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교무실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분명 차고 있었는데 도대체 언제 잃어버린 거지?
“미안해. 잠깐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연준에게 전화를 걸어 시계의 행방을 아느냐 물었다. 서연준은 내가 시계를 차고 있었는지도 모르더라.
“진짜 미안한데 화장실 좀 갔다 올게. 거기 있을지도 몰라. 아니면 교무실에….”
“됐어.”
“뭐?”
“그냥 가자고. 병원 문 닫는다니까.”
한우주는 말하고 바로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아니, 진짜로 괜찮은 거야? 어쩔 줄 모르고 자리에 멀거니 서 있자 한우주가 내 쪽을 돌아본다. 마지못해 걸음을 뗀다.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에 걱정거리가 하나 더 눌러앉았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시계가 인하성 손에 들어가 버리면 어떻게 하지.
***
병원에서 의사가 무어라 했는지, 치료를 어떻게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망연히 있다 보니 밖이었고, 주변은 어둡고, 한우주가 말을 걸고 있었다.
“오늘도 죽 먹기는 싫을 거 아냐.”
“어? 뭐라고?”
“죽.”
“…우리 무슨 얘기 중이었지?”
“저녁 뭐 먹고 싶냐고.”
“아….”
밥을 먹긴 해야 하는데. 굳이 내가 좋아하는 걸 찾아 먹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머리는 체면이나 예의 따위를 지키려 노력한다. 반면에 몸은 충실하게 음식을 갈구하고 있다. 먹고 싶은 거… 떠오르는 게 몇 가지 있다. 그런데 말 못 하겠다.
생각해 봐. 병원비 내 줘, 재워 줘, 밥도 줘, 한우주가 내 부모님이냐고. 한없이 받기만 하는데 나는 한우주가 준 시계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하나 더, 미래의 애인 후보와 틀어진 일에 엮여 있기까지 하다.
그래, 인하성. 망할 인하성. 그놈 때문에 여러 의미로 제명에 못 살겠다. 언제 또 붙잡혀 맞든지, 스트레스로 단명하든지.
이쯤 되니 한우주 얘가 인하성이랑 사귀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싶다. 직접 플레이해 봤는데도 안 믿긴다. 인하성 루트는 이제 그거 같다. 그…, 뭐라고 하더라. 적폐 루트?
“조현우.”
“아, 미안.”
대화에 도통 집중할 수가 없다. 자꾸만 인하성 그 파렴치한이 떠오른다. 애써 머릿속을 비우며 답한다.
“배 별로 안 고파. 죽 조금 남지 않았나? 그거 먹으면 되지. 나 죽 좋아해.”
“그래?”
절대 아니다. 죽 안 좋아한다. 어제 먹은 전복죽이야 호불호를 넘어서는 수준의 맛이라 깔끔히 비울 수 있었던 거다. 솔직히 아무리 맛있는 죽이어도 세 끼니 연속으로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나도 염치라는 게 있다.
“응. 진짜.”
“그럼 나는?”
“응?”
“나까지 죽 먹으라고?”
“아니?”
“그럼 나는 뭐 먹어?”
…그걸 왜 나한테 묻지?
“한우주 너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네가 좋아하는 건 뭔데?”
“그건 왜?”
“그거 먹게.”
“왜?!”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아니, 죽 데워 먹는 사람 앞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겠다고?
한우주는 어서 대답이나 하라는 듯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나 괴롭히려고 이러는 건가. 시계를 잃어버려서 내심 화난 걸까? 그렇다면 할 말 없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그래. 한우주 너 많이 먹어라. 생각나는 건 전부 읊을 테니까. 이 중 하나쯤은 너도 좋아하는 게 있겠지.
“초밥에 냉모밀.”
“초….”
“구체적으로는 연어 초밥, 광어 초밥, 장어 초밥, 대방어, 회덮밥, 바삭한 돈가스, 칼국수, 샤브샤브, 꿔바로우, 삼겹살, 등갈비, 포크립, 안심 등심 뭐든 스테이크, 아무거나 파스타, 피자, 치킨, 보쌈, 족발, 쟁반국수, 양푼에 계란이랑 냉장고에 있는 야채 아무거나 넣어서 밥이랑 고추장 넣어 싹싹 비빈 비빔밥, 얼큰한 육개장, 돼지국밥….”
“…….”
“디저트로는 편의점 아이스크림이 좋지. 돈 좀 있으면 티라미수. 크림이 너무 달지 않고 부드러우면서 빵은 촉촉해야 해. 거기에 과육 씹히는 딸기 라테까지 있으면 완벽하겠네.”
“…야.”
“왜?”
“초밥이랑 티라미수만 기억나.”
“그럼 그거 먹어.”
“…그래.”
한우주는 얼떨떨하게 자리에 우뚝 서서 눈을 몇 번 끔뻑였다. 두어 걸음 전진하다가 걸음을 멈추더니 내게 묻는다.
“초밥 잘하는 곳 알아?”
“응?”
