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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7화 (17/150)

17화

한우주는 조용히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언제까지 기다려 줄 거야.’라니. 야반도주라도 했나?

“너 도망갔어? 죄지어서 감옥 가?”

[아니.]

“이민이나 유학이라도 가려고?”

[갈 생각 없는데.]

“뭐야, 그럼 언제쯤 집에 올 건데?”

[늦어도 내일 저녁쯤.]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건가.

“그럼 그때까지 기다리겠지.”

[…알았어.]

뭐가 알았다는 건지 모르겠다. 나도 같이 좀 알았으면 좋겠다. 연락이 닿으면 물어볼 게 많았는데 한우주가 엉뚱한 소리를 하는 바람에 다 잊어버렸다.

[병원 다녀왔어?]

“응.”

[뭐래?]

“어제 한 말이랑 똑같은 거. 답답해 죽겠어. 깁스 그냥 풀어 버리고 싶다.”

[참아.]

“알아…. 그냥 해 본 말이야.”

한숨을 푹 내쉰다. 별 뜻은 없었다. 오후부터 내내 한우주 신경 쓰느라 긴장한 게 풀려서 그런 걸 수도 있고, 깁스가 답답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얼른 자. 끊을게.]

한우주는 내가 피곤하고 졸려서 그런 줄 알았나 보다. 자라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난 인사 못 했는데.

‘아, 모르겠다.’

잘 시간이긴 하다.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기어가 눈을 감았다. 가장 큰 걱정거리가 해결됐으니 그대로 얼른 자 버릴 생각이었다.

‘…….’

어떡하지. 피곤한데 잠이 안 온다. 지독한 고적함이 내 몸을 붙들고 흔들었다. 분명 어제, 그제와 다를 게 없는데도 공간이 낯설게 느껴진다.

아, 오늘은 못 자겠구나. 이런 적이 처음은 아니다. 어릴 적 언제였더라, 엄마랑 누나 없이 혼자 밤을 보내게 되었을 때 이랬던가?

…좀 창피하다. 이 나이 먹고 혼자 못 자는 거야? 진짜로 한우주가 내 보호자라도 된 것 같잖아.

보호자 맞나? 어쩌다 이렇게 됐지? 한우주는 뭘까. 날 집 잃은 강아지쯤으로 생각하는 건가. 조현우랑 한우주가 아무리 친하다 해도 보통 친구끼리 이렇게까지 해 주던가? 역시 부자의 사고방식은 다른 걸까?

생각이 가지를 치며 끝도 없이 뻗어 나갔다. 새벽에 상념에 빠지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일은 또 없을 것이다. 그러다 삐끗하면 툭, 하고 저 높은 곳에 얌전히 매달려 있던 것을 건드리고 마니까.

가령 이런 것 말이다. 만약 이곳에서 한우주가 날 돕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우주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당장 내일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곳의 나는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게 없구나. 이런 것들.

‘안 되겠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누워서 삽질할 바에는 뭐라도 하는 게 낫다. 무작정 방을 나서기로 하고 문을 열어 나간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개 무서워.’

확 트인 넓은 공간이 어둠 속에 잠겨 있다. 거실의 큰 창을 통해 들어오는 서늘한 달빛만이 유일한 광원이었다.

귀신이든, 사람이든,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만 같다. 한 발 내디뎠다가 내 발소리에 깜짝 놀라 소름이 돋았다.

난 겁이 많은 편이 아니다. 진짜다. 학교 축제 때 반에서 유령의 집도 했다고. …잠깐만, 저거 뭐야?

“으악흐아악! 꺼져!”

거실 창 쪽에서 허연 무언가가 움직였다. 재빨리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엄마야…, 숨을 몰아쉰다. 진정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잠깐만. 분명 거실 커튼이 하얀색이었지?’

…지금 한우주가 없어서 다행이다. 나 진짜 겁 없는 편인데 오늘 왜 이러지. 집이 너무 넓어서 그래.

핸드폰을 확인하니 이제 겨우 새벽 2시 50분이다. 와, 시간 더럽게 안 간다. 어서 해 떴으면 좋겠다.

‘이럴 때 게임을 해야 하는데.’

게임하다가 이 꼴이 났는데 또 게임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게임하면 시간 하나만큼은 금방 간단 말이야.

이 방엔 컴퓨터가 없다. 한우주 방에는 있던가? 기억 안 난다. 당연히 있지 않을까? 고민하지 말고 그냥 들어가서 확인해 보면 되잖아. 개소리야. 안태원 미쳤냐? 뭐 어때. 어차피 한우주는 내일 저녁에나 올 텐데.

아니, 인마. 정신 차려. 진짜 미쳤냐?

