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8화 (18/150)

18화

1초가 1만 년 같다. 나는 창피했고, 한우주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러다 돌연 표정이 풀린다. 아마도 나에 대한 이해를 포기한 모양이다.

“컴퓨터는 1층 방에 있어. 난 필요성을 크게 못 느껴서 따로 장만하지는 않았고.”

그렇구나. 나 괜한 짓 한 거구나. 한우주는 컴퓨터 게임은 물론이고 웹 서핑과 기타 등등도 안 하는 건가?

“조현우 네가 게임을 그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네.”

그렇구나. 조현우는 게임을 별로 안 좋아하는구나. 혼자 벌어먹는 처지에 게임할 시간이 없긴 했겠다. 머쓱하게 웃고는 다시 바닥이나 쳐다본다.

“그나저나.”

한우주가 말을 돌린다. 다행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영원히 묻어 줬으면.

“지금 새벽 3시가 넘었는데 왜 여태 안 잤어? 설마 게임이 하고 싶어서?”

“아니야!!”

곧장 부정하고 나섰다. 어디까지나 잠이 안 와서 게임을 찾은 거지, 게임이 하고 싶어서 잠을 안 잔 건 아니다. 내가 원래 후자의 인간이긴 한데 미연시 들어와서까지 그럴 만큼 노답은 아니다. 한우주가 인상을 쓰며 말한다.

“그럼 왜? 무슨 일 있었어?”

“일?”

“신경 쓰이는 일이 있다거나, 팔이 아파서 잠이 안 왔다거나….”

“뭐? 아냐. 그런 일은 없었어.”

양심이 아프다. 한우주 지금 나 걱정하는 건가? 잠 안 잔다고? 한우주가 할 말인가 싶긴 하다. 쟤는 당최 밤에 잠을 자긴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니까. 어쨌든 감동이다.

“그럼 왜?”

그러나 혼자 자려니 싸하고 무서워서 잠을 못 잤다고 솔직히 말하는 건 별개의 문제이다. 창피하잖아.

“아, 아침에 얘기하면 안 될까? 나 슬슬 졸리는데.”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뻔뻔한 유예를 택했다. 한우주도 자고 일어나면 새벽에 내가 뭘 어쨌든 상관없다 여길지도 모른다.

“…그래. 그럼 가서 자.”

한 번쯤은 더 물을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한우주에게 잘 자라 인사하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 했다. 한우주의 방을 나서려던 때,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결국 몸을 돌려 한우주에게 말했다.

“한우주. 너 저녁에야 올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응.”

“말한 것보다 엄청 빨리 왔잖아.”

“아까 통화 끊고 나서 차 타고 바로 왔어.”

“볼일 남은 거 아니었어?”

“그렇지.”

“그런데 왜 왔어?”

온종일 연락 한 번 제대로 못 했으면서. 꽤 중요한 일인 거 아닌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건지, 왜 다 하지도 않고 돌아온 것인지 짐작도 안 간다.

그것도 이 새벽에…. 덕분에 심장 멎는 줄 알았다. 내가 겁에 질려 손에 든 게 옷걸이가 아닌 다른 거였으면? 생각만으로 끔찍하다.

한우주는 눈을 몇 번 끔뻑이더니 새삼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네가 날 기다렸잖아.”

…응? 내가 방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뭐라고?”

“저녁까지 기다려 준다며.”

제대로 들은 것 같은데?

“그럼 그 전에는 와야 하니까?”

“…….”

나 때문에 일찍 온 거라고? 왜? 내 말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인 거야? 한우주 네가 늦어도 저녁에 온다고 해서 적당히 답한 거지, 말 그대로의 뜻은 아니었는데?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한우주가 1~2주 뒤에 온다고 해도 난 똑같이 말했을 거다.

말문이 막힌다.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이 백 개쯤 되는데 그중 하나도 내뱉지 못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망연해진 내게 한우주가 말을 건넸다.

“거기 서서 뭐 해?”

“…….”

“어서 자러 가.”

그러곤 다가와 내 등을 툭 치기까지 한다. 나는 힘없이 떠밀렸다. 방문이 서서히 닫힌다. 줄어드는 문틈 사이로 한우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자.”

문이 닫혔다. 지금 내 심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나도 모르겠다. 뇌가 쥐어짜지다 못해 물음표 모양으로 변해 버린 것만 같다.

‘…자고 일어나서 생각할까.’

건질 만한 생각이 이거 하나뿐이다. 겨우 방에 돌아가 잠을 청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진작에 사고를 멈춘 덕에 고민이 깊은 것도 아니다. 무서운 것도 없다.

그런데도 잠이 안 와 멍하니 천장만 보았다. 그러다 문득 이 불면의 원인인 한우주가 떠올라 방 전체에 울릴 정도로 큰 한숨을 쉬었다. 한숨만 스무 번쯤 쉬고 나니 해가 뜨고 있더라.

볕이 방을 가득 채울 때가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악몽을 꿨는데 한우주가 나왔다. 꿈 내용은 아예 잊어버렸다. 깨어 있든 꿈속이든 도무지 한우주에게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하고 침대에서 떨어질 뻔했다. 미쳤나 봐. 학교는?

이렇게까지 늦잠을 자 본 적이 없어 어쩌면 좋을지 몰랐다. 우왕좌왕하다가 행동을 결론짓는다. 학교 가자. 결석보다는 출석이 낫다.

이러다 날겠다 싶을 수준으로 빠르게 씻고, 교복을 입고, 방을 튀어 나간다. 잠깐, 중요한 걸 안 챙겼다.

“한우주, 일어나! 들어간다!”