알 리가 있나. 조현우도 모를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다가 「지도」 창을 띄운다. 갈 만한 곳…. 하나 보인다. 잘하는 초밥집은 아니지만.
“앞장설게. 따라와.”
나는 지도 창을 열심히 노려보며 앞장섰다. 지도가 시야를 가리는 바람에 몇 번 넘어질 뻔한 것을 한우주가 잡아 줬다. ‘또냐?’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에 항변하고 싶었지만 어쩌겠어. 나만 보이는 지도가 있다고 말해? 안 될 일이다. 그냥 좀 억울하고 말아야지.
움츠러든 마음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는다. 길을 찾는 데 열중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이 두 가지 덕에 인하성에 대한 생각을 덜 수 있었다.
한우주는 나의 바로 옆에서 걸었다. 별다른 대화는 없지만, 존재만으로 안정감이 든다. 보폭을 맞추어 천천히 걷는다.
나는 이런 사소한 것을 좋아했다. 곁의 상대를 인지하고 함께 걷다 보면 자연스레 걸음의 박자가 같아지는, 그런 것 말이다. 긴장이 풀어지고, 날 선 기분이 차차 안정을 찾는다.
그제야 오전부터 내내 나를 짓누르던 거대한 감정의 부피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줄고, 줄고, 또 줄어들고 나서야 겨우 형태가 보인다.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이자면 ‘좆같음: 인하성 새끼 관련’ 정도가 되겠다. 이걸 어쩔까. 고민은 짧았다. 그냥 묻어 두자. 어차피 어디 가서 털어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피폐물 미연시 공략캐에게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사고 위협받았어요. 이런 말을 어디 가서 할 수 있겠어. ‘좆같음: 인하성 새끼 관련’ 감정에 스티커를 붙인다.
배출 불가 쓰레기.
평생 혼자 안고 가야 할 아픈 경험이 생겼다는 사실에 마음이 씁쓸했다. 그 씁쓸함까지 함께 묶어 구석진 곳에 밀어 넣는다.
어쨌든 당장은 무사하잖아. 내가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현재의 일에 집중하자. 의식적으로 반복해 속으로 읊었다.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엔 한우주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기껏 열심히 길 찾아왔더니 한우주의 표정이 어둡다.
“…여긴 왜 왔어?”
“너 먹을 저녁밥 사러 왔지.”
“초밥?”
“응.”
“여기서 초밥을 팔아?”
“너 마트 와 본 적 없어?”
“있을걸?”
‘있을걸?’은 또 뭐야. 와 본 적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그래, 한우주는 부자잖아. 부자는 할인 마트 안 오나 봐.
지도에 떡하니 대형 할인 마트가 있어서 이리로 오긴 했는데, 하필 퇴근 시간이 겹쳐 사람이 붐볐다. 한우주는 대놓고 불편한 티를 냈다.
“나가고 싶어.”
“야, 어디 가. 조금만 참아!”
대뜸 출구를 찾아 가 버린다. 어이가 없다. 옷자락을 잡아끄니 순순히 끌려온다. 한우주가 또 탈출을 시도할까 봐 서둘러 지하 식품 코너로 향했다.
“무슨 초밥 먹을 거야?”
“아무거나…. 그냥 네가 골라.”
한우주는 물 줄 시기를 놓친 식물처럼 시들시들했다. 그렇게 싫은가? 나는 좋은데. 사람 많고 활기 넘치고 무엇보다도….
“…너 뭘 사는 거야?”
“보면 몰라? 초밥이잖아.”
이 시간엔 마감 세일을 한단 말이야. 모둠 초밥을 하나 집어 든다. 비싼 육류나 초밥 같은 걸 싸게 사면 기분이 좋다.
그런데 한우주는 아닌가 보다. 눈을 가늘게 뜨고 초밥 팩을 노려봤다.
“왜 이렇게 싸? 상한 거 아냐?”
“아니야! 마감 시간까지 안 팔리면 신선도가 떨어질 거 아냐. 그래서 싸게 파는 거야.”
“그럼 곧 상할 예정인 초밥을 파는 거잖아.”
“아직 안 상했는데.”
“이 시간까지 안 팔린 거 보면 맛없는 거 아냐?”
“아니거든. 맛있거든.”
영 못 미덥다는 얼굴이다. 물론 고급 일식집에서 먹는 초밥보다는 못하겠지. 그렇지만 마트 초밥은 마트 초밥 특유의 맛이 있는 법인데.
한우주는 원한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초밥을 노려보다가 두 팩을 더 챙겼다. 연어 초밥이랑 광어 초밥이다. 세 팩을 먹으려고?
“너무 많지 않아? 모둠은 뺄까?”
“아니. 그냥 다 사.”
“다 먹을 수 있어?”
“아니.”
“뭐야….”
“세 팩 중에 한 팩쯤은 안 상했겠지 싶어서.”
“…….”
한우주의 표정은 몹시 진지했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대형 마트에서 식품 관리를 얼마나 철저히 하는데…. 꿍얼거리며 디저트 코너로 향하려니 한우주가 붙잡는다.
