 어디로 어떻게 튈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수업은 흘려듣고, 쉬는 시간에 찾아온 조현우의 친구들에게도 건성으로 답했다. 그리고 올 게 와 버렸다. 3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에 담임이 나를 불렀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미연시 주인공이 전 공략캐를 소송할 수도 있단다. 이게 뭘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게임 장르가 바뀐 건가? 여기 오고부터 하루도 잠잠한 날이 없다. 조현우는 조연일 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깊이 엮여 버린 거지.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교무실을 찾았다. 교무실의 안쪽, 회의실 앞에서 담임이 내게 손짓했다. 내 안색이 안 좋긴 한가 보다. “긴장하지 마라, 별 이야기 없을 거야.” 하며 나를 달랜다. 아니요. 별 얘기 할 것 같은데요.
회의실에 들어섰다. 한우주의 말이 맞았다. 인하성과 그 부모, 야구부 사람까지 있다. 와, 치사하다. 조현우는 혼자인데. 보건 선생님과 담임이 내 보호자로 오긴 했지만, 영 못 미덥다.
“그쪽이 현우 학생?”
인하성의 왼편에 앉은 남자가 말했다. 인하성의 아버지다.
“네.”
“안타깝게 됐어. 뭐, 그 나이대 남자애들이 놀다가 다치기도 하고. 그러면서 크는 거지.”
…초반부터 세다. 억울해서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
“인하성이랑 논 적 없어요. 제 동의도 없이 욕하면서 밀치는 걸 놀이라고 하긴 어렵죠.”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는다. 인하성의 어머니가 차분히 말한다.
“사고였지. 하성이는 널 다치게 할 의도가 없었어.”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전 다쳤잖아요.”
인하성의 아버지가 팔짱을 낀 채로 의자에 몸을 기댄다. 내뱉는 말에 한숨이 섞여 있었다.
“학생 몸이 약한 게 우리 하성이 탓은 아니잖아?”
허.
이 인간이?
“들어 보니 학생 사정이 딱하더라고. 요즘 시대에 영양실조가 어디 흔한가? 아니지. 학생이 비쩍 마른 것도 아니고, 키가 작은 것도 아니고. 그 정도로 뼈에 금이 갈 줄 알았겠나? 따지고 보면 하성이도 욕본 거 아니겠어? 애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
“서로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현우 학생.”
“저, 아버님. 그런 말씀은 조금….”
담임이 나서 인하성의 아버지를 말리려 들었다. 담임 보기에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나 보다.
나는 인하성을 향해 말했다.
“인하성.”
“네.”
“너 한우주한테 달려들어서 멱살 잡았지. 내가 말리려 드니까 꺼지라면서 밀쳤잖아. 난 그대로 벽에 부딪혔고. 기어코 한우주까지 쳤더라.”
“…….”
“본 눈이 몇 개인데, 아니라고 말할 건 아니지?”
“네. 그렇게 됐네요. 죄송합니다.”
“그게 폭력이지. 아니면 뭐야?”
“아니라고 한 적은 없는데요.”
“네 부모님은 아니라고 하시는데.”
“그럼 아닌가 보죠.”
반성하는 척도 안 하네. 이젠 놀랍지도 않다. 드륵,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조현우 학생. 하성이만큼 재능 있는 선수는 드물어. 무슨 말인지 알지?”
이번엔 야구부 감독인지 뭔지, 그쪽 사람이 나불거렸다.
“이대로 하성이가 폭력으로 징계받으면 많이 곤란해. 기록 한 줄만 남아도 선발 때 골치 아파져. 요즘 워낙에 단속이 심해서….”
이 사람아. 단속을 괜히 하겠냐?
“사람이 살면서 실수 한 번쯤은 할 수 있잖아. 딱 한 번인데. 이번 일로 기회를 영영 잃는 건 너무하지.”
개소리가 쭉 이어진다. 이후의 말은 거의 안 듣다시피 했다. 굳이 안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이 인간들은 이번 일을 조용히 덮고 넘어가길 바라고 있다. 돌고 돌던 이야기가 드디어 종착지에 도달했다. 결론은 이거다.
