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지금껏 한우주만 졸졸 쫓아다녔지, 오피스텔을 제대로 살필 기회는 없었다. 입구, 엘리베이터, 한우주 집. 그게 전부였는데….
로비에 들어선 순간부터 완전히 쫄아 버렸다. 한우주가 전한 대로 절차를 밟고, 방문객용 카드를 발급받았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카드가 안 먹히는 것이다. 알고 보니 이건 거주민 전용 엘리베이터고, 방문객은 다른 곳을 통해야 했다.
그래서 방문객 전용 통로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여긴 카드 찍고 방문하려는 호실에 인터폰으로 연락을 취해야만 작동했다. 아니, 한우주 집엔 아무도 없잖아. 이거 어떻게 해?
우왕좌왕하다가 로비에 연결해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직원분이 한우주에게 연락하고 확인 후 들여보내 주겠다고 했다. 한우주 지금 전화 안 받을 텐데.
한숨 푹푹 쉬며 로비로 돌아가니 직원분이 하시는 말이, 1701호 거주하시는 분께 확인받았다고, 도로 가서 인터폰으로 로비에 연결하면 들여보내 주겠다고 한다. 뭐야?
“잠시만요, 1701호랑 연락이 됐다고요? 어떻게요?”
“유선으로 연락드렸습니다.”
“전화 받아요?”
“네? 네. 바로 연락됐습니다.”
이 새끼 진짜 뭐 하자는 거야?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우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받는다. 집에 들어가 또 전화를 걸었다. 안 받는다. 슬슬 빡친다. 양손으로 우다다 욕을 보내도 모자랄 심정인데 식탁 위에 핸드폰 올려놓고 검지 하나로 모음 자음 하나하나 정성스레 치는 꼴이 참 멋없다. 망할 인하성…, 2배로 화가 난다.
「조현우: 이자식아연락왜안받아」
「한우주: 집 도착했어?」
칼답 하잖아? 다시 전화를 건다. 안 받는다. 썅.
「조현우: 왜전화안받냐고글ㄹ치기힘든다고」
「한우주: 지금 전화 못 해」
「조현우: 로비에선 너랑 전호ㅏe됏다는데?」
…답장이 없다. 소파에 앉아 하나뿐인 소중한 주먹으로 쿠션을 마구 쳤다. 금방 지친다. 그러고 보니 저녁을 안 먹었다.
핸드폰 진동이 반복해 울린다. 벌떡 일어나 확인해 보니 한우주다.
「한우주: 내 방 책상 오른쪽 첫 번째 서랍에 카드 있어. 저녁 시켜 먹어」
「한우주: 주문하면 건물 직원분이 집 앞에 두고 갈 거야」
「한우주: 초인종 누르고 가시니까 인터폰 울리면 나가」
“아악!!!”
답답함에 소리를 내질렀다. 넓고 높은 거실에 비명이 울려 퍼진다. 한우주 이놈은 내 저녁 챙길 시간에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지 좀 말했으면 좋겠다.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다.
「한우주: 지금 아버지랑 있어서 연락 길게 못 해」
뭐?
…잠깐, 한우주 아버지?
그걸 왜 만나러 갔어?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당황스러웠다. 아버지에게 요구할 게 있으면 전화나 문자를 하지 한우주가 직접 찾아가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일반 루트에서는 그랬다.
한우주는 아버지를 싫어한다. 좋아할 수가 없지. 어머니랑 자길 내팽개친 아버지를 좋아할 자식이 어딨겠어.
한우주가 먼저 만나자고 할 것 같지는 않은데. 아버지 쪽에서 부른 건가? 뭐 때문에? 아까 담임이랑은 뭐 한 건데? 게임이 어떻게 되려고 이래?
상황 파악을 못 하겠다. 손가락을 움직여 문자를 보냈다. 이거 하나는 알아야겠다.
「조현우: 뭐 큰일 있는 건 아니지?」
이번에는 곧장 답장이 왔다.
「한우주: 응」
한 글자로 왔다.
“…하.”
한숨이 나온다. 오늘 하루는 순탄히 지나가나 싶었는데….
‘큰일 아니라고 하니까 괜찮겠지…?’
한 글자짜리 문자 한 통으로는 영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밥맛까지 뚝 떨어졌다. 그냥 먹지 말까, 생각했으나 안 될 일이다. 조현우 몸으로는 밥 세끼 꼬박 챙겨 먹어야 한다.
배달 어플을 켜고 먹음직한 음식 사진들을 감흥 없이 넘기고 있자니, 또다시 문자가 온다.
「한우주: 이따가 연락할게. 지금은 좀 그래」
…이따가 언제? 문자를 썼다가 지운다. 너무 보채는 것 같잖아. 내가 왜 이렇게까지 걱정하고 안달을 내지? 한우주가 어린애도 아니고.
아니, 한우주는 미연시 주인공이고, 혹시라도 잘못되면 나까지 망할 테고, 같이 살고 있으니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역시 그렇지? 이유를 찾고 나니 마음이 조금 놓인다. 한우주가 연락하겠다고 했으니까 나는 얌전히 밥 먹고 쉬고 있으면 된다.