“초밥만 사고 나가자.”
그렇게 말하는 한우주는 지금껏 본 모습 중 가장 절박해 보였다. 결국, 초밥 세 팩만 계산하고 나왔다. 전부 마감 세일 스티커가 붙어 있어 뿌듯하다.
마트를 나오자마자 한우주가 ‘사람이 많지 않으면서’ 맛있는 디저트 파는 곳은 없냐 묻길래, 고개를 저었다. 결국 우리는 아쉬운 대로 편의점에 들러 티라미수 맛 아이스크림을 샀다. 거기에 또 인상을 구기며 “티라미수 맛 아이스크림은 뭐야. 이상해.” 하는 것이다.
아이스크림이 2+1을 하길래 3개를 샀는데 또 뭐라고 하려 들길래 재빨리 노려봤다. 그러나 한우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뭐라더라, 하나는 위조품 끼워 주는 거 아니냐고 했던가?
진짜로 어이가 없다. 누가 편의점 아이스크림을 위조하는데? 게다가 그걸 하필 계산대 앞에서 말했다. 나는 당황한 알바생분께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
하루가 길었다. 한우주 집에 도착하고 나선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렸다. 죽 먹기 싫다. 귀찮은데 그냥 잘까? 안 되겠지. 오늘도 병원에서 영양이 어쩌고 잔소리하던데. 그렇지만 정말로 기력이 없다. 꼼짝도 하기 싫어.
한우주는 식탁 위에 초밥을 펼쳐 놓고 하나하나 접시에 옮겨 두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 반쯤 누워 있었는데, 한우주가 날 불렀다. 목소리에서 당혹함이 느껴진다. 무슨 일이지?
“야, 조현우. 이상한 게 있어.”
“뭔데?”
아이고, 몸이야. 지친 몸을 이끌고 비척비척 식탁을 향해 걷는다. 한우주가 젓가락으로 뭔가를 집고 있었다.
초밥 팩에 들어 있는 데코용 풀이다. 코팅된 종이 쪼가리 말이다. …쟤 뭐 하냐?
“장식용이야. 버리면 돼.”
“장식? 예쁘지도 않은데?”
“기분 내라고 넣은 거야.”
“이상해.”
“…응! 이상하긴 해. 혹시라도 먹지 말고 꼭 버려.”
적당히 답하고 다시 소파로 돌아가려는 때였다.
“조현우, 어디 가?”
“나? 피곤해서 쉬려고….”
“밥 먹어.”
“숟가락 들기도 힘들어.”
“됐고, 이리 와서 앉으라고.”
“…….”
마지못해 자리에 앉는다. 한우주는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죽 데우려나, 싶었는데 젓가락을 하나 더 들고 와 내 앞에 내려 둔다.
“먹어.”
“뭘? 초밥을?”
“응.”
“네 밥이라며.”
“상했을 수도 있잖아. 네가 먼저 먹어 봐.”
한우주는 나를 놀리는 걸까, 아니면 같이 먹자는 걸 돌려 말하는 걸까. 게슴츠레 뜬 눈으로 한우주를 쳐다본다.
“내가 기미 상궁이야?”
“그런 셈 쳐.”
내가 곧장 먹지 않자 한우주가 황당한 일을 벌였다. 젓가락으로 연어 초밥을 집어 들어 나에게 내미는 것이다.
“너 뭐 해?”
“숟가락 들 힘도 없다며.”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래서 안 먹겠다고?”
“나 갑자기 힘 생겼어. 젓가락은 들 수 있어.”
이렇게까지 하는데 식사를 거절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이건 아니다. 진짜 아니다. 한숨과 섞인 말을 흘렸다.
“너는 무슨… 친구 사이에 이러냐….”
미연시 주인공이 조연에게 초밥을 직접 먹여 줘? 절대 안 될 일이다. 그랬다간 미연시의 신에게 벌받을 것이다. 나는 젓가락으로 초밥을 건네받아 입에 넣었다. 기름지고 부드러운 식감. 딱 내가 바라던 맛이다.
“신선해. 안 상했어. 됐지?”
“음….”
또 뭐가 문제인데? 한우주는 연어 초밥을 흘끔거리다가 접시를 아예 내 쪽으로 밀어 버렸다.
“내 취향 아닐 것 같다. 너 먹어.”
“…….”
“이것도 가져가. 너무 많아.”
접시에 광어 초밥 몇 개를 덜어 주며 말했다. 역시나. 같이 먹으려고 산 거 맞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아닌 척을 하지? 어제 전복죽도 그렇고…, 물어봤자 또 시침 뗄 것 같다.
“그러면 사양 않고 먹을게. 고마워.”
“뭘.”
연어 초밥 하나에 집 나간 입맛이 돌아왔다. 보란 듯 초밥을 열심히 입에 넣자 한우주도 따라 먹기 시작한다. 그러다 한 번은 둘 다 엄청 큰 와사비를 씹어 버려서, 기침하며 물 마시기에 바빴다. 한우주는 “소비자를 죽이려는 거야?” 하며 짜증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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