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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5화 (15/150)

15화

3. 움트는 것

한우주의 말이 맞았다. 혹은 그새 내 눈이 말도 안 되게 높아졌거나. 제일 자주 보는 얼굴이 한우주라 그런가?

아침에 거울을 보는데 깜짝 놀랐다. 떡두꺼비 같은 게 비쳐 보인다. 떡두꺼비치고는 좀 귀엽긴 한데 어쨌든 두꺼비는 두꺼비다.

덕분에 한우주를 깨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우주는 오늘도 졸음을 몰아낼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한우주를 열 번쯤 흔들었을 때였나. 가물가물한 한우주의 눈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번쩍 뜨였다.

아침부터 냉찜질하는 나를 보고 못생겼다. 못생겼어. 눈이 사라졌네. 하고 놀려 대기에 한 대 때리고 싶은 욕구를 어떻게든 참아 내야 했다.

***

4월 4일 금요일. 이곳에 온 지도 벌써 4일째.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는 평범한 하루가 흘러간다.

일단 날이 기분 좋게 화창하다. 이건 좋은 일.

담임한테 영수증을 내자마자 돈이 입금됐다. 치료비보다 조금 더 되는 돈. 이건 찝찝한 일.

인하성이 멀쩡히 등교했다. 이건 나쁜 일.

인하성은 훈련으로 바빠 한동안 정신이 없을 거라고 한다. 날 바로 찾아오지 않는 걸 보니 시계를 인하성이 가지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이건 다행인 일.

오전 시간, 그리고 점심시간까지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간다. 어리둥절할 정도로 평화롭다. 지난 3일이 지나치게 파란만장했던 탓일까? 심지어는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맞다. 고등학교는 공부하러 오는 곳이지. 미연시 주인공 연애시키려다 팔 부러지는 곳이 아니었지? 참 다행이다!’

그렇다고 내가 공부만 한 것은 아니다. 조현우로서 공부보다 중요한 의무가 있지 않은가. 정작 나보다 더 큰 의무를 짊어진, 연애 안 하는 미연시 주인공 한우주는 수업 시간이고 쉬는 시간이고 자기에 바쁘다. 저 꼴을 보니 항상 나만 애쓰는 것 같아 지금까지 많이 억울했다.

이제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생산성이 없는 게 가장 큰 이유다. 또, 한우주가 미운 일만 하는 건 아니니까…. 애초에 게임이라는 게 플레이어가 클릭 한 번 않으면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잖아?

물론 나는 클릭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한우주가 내 말에 순순히 따르는 것도 아니다. 필요한 노동력이나 난이도 차이가 장난 아니긴 한데 그 점은 넘어가자. 더 생각하면 슬퍼지니까.

5교시를 마친 쉬는 시간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윤태현과 서연준을 찾아갈 것이다. 웬만하면 윤태현은 만나고 싶지 않지만, 일단은 공략캐이니 어쩔 수 없다. 물어볼 게 있기도 하고.

윤태현은 교무실에서 학생들의 질문을 받아 주고 있었다. 수업 잘하고, 학생들이랑 친하고, 얼굴도 뭐… 봐 줄 만한 편이다. 생각이 열린, 학생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는 선생이라는 평이 자자해 인기가 꽤 많다. 컴컴한 속내를 아는 내가 보기엔 지나치게 열려 있는 것 같지만. 확 닫아 버리고 싶게….

조금 떨어져 학생들의 질문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러다 재수 없게 윤태현이랑 눈이 마주쳤다. 내게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뭐야?

“미안한데 선생님이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다시 올래? 그 전까지 할 수 있는 만큼 풀어 봐. 내가 보기엔 조금만 더 고민하면 충분히 혼자 풀 수 있을 것 같거든.”

잘만 설명하더니 갑자기 학생들을 물린다. 진짜, 진짜, 설마 나 때문은 아니겠지?

“현우야.”

이 미친. 내 쪽으로 온다. 도대체 왜??

“…안녕하세요.”

“몸은 좀 괜찮니?”

“네. 낫고 있어요.”

“어제 많이 놀랐을 것 같은데….”

“지금은 괜찮아요.”

자꾸만 말을 붙이려 든다. 윤태현이 또 뭐라 하기 전에 재빨리 용건을 말했다.

“선생님. 시계 못 보셨어요? 손목시계요.”

“시계?”

“네. 어제 학교에서 잃어버려서요.”

“음, 잘 모르겠다. 본 기억이 없는데….”

그렇다면 용건은 없다. 사실 교무실에 오기 전까지는 윤태현 루트를 어떻게 열어야 하나 고민스러웠는데….

“선생님.”

“응?”

