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항상 그런 표정이더라. 왜요? 내가 쥐어패기라도 할 것 같아요?”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한쪽 팔로 세면대를 짚었다가 힘이 빠져 휘청이고 만다. 겨우 다시 중심을 잡아 바닥에 시선을 둔 채로 입을 열었다.
“그,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
새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인하성이 헛웃음을 친다.
“내가 그쪽한테 뭘 했는데? 씹, 내가 한우주 치려고 했지 그쪽 치려고 했냐고.”
미친놈, 미친놈. 쫓아와서 하는 말이 그거야? 아득한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야구공.”
이대로 맞을 바에는 뭐라도 알아내자.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정보가 필요하다. 그만큼 절박했다. 왜? 무엇 때문에 루트를 이탈한 거야?
“어제 야구공. 나 노리고 던진 거잖아.”
“…아시네요?”
‘공 못 던지는 애’ 이벤트. 일반 루트에는 없던 것이다. 이 사태의 원인으로 유력하다. 인하성이 나, 아니. 조현우에게 공을 던지면서 발생한 것 같은데, 인하성은 도대체 왜 그런 짓을 벌였을까.
설마.
“…한우주 때문에 그런 거야?”
인하성이 콧잔등을 찡그린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어깨가 움츠러든다. 불안정한 호흡을 고르고 어떻게든 인하성과 시선을 맞춘다.
“너 한우주한테 관심 있었…지? 내가 옆에 있어서? …설마 그것 때문에 그래?”
인하성은 두 가지 상황에서 자제력을 잃고는 했다. 첫째는 자신이 모욕을 당할 때, 둘째는 질투심에 눈이 멀었을 때. 굳이 가능성 있는 걸 꼽자면 후자일 것이다. 조현우가 인하성을 모욕한 적 있다면 진작 두들겨 맞았을 테니까. 나는 미친놈이랑 옷깃도 스치기 싫은데 모욕은 무슨.
“다 알고 있으면서 뭘 처 물어보고 지랄이야.”
오감이 예민해졌다. 인하성이 주먹을 쥐고, 힘줄이 불거지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갔다.
“너… 오해한 거야. 나랑 한우주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누굴 바보로 알아?”
인하성은 얼굴까지 벌게져선 이를 악물고 말했다.
“둘이서 아주 사람 우습게 만들지. 어?”
“…….”
“저기요. 나도 눈치가 있거든요. 나 좆 된 거 안다고. 선처 같은 거 바란 적도 없어. 그쪽이 입을 다물든 말든….”
쿵, 큰 소리와 함께 진동이 전해진다. 인하성이 주먹으로 벽을 쳤다. 슬슬 저놈 인내심도 한계일 것이다. 이다음엔 내가 맞겠지.
“한우주 그 새끼가 어떻게든 조지겠지. 감독이고 뭐고, 전부 헛다리 짚고 있는 거 안다고.”
험악하게 치켜뜬 눈이 정확히 내 얼굴을 향했다.
“한우주가 나한테 왜 이러겠어. 너 말고 또 무슨 이유가 있냐고.”
인하성 얘는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럴 리 없잖아.
“내 말 틀려?”
“…야, 인하성.”
잠긴 목소리를 쥐어 짜낸다. 인하성과 시선을 맞추고 최대한 바른 발음으로 생각을 전하고자 했다.
“다시 말하는데 너 오해하는 거야. 한우주가 그러는 거 나랑은 관련 없어. 분명 너희 둘 사이에 뭐가 있었을….”
“아.”
…미치겠다. 더 빡쳤나 봐. 이제 진짜 끝이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 이대로 맞겠구나.
“잡아떼는 거야, 멍청한 거야? 이 개….”
인하성이 내 멱살을 잡아 비튼다. 순간 숨이 턱 막히고, 온 세상이 느리게 돌아가는 듯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본능에 모든 걸 맡겨 버렸다. 그러니까, 최후의 발악을 했다.
“아, 으아아아아아악!”
“닥쳐!”
“아악! 아아아아악!!”
온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나는 사람이 그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인하성은 당황한 듯 한순간 멈칫했다가 닥치라고 으름장을 놓기 시작했다. 시선이 방황하더니 결국, 내 멱살을 놓고 입을 막아 버린다. 인하성의 손은 더럽게 커서 얼굴이 거의 절반은 가려졌다.
“닥치라고 했잖아!”
하필 이 순간 떠오르는 게 이따위 상상이다. 수업 중 시끄럽게 울리는 화재경보기 소리에 “어우, 시끄러워.” 하고 가볍게 무시하며 수업이나 마저 하는 안전 불감증 한국인 같은 거.
