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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4화 (14/150)

14화

한우주는 마트 초밥 맛이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종종 인상을 쓰며 초밥을 깨작거리면서도 용케 식사를 포기하진 않았다. 느리지만 착실하게 초밥이 하나씩 줄어든다. 결국, 둘이서 초밥 세 팩을 전부 비웠다.

식사를 마친 한우주가 일어나 분주히 식기를 치우더니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두 개 가져왔다. 그중 하나를 뜯어, 내게 건넨다. 이것도 상태가 의심스러우니 네가 먼저 먹어 보라는 식이다.

방식은 다소 어이없지만, 마음 써 주는 것이 고마웠다. 한우주는 날 따라 한 입 베어 물고는 너무 달다며, 이건 티라미수 맛이 아니라며 불만을 토로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어설프게 뻔뻔한 모습이나 맛으로 투정 부리는 모습이 마냥 웃기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거침없이 해치워나갔다. 콘 끄트머리 초콜릿이 머지않은 것에 아쉬워하면서도 설레고 있을 때, 한우주가 나를 불렀다.

“야, 조현우.”

“응?”

사람 불러 놓고 아이스크림만 쳐다보더니 인상을 쓴다. 결국, 아이스크림은 버림받았다. 한참 남은 아이스크림이 두껍게 깐 티슈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아깝다. 쟤는 저번에도 바나나 우유였나, 마셔 놓고 너무 달아서 별로라고 투덜거렸던 것 같은데 자꾸만 안 해도 될 도전을 한다. 그냥 자기 좋아하는 거 사 먹지.

시선을 한우주에게로 옮긴다. 한우주는 답지 않게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오늘 어땠어?”

…어땠냐니. 인하성과의 일 말하는 건가? 대충 ‘괜찮았다.’ 하고 얼버무리려다 생각을 바꾼다. 보건실까지 찾아온 걸 보면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무슨 일이 있겠거니, 짐작은 하고 있을 것이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한다.

“어떻기는.”

아이스크림콘의 끝부분을 입에 넣는다. 초콜릿이 혀에 닿아 녹아내린다. 달아서 좋다.

“인하성 걔는 진짜 미친 새끼더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의 일은 달콤한 초콜릿 정도로 풀릴 만한 게 아니었다.

한우주는 턱을 괴고 나를 응시했다. 표정에선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나 역시 덤덤하게 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절로 가라앉았다.

“부모도 별다를 게 없더라고.”

“응.”

“좆같았어. 전부 다.”

“그래?”

한우주는 나를 동정할 생각도, 함께 분노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무심하지는 않다. 그런 태도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편안하다.

“걔 부모랑 학교는 인하성 감싸고 들더라. 돈 줄 테니 없는 일로 하자길래 거절하고 나왔어. 정신 좀 차리려고 화장실에 갔는데 인하성이 따라와서 시비를 걸었고. 붙잡혀 있다가 운 좋게 빠져나온 거야.”

“…그리고?”

있었던 일만 말하면 이게 전부인데. 한우주는 내가 무언가 더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혹시 시계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건가?

“시계는…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겠어. 미안. 교무실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 있었는데.”

“그건 됐어. 신경 쓰지 마.”

시계 얘기가 아닌가. 그럼 뭘 듣고 싶은 거지? 상황을 너무 대충 설명했나?

“교무실 불려 간 건 너도 봤을 테고, 들어가 보니 인하성이랑….”

한우주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한다.

“좆같았다며?”

“어….”

여전히 잔잔한 표정, 잔잔한 목소리로 이어 말한다.

“그런 걸 물은 거야.”

“응?”

“오늘의 일들을 어떻게 느꼈는지,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

머쓱함에 괜히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그런 걸 듣고 싶다고? 잘 모르겠다. 겨우 가라앉은 감정을 구태여 끌어내서 좋을 거 없지 않나. 서로 괴롭기만 할 수도 있잖아.

그런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속으로 삭이기만 하면….”

말을 끌며 시선을 내린다.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검은 눈동자를 가렸다. 한우주는 굳게 닫힌 입술을 떼었다가 금방 다시 다물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엇 때문에 말을 고르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어떤 사실이 와닿았다. 지금 이곳엔 한우주와 나, 둘뿐이다. 당연한 사실인데 왜 의식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이내 곧은 시선이 나를 향한다. 한우주의 차분한 목소리가 공기에 스며들고, 작고 미세한 진동이 귓가에 닿는다.

“언젠가는 무너지더라.”

그 짧은 말이 유독 깊게 들렸다. 어절 하나하나에 음울함이 묻어났다. 내 착각이고 망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사실보다는 순간의 감정이나 느낌에 쉬이 움직이곤 했다.