“나이가 어떻게 되셨죠?”

“그건 왜?”

“그냥요.”

“스물일곱이야.”

와….

쓰레기….

마음이 차게 식는 숫자다. 한우주랑 몇 살 차이지? 9살? 게다가 스승과 제자? 하…, 이 사람 안 되겠네.

“그렇구나…. 알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대충 인사하고 교실로 올라갈 셈이었다.

“잠깐만 현우야.”

“조현우?”

동시에 조현우의 이름이 불렸다. 익숙한 목소리에 곧장 뒤를 돌아본다. 한우주다. 교무실엔 웬일이지?

“한우주 너 왜 여기에 있어?”

“담임 봐야 해서. 너는?”

한우주의 시선이 어디론가 옮겨 간다. 윤태현. 둘이 이렇게 마주치는구나. 어쩔 수 없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니까, 뭐. 윤태현이 빙긋 웃으며 살갑게 말을 건넨다.

“우주구나. 안녕.”

“…….”

한우주가 도로 나를 쳐다본다. 고개가 미세하게 기울어 있다. 표정으로 말하는 듯했다. ‘저 사람 누구더라?’라고….

학기 시작한 지 한 달은 됐는데 한우주 진짜 수업 안 듣는구나. 윤태현을 보고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윤태현 선생님. 6교시에 저희 반 수업 맞죠.”

“응? 그렇지.”

“아~ 생각해 보니 저 질문할 게 있었는데 수학 교과서를 교실에 두고 와서요.”

“그래? 지금은 시간이 촉박하니까…. 수업 끝나고 봐 줄게.”

“감사합니다.”

알겠냐, 한우주? 너도 듣는 수업이라고. 수학 선생 윤태현이라고. 야, 알겠냐고! 열심히 눈치를 주는데 한우주가 하품을 한다. 저게?

“난 담임 보러 갈게.”

“그래….”

한우주는 윤태현에게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디링-

「System: 인물 수첩이 갱신되었습니다. :: 공략 가능 인물 :: 수학?」

「System: 이벤트 목록이 갱신되었습니다. :: 수학? :: 윤…뭐더라.」

‘…….’

이건 또 뭔데. 첫 이벤트부터 꼬이냐고. 원래 이런 식 아니잖아. 수첩에 이름조차 제대로 안 적혀 있잖아. 공략캐 취급이 이게 뭐야. 이럴 거면 차라리 안 만나는 게 낫겠다. 또 인하성 때처럼 뭔 일 생길까 봐 겁난다고.

아, 모르겠다. 고민 안 할래. 이따가 이름이나 제대로 알려 줘야지.

“그럼 전 가 볼게요.”

“잠깐만, 현우야.”

“네?”

나 좀 내버려 둬. 한우주는 쿨하게 보내 줬잖아. 조현우를 왜 잡느냐고. 이상한 말 하는 건 아니겠지?

“저번에 그 문제는 해결됐니?”

“문제요?”

“거처 말이야. 바로 며칠 전에 곤란했던 게 생각나서.”

“아… 네.”

“그래?”

“네.”

윤태현이 내 오른편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웃는다.

“그래, 다행이다. 몸조심하고, 수업 시간에 보자.”

“네.”

대답과 동시에 빠른 걸음으로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윤태현은 도대체 왜 저러지. 나한테 계속 말 붙이려는 것 같은데… 그냥 친절하게 구는 건가? 아니면 뭔가 속셈이 있나? 아니야. 내가 괜한 짐작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대로 교실로 향하려다 말았다. 한우주가 아직 안 나왔다. 곧 수업 종 칠 텐데, 금방 나오겠지 싶어서 잠깐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수업 종이 칠 때까지 나는 한우주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 얘는 왜 이렇게 안 나와?

교무실에서 선생님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 한우주와 담임은 없다. 담임도 수업 있지 않나? 교무실 안쪽을 흘긋거린다. 그러다 또 재수 없는 놈이랑 눈 마주쳤다.

“현우야? 여기서 뭐 하니?”

아오, 윤태현!

“아… 친구한테 볼일 있는데 얘가 담임 쌤한테 간다더니 안 나오네요.”

“친구…, 우주 말이야?”

“네.”

윤태현이 턱을 매만진다. 무언가 알고 있는 낌새인데 좀처럼 말을 안 한다. 답답하다. 결국, 내 쪽에서 먼저 물어봤다.

“담임 쌤이랑 우주 보셨어요?”

“아니. 보진 못했는데….”

“그런데요?”

“아마 좀 걸릴 거야. 여기서 기다리지 말고 교실로 가자.”

“왜요? 무슨 일 때문인지 아세요?”