아, 제발. 누군가는 들었을 거 아냐.
욕을 하다가 살려 달라고 빌었다가 속에서 난리가 났다. 그때, 바깥 복도에서 빠른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누군가 안으로 들어온다. 한 사람이 아니다. 두 명, 그것도 아는 얼굴들이다.
“너희들 뭐 하는 거야!”
“…거기 있는 거 현우야?”
“하… 진짜.”
인하성이 한 발 뒤로 물러난다. 나는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버렸다. 서연준이 달려와 나를 살핀다. 다른 한 사람은 윤태현이다. 안 그래도 마음이 번잡한데 이게 무슨 조합인지 모르겠다.
전 공략 캐릭터 인하성, 현 공략 캐릭터 서연준, 윤태현, 그리고 조연 조현우.
우연인지,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이벤트의 전조인지. 불쑥 의심이 들었지만, 생각을 정리할 만큼 여유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하성아. 너 어제부터 왜 이러는 거니. 정신 나갔어?”
윤태현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인하성을 다그친다. 인하성은 제 목을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건성으로 답했다.
“오늘은 아무도 안 때렸는데요.”
서연준의 표정이 굳는다. 인하성 쪽으로 몸을 틀더니 답지 않게 큰소리를 낸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연준아. 넌 현우 데리고 보건실 좀 가라. 지금은 그쪽이 우선인 것 같다.”
“아니, 선생님. 인하성 저 미친놈이….”
“내 말 들어. 인하성 너는 나 따라오고. 아, 연준아. 다녀와서 너희 반에 자습 좀 하고 있으라고, 미안하다고 전해 줄래? 부탁한다.”
“…네.”
“고맙다. 그리고 현우야, 너는 진정되면 교무실 좀 들러라. 오늘은 조퇴하는 게 낫겠다. 내가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려 놓을 테니까.”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 듯, 윤태현은 그대로 인하성을 데리고 나갔다. 인하성이 순순히 따를 리 없지만, 윤태현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실랑이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소리가 점차 멀어진다.
“현우야, 괜찮아?”
서연준이 나를 부축해 일으킨다. 절대 괜찮지 않다. 힘없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서연준은 당황해 어쩔 줄 모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버텨 봐.”
서연준은 옆에서 내내 무어라 떠들었다. 수업 중에 비명이 들리더라. 느낌이 안 좋아서 선생님이랑 찾아갔는데 너랑 인하성이 있었다. 인하성 그 망할 자식이 어쩌고저쩌고.
대꾸할 힘도 없이 걷다가, 결국엔 질질 끌려가다시피 했다. 머리 아프고, 속도 안 좋고, 서연준은 말이 많다. 걱정해줘서 고맙긴 한데, 정신없으니 제발 조용히 해 달라고 빌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보건실에 도착했다.
약을 타 먹고 몸을 뉘니 그제야 좀 살 거 같았다. 서연준은 괜찮냐고 반복해 물으며 옆에서 기웃거리다가 보건 선생님께 쫓겨났다. 다행이다. 서연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꽤 귀찮았고 받아 줄 만한 여유도 없었다.
눈이 슬슬 감긴다. 이번엔 피곤해서 그런 거겠지. 또 기절 같은 건 아니겠지? 인하성은 어떻게 됐을까? 윤태현이 뭐라고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하겠지. 윤태현은 신임 교사라서 별 영향력이 없다. 아마도 금방 풀려날 것이다. 설마 인하성이 보건실까지 찾아올까…? 정말 그러면 어떡하지? 생각이 부풀어 오르다가 공기가 가득 찬 풍선처럼 펑, 터진다.
그리고 곧, 기절 같은 잠에 빠졌다.
***
창문에 노란 단풍이 잔뜩 걸린 듯했다. 사방이 나른한 빛에 둘러싸인 게 포근하다. 덕분에 방금 눈을 떴는데도 정신은 깨어나지 못하고 꿈속 어딘가를 한참 동안 헤매었다.
눈꼬리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길게 하품을 하고 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얼마나 잔 거야. 벌써 해 지고 있네. 교무실에 들르라는 윤태현의 말이 떠오른다. 조퇴증은 필요 없겠다. 잘됐다. 담임도 윤태현도 보기 싫다.
촤륵. 누군가 침대를 둘러싼 커튼을 거두어 낸다. 해 질 녘의 강한 빛이 고스란히 쏟아져 눈을 찌른다. 반사적으로 한쪽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상대가 누구인지 미처 보지 못했는데도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한우주?”