그 순간의 감정이 가진 이름을 나는 알 수 없다. 슬픔, 우울, 기쁨, 유대와 공감. 그와 비슷하지만, 그 무엇도 아닌 것이 마음을 두드렸다.

한우주의 말이 가진 힘은 얼기설기 묻어 둔 나의 내면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사실은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내가….”

꺼낼 일 없으리라 여긴 무거운 마음이 말로써 정리되고 구체성을 갖추기 시작한다.

“작고 초라한 사람인 것만 같았어.”

눈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를 향한 한우주의 눈동자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어, 그대로 붙잡히듯 시선을 맞추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더라. 날 지켜 주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데 인하성은 아니잖아.”

내쉬는 숨에 꾹꾹 눌러둔 마음이 섞여 든다.

“저 새끼보다 내가 배로 착하게 살았을 텐데. 진짜야. 나 엄청 착하게 살았거든? 그런데 왜 이러고 있는 건지 억울하고, 화도 나고….”

오늘뿐만이 아니다. 이곳에 온 지 사흘이 지나가는데, 매 순간이 고되었다.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하루가 지날수록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솔직히 버겁다. 이성이고 감정이고 날이 스치는 것만으로 툭, 끊겨 버릴 팽팽한 실과 같이 위태롭다.

“외로워서.”

툭, 막을 새도 없이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당황해 급히 눈가를 비빈다. 그 와중에 한쪽 손밖에 못 쓰는 게 또 서러웠다. 한번 터진 눈물은 좀처럼 멈출 생각을 못 했다. 쪽팔리게.

“아, 미안. 오늘 왜 이러냐….”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한우주가 다가와 티슈를 내민다. 뭔, 이거 몇 장이야. 티슈를 통째로 뽑아 온 거야?

“손으로 비비지 마.”

눈앞이 흐리다. 눈물을 닦자니 남은 손이 없다. 한우주는 티슈 몇 장을 집어 내 눈에 가져다 대었다.

“잠깐만… 내, 내가 할게.”

“됐으니까 가만히 있어 봐.”

들리는 것이라곤 나의 훌쩍임뿐이다. 역시 말하지 말 걸 그랬나. 꼴사납게 이게 뭐야. 설움에 들썽한 감정을 진정시키려 애쓴다.

그러나 나의 노력은 한우주 덕에 보기 좋게 무너지고 말았다. 겨우 눈물이 잦아들 즈음, 한우주는 티슈를 거두며 한마디 말을 뱉었다.

“많이 힘들었겠네.”

그 뒤의 일은 기억하고 싶지 않다. 나는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울었고, 한우주가 가져온 그 많은 티슈를 쓰고도 부족해서 한 통을 더 썼다.

더 창피한 것은 그렇게 펑펑 울면서 무른 발음으로 한우주에게 하소연을 해 댄 것이다. 누가 뭐라고 말했고, 속상했고, 인하성이 무섭고, 말하지 않으려 한 것까지 아주 탈탈 털어 버렸다. 한우주는 간간이 “응.”, “그랬어?” 하고 대꾸하며 내 이야기를 들었다.

한참 뒤, 정말로 울음이 그쳤을 땐 민망함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앉은 자리에서 굳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또다시 한우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씻고 쉬어.”

“…응.”

자리에서 꾸물꾸물 일어난다. 한우주는 그런 나를 보고 한 마디 더 얹었다.

“내일 또 못생겨지겠다.”

“뭐?”

“붕어 눈 될걸.”

짓궂게 건네는 말마저 배려처럼 느껴져 고맙기만 하다. 한우주의 진짜 의도야 알 길이 있겠느냐마는.

너무 울었는지 뇌가 저릿해, 할 말을 금방 찾지 못했다. 한우주가 “난 씻으러 간다.” 하고 멀어진다. 계단을 오르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다. 서둘러 한우주를 따라간다.

“저기, 한우주….”

잠기고 갈라져 듣기에 형편없는 목소리다. 한우주가 계단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미안했어. 여러모로….”

한우주는 한쪽 눈썹을 조금 치켜들더니 팔짱을 꼈다.

“너 미안하다는 말 너무 많이 한다.”

“그건… 미안하니까 그렇지.”

“나는 괜찮다고 했는데.”

“그래도.”

한우주의 표정이 안 좋다. 길고 긴 하소연을 듣는 내내 평온하던 표정에 얼핏 짜증이 담긴 것 같았다.

“친구라며?”

한우주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흘겨보았다.

“너랑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이도 아닌데.”

한순간 얼굴을 찌푸린다. 고개를 가로젓더니 제 이마를 꾹꾹 누르며 눈을 감는다.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사과하지 않아도 돼.”

“…….”