“내가 말하기는 좀 그렇고… 나중에 우주한테 물어보는 게 낫겠다. 당장은 수업 듣고.”

진짜 뭔데? 담임이랑 한우주랑 단둘이 할 게 뭐가 있다고? 짐작 가는 게 없다.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윤태현만 없으면 엿보기라도 할 텐데, 하필 다음 시간이 수학이라 꼼짝없이 교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6교시가 끝났다. 뒷자리는 아직도 비어 있다. 슬슬 걱정되던 때에 윤태현이 다가와 “물어볼 거 있다고 하지 않았니?” 하며 귀찮게 굴었다. 다시 보니 풀 수 있을 것 같다고 적당히 둘러대 쫓아냈다.

학교 수업을 모두 마치고도 한우주는 돌아오지 않았다. 종례는 옆 반 선생님이 대신했다.

한우주의 짐을 챙긴다. 팔 때문에 가방을 멜 수 없어 걱정했는데, 한우주의 가방은 깃털같이 가벼웠다. 뭐가 들어 있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한우주에게 문자를 몇 통 보냈다.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혹시나, 싶어 2학년 6반에 찾아가 문 앞을 기웃거린다.

“어, 현우야!”

서연준이 먼저 날 찾았다. 한우주 어디 갔는지 아느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선수를 빼앗겼다.

“아까 너희 반 갔었는데 한우주도 너도 없더라? 한우주 어디 갔는지 알아?”

“…아니? 서연준 너도 몰라?”

“응. 모르는데? 설마 땡땡이쳤나?”

아무것도 모르는 걸 넘어서 티 없이 맑은 표정이다. 서연준의 시선이 내 손을 향했다.

“그거 우주 가방 아니야?”

“맞아. 안 오길래 내가 챙겨 뒀어.”

“잘됐…아, 아니다.”

“왜?”

“저번에 한우주한테 체육복 빌린 거 돌려주려고 했거든.”

“아….”

“그냥 다음에 돌려줘야겠다.”

“그냥 이리 줘. 내가 전해 줄게.”

“짐 늘어나잖아. 급한 것도 아닌데 뭐. 빨아서 월요일에 갖다주면 되겠네.”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오간다. 내가 바라는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서연준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다시 교무실로 향했다. 아무 선생님이나 잡고 담임 선생님의 행방을 묻는데, 밖에 일이 있어서 나가셨단다. 그럼 한우주도 같이 나간 건가?

‘얜 진짜 어딜 간 거야?’

전화라도 해 볼까. 복도 벽에 기대어 고민하던 때에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아, 문자다.

「한우주: 001017」

한우주다. 웬 숫자? 다시 진동이 울린다.

「한우주: 1701호. 로비에 말해 놨으니까 가서 방문객 등록하고 방문객 전용 카드 발급받아」

「한우주: 잘 모르겠으면 보안 요원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

뭐야?

「한우주: 카드 찍고 비밀번호 입력하면 문 열려」

「한우주: 학생증 있어? 로비 가서 보여 주고 없으면 전화해」

001017이 집 비밀번호야? 아니, 이런 걸 나한테 알려 줘도 돼? 가방을 내려놓고 느릿느릿 문자를 보낸다.

「조현우: 너 지금 어디야?」

…답장이 없다.

「조현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여전히 답장이 없다.

문자 보낸 걸 보면 심각한 상황은 아니겠지. 설마 인하성이랑 뭐가 있다거나? 불안감이 확 끼친다. 1층 복도 창문에 찰싹 붙어 운동장을 몰래 살핀다.

있다. 인하성. 짜증스럽게도 아주 멀쩡히 훈련 중이다. 됐어. 지금은 한우주가 우선이다. 그러면 도대체 뭘까? 짐작 가는 바가 없다. 이 역시 원작에 없던 일이다.

집 비밀번호까지 알려 준 걸 보면 학교로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발 동동 구르며 기다린다고 해결되는 것도 없고, 집에 가 있는 게 최선인가?

그때, 다시 진동이 울렸다. 곧장 확인한다.

「한우주: 병원들렀다가」

…아니, 내 질문은 안 보이냐?

「조현우: 뭔일있냐고」

「조현우: 야 한우주」

「조현우: 답장안해???」

답답해 미치겠다. 혹시나 해 전화도 걸어 봤는데 안 받는다.

가방을 팔에 걸치고,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액정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걸었다. 중간에 사람이랑 부딪힐 뻔한 뒤로 핸드폰은 얌전히 가방에 넣었다.

틈틈이 알림 창을 확인한다. 그러나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오피스텔 앞에 다다를 때까지 한우주에게 연락이 오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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