“…….”

나는 미쳤다. 요 며칠 일어난 일을 돌이켜 보면 충분히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양심 있게 미쳤다.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슬금슬금 한우주 방문 앞에 다가가 서서 문을 두드렸다.

“야, 한우주~”

대답할 리가 없다. 대답하면 큰일이다.

“나 들어간다…?”

방 안에 들어가 불을 켰다. 한우주의 방은 들어온 적이 거의 없다. 한우주를 깨울 때나, 아까 카드 가져가려고 잠깐 들어온 게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둘러보니 느낌이 싸하다.

…방에 뭐가 없다.

누군가의 방을 살피면 그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 취미가 뭔지, 나이대는 어떻게 되는지 얼추 보이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손님방’을 쓰던 사람은 취미든 전공이든 음악을 할 것이고, 독서를 즐길 것이다. 그림이 걸려 있는 걸 보면 예술 방면에 관심이 깊어 보였다. 서적과 인테리어를 보고 추측건대 식물을 좋아하지 않을까. 갈색에, 초록색에…. 색 조합이 굉장히 자연적이었으니까. 방에 화분이 없는 게 어색해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한우주의 방은 그런 걸 모르겠다. 넓고, 깔끔하다 못해 허전하다. 아직 사람 입주 안 한 신축 건물 같다. 있는 물건은 죄다 수납장에 넣어 놨나?

게임에서 처음 봤을 땐 일러스트레이터가 바빠서 대충 때운 줄 알고 아니, 주인공 방이 이렇게 성의 없어도 되는 건가 생각했는데…. 한우주 설정이 그건가, 극단적 미니멀리스트?

목적인 컴퓨터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안 보인다. 한우주 정도의 부자가 사는 집에 컴퓨터 한 대가 없다고? 말이 안 된다. 어디 노트북이라도 있겠지.

내가 미쳤을지는 몰라도 도둑놈은 아니다. 게임 하나 하겠다고 서랍 같은 곳까지 뒤질 생각은 없다.

어쩔 수 없다. 손님방으로 돌아가 제발 잠들 수 있기를 비는 수밖에. 꿈에서 게임을 할 수 있을까? 뭐든 좋으니까…. 미연시만 빼고….

나도 참 구제 불능이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인 걸 어떡해. 생각이 자기 비하와 합리화를 넘나든다. 그대로 방을 나가려고 문손잡이를 잡았다.

“…?”

내 착각인가.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잠깐만. 착각이 아닌데?

작지만 분명히 들린다. 발소리다.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미, 미쳤나 봐. 뭐야? 누구야? 도둑? 너무 놀란 나머지 다른 생각은 못 하고 뒷걸음을 쳤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진다.

아, 아!! 방문 잠갔어야 했는데!!! 어떡하지? 들어오지 마. 여기 들어오지 마.

겁에 질려 내가 뭘 하는지도 몰랐다. 언제부턴가 손에 뭔가 들려 있었다. 서둘러 전등을 끈 뒤 숨을 참고 방문 바로 옆 벽에 바짝 붙었다. 어디서 무슨 용기가 난 것인지 모를 일이다.

내 간절한 바람과는 다르게 침입자는 한우주의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오른손에 들린 것을 온 힘을 다해 휘둘렀다.

철썩, 꽤 찰진 소리가 났다. 그제야 내가 급하게 찾아 든 것이 무엇인지 보였다.

옷걸이다…. 누구나 아는 그거. 두께 얇은 거. 이거로 도둑을 잡으려 한 거냐. 안태원 너 바보야?

침입자는 빠르게 팔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그러니, 내 용맹한 파트너인 옷걸이는 팔을 찰싹 때린 것이다. 딱 열받을 정도로만 아프겠다.

“…….”

“…….”

침입자는 말이 없다. 움직임도 없다.

“죄송합니다….”

“…….”

“나가 주시면 안 될까요?”

“…….”

“여기 집주인 돈 많아요. 요즘 세상 썩은 거 아시죠. 돈 많은 사람이 왕이에요. 이러시면 징역 99년 받아요. 지금 조용히 나가시면 신고 안 할게요.”

말도 행동도 사고를 거치지 않고 막 나온다. 아주 난리가 났다. 어쩌지. 열받아서 말이 없나? 나 죽는 거 아냐?

침입자가 천천히 팔을 내린다. 어둠 속이라 자세히는 안 보이지만 꽤…?

“그, 용안이 훌륭하시네요.”

“…….”

음! 망했다. 환장하겠네.

“…누구더러 나가라는 거야.”

내 착각인가? 침입자의 목소리가 어쩐지 익숙하다. 눈을 잔뜩 찌푸리고 자세히 보니 그냥 잘생긴 게 아니다. 이렇게 잘생긴 사람은 흔치 않은데.