놀라움과 당혹이 한데 섞였다. 한우주가 이런 식으로 기분 나쁜 티를 낸 적이 있던가? 사과 듣는 게 그렇게 싫었나. 아니면 내가 갑자기 울면서 주절대는 걸 받아 주느라 피곤한 걸지도 모른다. 나중에 사과해야 하나. 그러면 또 싫어할까?

“…나 들어갈게. 잘 자.”

어수선한 고민이 방향을 찾기도 전에, 한우주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뒤로 한참 한우주 생각을 했다. 씻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 내 머릿속에선 온갖 추측이 빗발쳤다. 한우주도 인하성한테 맞았잖아. 인하성 얘기를 자꾸 해서 짜증이 났나? 설마 초밥이 정말로 살짝 상해 있었나. 별생각을 다 했다. 혼자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올 리가 없는데도.

그렇지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그야, 한우주니까. 게임의 주인공이고, 일단은 같이 살고 있고, 또….

‘나를 그렇게 신경 써 주는데.’

먼저 하루를 물어봐 주고, 속상한 이야기를 들어 주고, 위로까지 해 줬잖아. 그러고 보면 곤란할 때마다 한우주의 도움을 받았다. 물질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낮에는 ‘이곳에 내 편이 없다.’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한우주 하나쯤은 내 편으로 여겨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니지, 내가 아니지. 한우주랑 조현우는 이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잖아.’

원래의 조현우와 쌓은 친밀함이 있기에 지금의 내가 한우주의 호의를 받을 수 있는 거다. 당연한 사실인데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골 때리는 놈. 뭘 바라는 건데? 게임 캐릭터랑 친구 먹기? 아니잖아.

뻔뻔한 생각을 해 버렸다. 어쨌든 한우주의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 내일 아침에 꼭 고맙다고 인사해야겠다.

…그리고 또 하나, 앞으로 해야만 하는 일을 떠올렸다. 이 게임의 숨겨진 조건과 규칙성을 찾는 것. 한우주와 공략캐 사이의 접점을 늘릴 것.

침대에 누워 지금까지의 일을 돌아본다. 특히 인하성 건에 대해서.

‘아. 그걸 깜빡했네. 한우주한테 물어봐야 했는데.’

한우주가 인하성을 꺼리게 된 이유를 알아야 했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하나뿐이다.

한우주는 내 생각보다 우정, 친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만약 인하성이 조현우에게 고의로 공을 던진 걸 눈치챘다면 마음이 거북할 수도 있겠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한 손으로 핸드폰을 툭툭 두들긴다. 앞으로 해야 할 것, 지금까지 알게 된 것을 정리해 두고 싶었다. 아오, 한쪽 팔을 못 쓰니 답답해 죽겠다.

톡, 토독.

느릿느릿 하나씩 적어 내린다.

「1. 공략캐와 한우주 접점 만들기:

- 서연준? 가능성 있는 거 맞지?

- 윤태현. 얘는 좀.

- 임도윤. 얘도 좀…. 어쨌든 한우주랑 가족 아님?

2. 한우주의 낮은 평판?: 이유 찾아보기

3. 조현우 집 문 열기: 언제? 돈은 어떻게 벌어?

4. 루트 삭제 조건 찾기:

- 인하성의 경우 처음 보는 이벤트가 여럿 발생했음. 과정에서 사이 틀어짐.

- 왜 발생? → 한우주가 인하성 모욕함

- 왜 모욕함? → 조현우와의 우정 때문에?(확실치 않음. 나중에 한우주한테 슬쩍 물어보자.)

5. 시계 찾아보기: 진짜 어디 갔지?」

‘…….’

나 아는 게 없구나. 4번 항목을 죽어라 노려본다. 이유야 어떻게 되었든 한우주가 인하성을 모욕한 게 시발점이라면…. 인상을 찌푸린다. 그리고 마지막 한 줄을 추가해 적는다.

「* 루트 삭제 이유: 한우주가 공략캐를 싫어해서? 여지가 사라진 걸지도.」

‘이게 최선이냐.’

그렇지만 이것 말고는 짐작 가는 게 없다. 한우주가 도저히 애정을 품을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멀어지면 공략캐에서 제외되는 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결국, 메모에 한 줄을 더 추가한다.

「* 공략캐의 기본 소양: 한우주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것.」

이게 어떻게 조건이냐.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그러나 당장은 다른 걸 생각하기 힘들었다. 게임 인생 통틀어 최악의 데이터를 적었다.

생각할 게 많은데 피곤해서 자꾸만 눈이 감긴다. 꾸역꾸역. 뭐든 적어 보려 노력했지만, 결과물은 처참했다. 알아보기 힘든 무언가를 남겨 두고, 깊은 잠에 빠졌다.

「* 특이 사ㅎ앙: 한웆 만ㅇ이 착ㅎㄴ듯? 솔ㅈㅈ긱히 공ㅇ랶캐랑익기 아ㄲㅏ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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