한우주에게 밥을 얻어먹는 것과 한우주의 카드를 직접 긁는 건 무게감의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비싸지 않으면서도 영양가 있는 음식을 찾다가 나물 비빔밥을 시키기로 한다. 마침 싼 곳이 보였다. 배달비를 합쳐서 팔천 원이 좀 안 되었다.
잘 모르지만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카드를 긁고, 비빔밥을 들고 와 먹을 준비를 했다. 수저 세팅까지 마치고 보니 문자가 와 있다.
「한우주: 도대체 뭘 먹는 거야?」
「한우주: 이상한 거 먹어?」
「한우주: 학교 매점에서 산 거야? 아니면 편의점? 편의점 도시락?」
“…….”
얘는 또 왜 이렇게 유난이야. 그리고 편의점 도시락이 뭐 어때서? 맛있고 반찬 다양한 거 많은데?
숟가락을 내려놓고 답장을 보낸다. 슬슬 손가락이 아프다.
「조현우: 나물 비빔밥. 편의점 아니고 음식점 거. 안 상했고 나물 멀쩡하고 맛있어 보여. 아직 안 먹음」
「한우주: 먹고 맛 이상하면 119」
…진심인가?
「조현우: 너 도대체 매점 빵으ㄴ 어떻게 먹은 거야」
답장 없음. 바쁜가 보네. 핸드폰을 옆에 두고 비빔밥을 먹기 시작했다. 숟가락으로 밥을 뜨는 소리, 입에 넣어 씹어 삼키는 소리, 자세를 고치려다가 의자가 끌리는 소리, 모든 것이 기분 나쁠 정도로 선명하고 크게 들린다.
한우주랑 있을 때는 눈치채지 못한 것들이 눈에 띄었다. 우선 TV가 없다. 적적할 때 틀어 두면 좋은데. 아까 보니 식기도 딱 두 개씩만 있더니만, 그것도 하나는 유난히 깨끗한 게 새것 같았다. 설마 나 때문에 산 건가?
‘그리고 또….’
생각을 쥐어짜 보려 해도 잘 안 된다. 넓고 휑한 집에 혼자 있으려니 조금 무섭기도 하다. 결국 핸드폰으로 아무 영상이나 틀어 놓았다. 액정 너머 사람의 목소리를 위안 삼아 어떻게든 식사를 마쳤다.
먹은 걸 정리한 뒤 씻고 나오니 11시가 다 돼 간다. 괜히 거실을 어슬렁거리다가 방으로 올라갔다. 슬슬 잘 시간인데 한우주한테 온 연락이 없다. 오늘 안 들어오나?
‘와, 진짜 심심하다.’
한우주 들어오는 건 보고 자고 싶은데 할 게 없다. 핸드폰을 품에 안고 손님방을 둘러보았다. 책상, 침대, 벽에는 그림 액자가 몇 개 걸려 있고, 큰 수납장이 하나, 책이 가득 들어찬 책장, 그리고 화장실. 눈에 보이는 건 이 정도 된다.
특별한 점을 꼽자면 바깥과는 다르게 인테리어가 굉장히 편안하고 아늑하게 꾸며져 있다는 것이다. 가구는 대부분 흑갈색의 원목이고 바닥에는 녹색 카펫까지 깔려 있다.
책장에는 온갖 책이 다 있다. 시집, 소설, 에세이부터 시작해서 인문 사회 경제학, 식물 관련 서적, 악보집도 몇 권 있다. 영문 원서도 꽤 보인다. 처음 훑어봤을 땐 꽉 찬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몇 군데가 비어 있다.
그리고 벽장을 열고 나서야 ‘아, 이거 계속 둘러봐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방이라고 해서 가볍게 구경하고 있었는데 살피면 살필수록….
‘여기 주인이 있는 방 같은데….’
가장 큰 벽장 안에는 온갖 악기가 들어 있었다. 대부분이 현악기다. 케이스 크기만 보고 추정하자면 바이올린이랑… 저건 콘트라베이스인가? 중간 크기 악기도 있는데 이름을 잘 모르겠다.
케이스 겉에 영어로 ‘기타’라고 적힌 것이 두 개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일반 기타보다 조금 작았다. 전부 세월이 느껴지는 게, 새것은 확실히 아니다.
수납장을 도로 닫았다. 더 보면 안 되겠다. 남의 방을 마구 뒤지는 무례한 짓을 저지른 것 같다.
‘한우주는 별말 없었는데.’
누가 쓰는 방이면 어디는 건드리지 말라고 말해 줬을 것이다. 1층의 큰 방에 관해 이야기해 줬듯이 말이다. 이 방은 일반 루트에서 크게 다뤄진 적이 없다. 그냥 ‘빈방’으로 존재할 뿐 어떤 기능도 없어서 굳이 자세히 살핀 적이 없었다.