“조현우 너….”

아, 미친.

“하, 한우주?”

한우주로 추정되는 사람이 팔을 뻗는다. 놀라서 뒤로 물러나는데, 순식간에 주변이 환해졌다. 아하, 한우주가 불 켠 거구나.

한우주가 나를 본다. 그리고 보란 듯이 팔을 내밀었다. 옷걸이 모양을 따라 붉은 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와, 조현우 생각보다 힘이 센가 봐.

한우주가 팔을 내리며 말했다.

“경찰 부르면 돼?”

“…응?”

“돈 많은 사람 때리면 징역 몇 년이야?”

“…….”

“주거 침입이 징역 99년이랬나.”

“잠깐. 잠깐만. 내 말 좀 들어 봐.”

한우주는 팔짱을 낀 채로 턱을 한 번 까딱였다. 화났나? 이 상황에 화 안 나면 이상하긴 하다.

“해 봐.”

뭘 해? 아, 말하라고? 어떡하지. 뭐라고 말해야 한우주가 날 용서할까?

“…생각보다 일찍 왔네!”

“…….”

이건 아니다. 내가 생각해도 아니다.

“다시 할게. 들어 봐.”

“어.”

“난 네 집을 지키려고 한 거야.”

지금껏 본 한우주의 표정 중 가장 싸늘하다. 그제였나, 맞는 거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보다 심각하다. 이건 싹싹 비는 수밖에 없다.

“미안합니다. 잘못했어요.”

“그래.”

“…근데 정말로 도둑인 줄 알았단 말이야.”

“네가 더 도둑 같아. 이 시간에 내 방엔 왜 있는 거야?”

녀석 제법 예리하다. 할 말 없게 만든다. 솔직히 말하기가 창피하다. 이런 상황에도 지킬 자존심이 용케 남아 있나 보다.

“말하자면 길어.”

“그래?”

한우주가 방 안쪽으로 이동한다. 책상 앞 의자에 앉더니, 근처 침대를 가리켰다.

“저기 앉아서 설명해 봐.”

“…….”

고개를 조아리고 한우주의 말에 얌전히 따랐다. 그래. 내가 죄인이다.

“그게….”

힌우주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로 나를 봤다. 화보 찍는 모델 같다고 아부해도 소용없으려나? 응. 없을 것 같다.

“내가 엄청 나쁜 짓을 하려고 한 건 아니야.”

“그러면?”

“잠이 안 와서 그랬어.”

“잠이 안 와서 내 방에 들어왔다가 놀라서 날 옷걸이로 때렸다고?”

한우주가 자기 팔을 가리킨다. 아직도 붉다. 저거 설마 멍드는 거 아니겠지?

“많이 요약하면 그렇긴 해.”

“요약 없이 말해 봐.”

더는 피할 곳이 없다.

“…컴퓨터를 찾고 싶었어.”

“컴퓨터는 왜?”

울고 싶다. 지금껏 착하게 살았는데 이번 딱 한 번 다른 마음 품었다고 바로 이렇게 될 수가 있나.

“그….”

“그?”

“필요할 만한 일이 있어서….”

“…징역 99년?”

“아, 아니 잠깐만.”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나 보다. 먹이고 재우고 온갖 선행을 베풀었는데 이게 뭐 하는 짓거리인가, 싶겠지. 이해한다. 나 같아도 그랬을 거다.

어쩔 수 없다. 솔직히 말하자. 여기서 다른 말로 둘러댔다간 내일 당장 쫓겨날지도 모른다.

“게임이 하고 싶었어….”

“뭐?”

“그, 잠이 안 와서. 커…컴퓨터 게임을.”

“지금 농담하는 거야?”

“아니. 진짜야….”

“화 안 내고 고소 안 할 거니까 그냥 솔직히 말해.”

“그러니까 진짜라고.”

“화 안 낼 거래도. 나 못 믿어?”

“아니, 진짜라니까? 솔직히 말했다니까?”

“조현우 너….”

끝까지 못 믿는 눈치다. 나의 고해와 소중한 취미가 동시에 부정당했다. 솔직히 울컥했다.

“아 진짜라고! 게임하고 싶다고!! 나 게임 사랑한다고!!! 게임이랑 결혼할 거라고!!”

“…….”

…저질렀다.

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울어 버릴까? 기절한 척할까? 이대로 땅으로 꺼지고 싶다.

“…진심이야?”

방금… 한우주 목소리가 떨린 것 같은데.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작게 끄덕였다.

한우주는 기가 차는지 헛웃음을 쳤다. 아, 들린다. 나의 존엄성이 추락해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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