문을 벌컥 열었는데 침대 위에 아무것도 없다. 뭐야?

“너 어디서 자는 거야?!”

설마 샤워하다가 화장실에서 잠든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우주 방 화장실을 확인하려 했다.

“너 뭐 해?”

“악!”

깜짝 놀라 제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뒤쪽에서 한우주 목소리가…, 엥. 깨어 있었잖아?

“우리 늦었어!!”

“어디에?”

“학교 늦었다고! 넌 언제 일어난 거야? 왜 여태 잠옷 차림이야? 나 안 깨우고 뭐 했어?!”

“질문이 너무 많아. 제일 중요한 거 하나만 말해 봐.”

“교복 입고 나와!”

그대로 방을 나와 문을 닫았다. 급한 마음에 현관에서 한우주를 기다리는데, 안 온다. 교복 지어서 입나. 항상 나만 조급하지. 도로 가서 재촉할까? 고민하던 중에 한우주가 나왔다.

“빨리!”

“잠깐만 조현우.”

“왜!”

“나 궁금한 거 있어.”

“학교 가서 물어봐!”

단호히 외치며 한우주의 팔을 잡아끌었다. 잘만 끌려오더니 오피스텔을 나서자마자 석상처럼 제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한우주!”

“아니, 지금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뭔데 그래?”

“우리 토요일에도 수업 있던가?”

“아니!”

“오늘 토요일인데.”

“뭐?”

한우주가 핸드폰 액정을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시간과 날짜가 큼직이 보인다.

「Sat 4/5 13:32」

“…….”

“조현우?”

“이, 이걸 왜 이제 말해.”

“학교 가서 물어보라며.”

…그래, 내 잘못이다. 아주 정신을 놓고 사는구나.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지. 한우주의 팔을 놓고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뭘 미안할 거까지야.”

한우주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는 오피스텔을 가리켰다.

“밖에 볼일 없는 거 맞지? 간다?”

“자, 잠깐.”

곧장 돌아가려는 한우주를 급하게 불러 세웠다. 설마 얘, 주말인데 집에만 있을 생각인가? 집에 있으면 공략 캐릭터가 알아서 찾아오냐? 절대 그렇지 않다.

기가 찬다. 동시에 어제의 의문이 다시 떠오른다.

한우주는 평소에 뭘 하고 사는 걸까.

취미 활동이라거나, 공부한다거나, 친구를 만난다거나…. 어쨌든 뭔가를 하긴 할 거 아니냐. 그저 의문으로 흘려보내기엔 중요한 문제였다.

한우주가 이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본래 생활과 크게 엇나가지 않으면서 공략 캐릭터와 관계를 쌓도록 해야 한다. 참 더럽게 까다롭고 어려운 일이다. 한우주가 알아서 해 주면 제일 좋겠지만 도저히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나는 다른 것보다도 한우주에 대해 아는 걸 우선시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남은 미친놈 중에서 누가 그나마 한우주와 상성이 맞을지 생각하기 수월할 테고….

“이대로 돌아가서 뭐 할 건데?”

“글쎄….”

글쎄 말고 좀 그럴듯한 말 좀 해 보라고.

“한우주.”

“왜.”

“너 평소에 어디서 뭐 하고 지내냐…?”

결국에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한우주 상대로 빙 돌려 말해서 좋을 거 하나 없다. 함께 지내며 알게 된, 값진 정보 중 하나였다.

***

학원물을 여럿 접해 본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평일은 잎과 줄기요 주말은 꽃이라 표현하겠다.

방학이 아닌 이상 학교는 학생에게 있어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이다. 싫어도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관계를 쌓는 데 필수 불가결한, 없으면 말이 안 되는 장소이다.

그렇다면 주말은 어떤가? 학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기간. 평일의 학교만큼 비중 있지는 않지만, 그 이상의 특별함을 가진 날이다.

미연시에서 주말을 함께한다는 것은 곧 죽어도 이 캐릭터와 사랑을 하고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나 다름없다.

게임 속이 아니어도 그렇잖아. 누구나 휴일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거나,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보내고 싶을 테니까.

어쨌든 내 말은, 그만큼 주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주말 이벤트만 잘 봐도 캐릭터 루트 하나 타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다.

그러니 나는 조력자로서 한우주가 어디서 무얼 하든 맞춤형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법한 공략 캐릭터와 붙여 줄 생각이었다. 그럴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

삑-

꾸욱.

카드를 찍고 엘리베이터를 호출한다. 익숙하다, 익숙해. 허무함에 어깨를 축 늘어트린다. 나의 결심이 무색하다. 다짐한 지 몇 분 만에 꺾일 뻔한 의지를 겨우 다시 세워 두었다.

그래서 약 몇 분 전, 평소에 뭐 하고 지내느냐는 나의 물음에 한우주가 뭐라 답했느냐 하면,

-평소에는 주로…,

말끝을 늘인다. 신중히 답하려는 모양이었다.

-오피스텔에서 지내.

…그래, 이거다. 한우주가 고심 끝에 내놓은 대답.

환장한다. 한우주가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오피스텔에서 지낸단다. 한마디로 쟨 집에서 안 나간다는 거다. 집에서 안 나가는 사람을 뭐라고 하더라, 히키코모리?

나도 해 봤다. 이 망할 게임에 들어오기 직전에도 하고 있었다. 히키코모리 짓. 그래서 잘 안다. 애인 안 생긴다. 일단 사람을 안 만나잖아.

한우주 같은 놈이 어쩌다 미연시 주인공이 된 걸까. 얘… 연애할 수 있는 거 맞아?

막막하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