도대체 뭘까?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한 걸 보니 방치한 것 같진 않고, 최근까지 누구랑 같이 살았나?
…도대체 누구랑? 공략 캐릭터들은 아닐 텐데. 가족이랑 사는 것도 아니고.
방의 주인에 대한 궁금증이 깊어질수록 기분이 가라앉았다. 왜 기분이 나쁘지. 생각보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뭐가 풀리기는커녕 의문만 늘어나서?
‘방…, 더 살펴봐도 되나?’
책상 서랍이나, 다른 수납장은 안 열어 봤다. 보지 말라는 말은 없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아니지. 그건 예의가 아니지, 안태원. 한우주가 까먹은 걸 수도 있으니 허락을 구하든가, 여기 누구 살았냐고 직접 물어보는 게 맞지.
몰라. 기분이 안 좋다. 팔 아파서 그런가? 이젠 내 기분 하나 제대로 파악 못 한다. 짜증 나.
우웅-
…깜짝이야.
품 안의 핸드폰이 울렸다. 한우주가 보낸 문자다. 왠지 기분이 꽁해 확인하기 싫었지만, 그렇다고 안 보자니 내용이 궁금하다. 결국에는 핸드폰 화면을 켰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한우주: 오늘 집에 못 들어가. 잘 자」
이 자식이….
나도 모르게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받을 거라는 기대는 안 했는데, 연결음이 두 번쯤 울리다가 만다. 어, 전화 받았다.
[안 자고 있었네?]
평소와 한 치도 다름없는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혈압이 올랐다. 진정하자. 진정하고 지성인답게 이야기하자.
“야. 너 뭐냐? 연락은 왜 이렇게 늦고 설명도 제대로 안 하고 갑자기 외박하고, 어? 기다리는 사람 생각 안 하냐? 난 또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진정 못 했다. 일 생겨서 집 비우는 중에, 얹혀사는 녀석 밥까지 챙겨 주는 사람에게 대뜸 화내는 이상한 놈이 되어 버렸다. 전혀 지성인답지 않다.
한우주는 말이 없었다. 고른 숨소리만 들려온다. 어떡하지. 뭐라고 말하지. 일단 사과할까? 흥분해서 미안하다고?
[조현우. 너 나 기다렸어?]
“뭐?”
한참 조용하더니 한다는 말이….
[기다렸냐고.]
“넌 그게 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다. 장난으로 묻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당…연한 거 아니야?”
[왜?]
“왜냐니?”
[집에 잘 들어간 데다가]
“…응?”
[나 없어서 끼니를 거른 것도 아니고….]
얘 지금 뭐라는 거야.
[불편한 거 없을 텐데. 혹시 부족한 거 있어?]
“…….”
자리를 옮겨 침대에 걸터앉는다. 너는 뭐 그런 걸 묻냐는 식으로 가볍게 넘기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
“야… 한우주.”
[응.]
“우리 일단은 같이 살고 있잖아.”
[응.]
“학교에서 갑자기 사라져 놓고 이유도 안 말해 주고, 언제 온다는 말도 없고. 해 떨어지고 나서야 별일 없다는 말 겨우 들었거든? 당연히 걱정하지.”
[…걱정했다고?]
“너 나를 뭐로 보는 거야. 집 있고 밥걱정 없으면 네가 있든 말든 신경도 안 쓸 것 같아?”
[음….]
“너 설마 진짜로 날 그렇게 생각한 거야? 아니지?”
[으음.]
꿀밤 한 대 먹이고 싶다.
“…미리 언질이라도 줬으면 걱정 안 했을 거야. 그래서, 별일 없는 거 맞아?”
[응.]
“그럼 됐어.”
기운이 쭉 빠진다. 어이없기도 하고. 그냥 할 말이 없다. 적막이 길게 이어진다.
[…조현우, 자?]
“아니.”
[미안.]
“…왜 사과를 해.”
[걱정할 줄 몰랐어.]
기분이 이상하다. 걱정할 줄 몰랐다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사과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내가 너무 과잉 반응 했나? 아니면 한우주가 무심한 건가.
한우주가 무심? 아니다. 나 신경 써서 로비에 연락해 두고, 병원 가라고 문자 보내고, 저녁 사 먹을 카드까지 빌려주는데 무심하다고 할 수 있나.
생각할수록 내가 흥분해서 과잉 반응 한 게 맞는 것 같다. 애가 바빠서 연락 못 할 수도 있지. 하나하나 나한테 보고할 거 없잖아. 가족도 아니고, 그냥 친구 사이인데. 물론 걱정할 줄 몰랐다고 한 건 서운하다.
어, 어떡하지. 사과 무르라고 해?
[조현우.]
“으, 응?”
아직 할 말을 찾지 못했는데 한우주가 나를 부른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급격히 피곤해져 그대로 침대에 몸을 뉜다. 그리고 한우주가 말했다.
[언제까지 기다려 줄 거야?]
“…뭐?”
한우주는 진짜로, 종종, 어쩌면 꽤 자주. 의도를 알기 어려운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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