상대는 말없이 침대 위에 무언가를 올렸다. 아, 조현우 가방이다.
“다 잤어?”
“응….”
“그럼 일어나. 이러다 늦는다.”
“늦어?”
“병원.”
맞다. 팔…. 한동안 매일 오라고 했지.
머리가 또 울린다. 왜 이래. 스트레스성인가? 조현우 몸이 약하긴 한가 봐. 바닥을 딛고 서려는데 순간 머리가 핑 돌면서 눈앞이 컴컴했다.
휘청, 넘어질 듯 몸이 기운다. 그러나 넘어지지 않았다.
“…….”
한우주의 팔이 나를 감싸 지탱한다. 그, 고맙긴 한데 자세가 좀 그렇다. 이러면 꼭 끌어안긴 것 같잖아. 서둘러 떨어지려 했으나 어림없다. 한우주는 팔을 거두지 않았다.
…한우주?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들었지만, 눈이 부셔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잠이 덜 깼는지 하다 하다 한우주 얼굴에서 빛이 나는 건가, 하는 괴이한 생각이 잠깐 들었다. 당연히도 아니다. 그냥 한우주가 선 쪽에 창이 있어 빛이 강하게 비치고 있을 뿐이다.
“하, 한우주. 한우주.”
“왜.”
“이제 놔줘도 괜찮은데….”
묵묵부답이다. 못 들었나? 그럴 리는 없을 텐데. 다시 한번 한우주를 부르려던 때였다.
“혼자 설 수 있어?”
“응.”
“정말로?”
“응? 응…. 이제 진짜 괜찮아.”
“그래.”
온기가 내게서 멀어진다. 한우주는 그대로 뒤돌아 보건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가방을 메며 생각했다. 얼른 건강해져야지. 어지러워서 미연시 주인공 쪽으로 넘어진다? 이건 얼굴에 난 상처를 치료해 주는 것 이상으로 파렴치한 짓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공략캐한테 의심 살 일인가.’
재수 없는 말과 목소리를 상기한다. 인하성. 걔는 도대체 날 뭐라고 생각한 건지. 원체 질투가 심하고 지레짐작하다가 급발진하는 게 전문인 놈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마는….
나를 질투해서 공을 던졌고… 던져서? 그게 공략 루트 삭제까지 갈 일인가? 한우주와 인하성이 서로에 대한 가능성을 아예 닫아 버릴 정도야?
끝맺지 못한 생각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한우주는 도대체 언제, 뭐 때문에 인하성을 싫어하게 된 걸까.
…이따가 슬쩍 물어봐도 되려나. 그 정도는 괜찮을지도 몰라. 그리고 앞으로는 정말 조심해야겠다. 내가 한우주 옆에 있는 것만으로 공략캐가 질투하고 오해하고 난장판이 된다.
비엘 게임이라 이런 거야? 공략 캐릭터에게는 한우주의 한 톨 우정조차도 사랑으로 보이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녀석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나사가 빠졌으니까.
아무튼, 나는 조현우가 아니니 원래의 조현우처럼 행동할 수 없다. 노력은 하겠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그러니 따지자면 원래 게임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끼어들어 버린 것이다.
내 행동이 게임의 흐름에 영향을 줄 수 있겠구나. 이제야 깨닫는다. 조연의 몸이긴 해도 한우주랑 친한 조연이니까….
‘…집에 가서 정리해 봐야겠네.’
내가 클리어한 게임을 기준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 필요한 건 참고하되, 시시각각 변하는 캐릭터의 상황과 감정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무슨 게임이든 공략의 기준, 중심을 단단히 잡아 두면 나머지는 금방이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 해야만 해. 속으로 몇 번이고 읊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쿵.
“악!”
…쭉 전진하다가 문에 이마를 박았다. 닫혀 있는 줄도 몰랐다 아오, 진짜 아프다. 혹 나는 거 아냐?
눈물이 찔끔 나왔다. 고개를 떨구고 아픔이 가실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뭐 해?”
“아니, 아무것도….”
아무렇지 않은 양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이마가 아프다. 오른손을 들어 슬슬 문질러 보는데 역시 아프다.
“…….”
…뭐지?
설마 멍들었나. 아니면 엄청 빨개졌거나. 한우주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아니, 얼굴이 아닌가? 어딜 보는 거야?
‘어?’
한우주의 시선이 닿은 곳이… 잠깐만, 왜 이렇게 가볍지?
황급히 오른쪽 손목을 확인한다. 하얀 피부만 훤히 보인다. 아무것도 없다.
손목시계가, 녹음기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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