합의금 줄게. 이거 먹고 사고인 셈 쳐.
솔직히 조현우 사정에 안 받으면 손해인 액수다. “원하면 더 얹어 줄 수 있어.”라고 말하는 태도에 여유가 넘쳤다. 내가 거절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필요 없어요.”
그 꼴이 얄미워서라도 순순히 따르지는 못하겠다. 감독이 내 대답에 황당하다는 듯 열을 냈다. 내내 고상한 척 헛소리만 하던 인하성의 부모는 결국 흥분해 상스러운 욕설을 섞어 가며 나를 몰아붙였다. 더는 그 자리에 있기 힘들어 자리에서 일어난다. 담임이 다급히 나를 붙잡았다.
“혀, 현우야 잠깐만. 바쁜 시간 내서 오신 건데 이야기는 마무리하는 게….”
“전 더 할 말 없어요. 치료비는 당연히 받아야 하는 거고, 그 이상은 잘 모르겠네요. 영수증은 담임 선생님 통해서 전달드릴게요.”
“현우야.”
“수업 아까 시작했어요. 갈게요.”
거의 도망치듯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피해자는 난데 왜 욕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머릿속에 조각난 채로 흩어져 부유하던 이름 모를 감정이 꾸물꾸물, 하나로 뭉쳐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기분 나쁠 정도로 질척한데도 씻어 낼 수 없다.
곧장 교실로 향하지 못하고 가까운 화장실에 뛰쳐 들어갔다. 심장에 추를 달아 놓은 듯 가슴이 무겁다. 참담함이 뇌를 지배하고, 외로움이 발목을 붙잡았다. 애써 지켜 온 평정이 무너져 내렸다.
우습게도 나는 인하성이 부러웠다. 앞뒤 안 가리고 자신을 감싸 줄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게 부러워 죽겠다. 난 이곳에 오고 온갖 억울한 일을 겪었는데 하소연할 곳이, 완전한 내 편이 없다.
미친놈들. 나도 가족 있어. 충분히 사랑받고 자랐다고. 내가 이딴 취급 당하는 거 알면 가만 안 있을 텐데. 누구는 소리 못 지르나? 우기고 욕할 줄 몰라서 안 하나? 야. 우리 엄마랑 누나가 너희보다 욕 잘해. 나도 욕할 수 있다고. 저급하고 무례한 짓인 거 아니까 안 하는 거야.
울화통이 치민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해? 나는 조현우가 아닌데.
‘어떻게든 돌아가야 해. 돌아갈 거야.’
어지러운 감정과 생각이 하나로 귀결된다. 나의 현실로,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
메뉴 창을 띄우고 게임 종료 버튼을 눌러 본다.
「System: Tip. 게임 종료 기능은 엔딩 달성 이후에 개방됩니다.」
이전에도 본 적 있는 문구다. 엔딩, 엔딩…. 어떻게 해야 할까. 히든 루트와 일반 루트의 차이는 뭘까. 인하성은 왜 공략캐에서 제외된 걸까. 특정 조건을 충족했다고 했지. 그 조건이 도대체 뭔데?
생각하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돌이켜 보면 실마리가 잡힐지도 모른다. 메모할 게 필요한데,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거울에 조현우가 비쳐 보인다.
…조현우뿐만이 아니다.
서너 걸음 뒤에 인하성이 있었다. 인하성이 쫓아왔다. 시선이 마주친다. 기세가 심상치 않다. 게임에서 인하성이 큰 사고를 치기 직전, 저런 얼굴을 했던 것 같다. 심장 소리가 귓가에서 울린다. 시끄럽다.
침착해. 침착해야 한다. 정신 차려, 안태원. 빠져나갈 수 있어.
“진짜.”
인하성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나를 짓누른다. 천천히 뒤돌아 인하성을 마주한다. 한 걸음. 인하성이 내 쪽으로 다가온다. 따라 뒷걸음치려 했으나 세면대에 가로막혔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
“끝까지 사람 빡치게 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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