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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19화 (19/150)

19화

한우주에 대해 알아 갈수록 절망하는 빈도가 잦아진다. 오피스텔에서 무슨 공략 캐릭터를 만나느냐고.

…어쩔 수 없다. 목표 변경이다. 한우주가 휴일에 뭘 하고 지내는지, 취미나 관심사는 무엇인지 최대한 관찰하는 것으로. 알아 두면 분명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이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한우주는 9층 버튼을 눌렀다.

“9층에는 왜?”

“너 밥 안 먹었잖아.”

[9층입니다.]

안내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춘다. 한우주를 따라 걸음을 내딛는데,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나는 여기도 누가 사는 줄 알았지. 그런데 웬걸,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원두의 풍미 깊은 향이다. 이어 탁 트인 공간이 보였고, 통유리로 이루어진 벽면 너머로 도심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근처로 배치된 테이블과 소파에 꽤 많은 사람이 모여 담소를 나눈다.

“어….”

“왜 그래?”

“여기 뭐야?”

“내가 건물 소개 안 해 줬던가.”

“안 했어.”

한우주가 앞장서 나아간다. 나는 괜히 긴장돼서 그 옆에 바짝 붙어 다녔다. 사람들의 여유로움에서 귀티가 느껴진다. 그냥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중심 언저리에 다다르자 한우주는 어딘가를 하나씩 가리키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9층에는 식당이랑 카페가 있어. 이 앞에 가장 큰 곳은 식당. 아침, 점심, 저녁 운영 시간이 따로 있는데, 지금은 안 해.”

“…공짜야?”

멋 떨어지는 질문이긴 한데 궁금해 죽겠다.

“지금은 아닐걸. 원래 관리비에 포함되었던 것 같은데…. 이젠 이용할 때마다 돈 내고 먹어. 시간 맞춰 올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보니.”

“아.”

한우주의 검지가 왼쪽, 통유리 벽 근처를 향했다.

“저기는 카페. 저녁 9시인가, 10시인가 마감할걸. 그냥 평범해. 음료랑 빵 파는 게 다야.”

“응….”

“반대편에 있는 곳에선 식료품 조금 파는 정도. 9층은 이게 다야.”

“그렇구나….”

이런 곳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아마 알아도 안 왔을 것이다. 얼핏 봐도 비싸 보인다.

“잠깐…, 너 그제 저녁에 초밥은 왜 먹었어? 그냥 여기서 밥 먹으면 됐던 거 아냐?”

“네가 초밥 먹고 싶다고 했잖아.”

“나한테 맞춰 줄 필요 없는데?”

“난 딱히 먹고 싶은 게 없었거든.”

한우주는 말하며 카페로 향하더니, 카운터 근처에 선 채로 날 본다.

“당장은 여기서 간단히 때우려는데.”

“응.”

“뭐 먹을래?”

“…네가 먹는 거.”

전부 비싸서 직접 고르기 부담스럽다. 한우주가 주문하는 걸 구경하고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니 직원분이 음식을 가져다주셨다.

베이글 샌드위치에 커피. 특별한 점은 없어 보인다. 금가루라도 뿌려서 나올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한우주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건넸다.

“여기서 자주 먹어?”

“음… 그렇지? 식당은 시간 맞추기 귀찮아서.”

“베이글 좋아해?”

“글쎄? 단독으로는 잘 안 먹어. 채소 들어간 게 좋지.”

“채소?”

“응. 채소 들어가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거.”

“샌드위치가 좋은 거야?”

“그러네.”

카페에 자주 오고 샌드위치를 좋아한다.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게 좋다. 학교서도 매점만 가는 게 그래서였나? 톡톡, 한우주가 검지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린다.

“안 먹어?”

“응? 먹어, 먹을게.”

목을 먼저 축이려고 했다. 차가운 잔을 들어 올리자 얼음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한우주는 아이스커피를 좋아하나 보다.

“조현우, 잠깐만.”

어쩐 일인지 한우주가 나를 다급히 불렀으나 한발 늦고 말았다. 나는 이미 커피를 머금어 버렸고, 그대로 뱉을 뻔한 것을 겨우 참아 냈다.

“켁.”

커피가 무슨 한약보다 쓰냐? 아니, 나도 아메리카노 정도는 무리 없이 마시는 편인데 이건 좀 심하잖아?

기침이 끊임없이 나온다. 한우주가 냅킨을 건네며 말했다.

“나 진하게 마시는 편인데 깜빡했다. 같은 거로 두 개 달라고 해 버렸네. 미안.”

“아니, 무슨… 커피를….”

말을 잇지 못하고 기침만 했다. 사레가 단단히 들렸나 보다. 한우주 얘는 가만 보면 나랑 입맛 참 안 맞는다. 단 거 싫어하고, 쓴 거는 또 미친 듯이 쓰게 먹고.

…결국, 나는 딸기 라테를 새로 시켜서 마셨다. 맞은편에서 커피를 홀짝이는 한우주가 괴물처럼 보인다. 쟤 커피 때문에 밤에 잠 안 자는 거 아니야?

합리적 추측을 하며 베이글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다.

대충 봐서 몰랐는데 그냥 베이글 샌드위치가 아니라 무려 연어가 든 것이었다. 두텁게 발린 크림치즈 위에 얹힌 절인 양파가 아삭하게 씹힌다. 부드러운 연어에는 허브 향이 은은히 배 있고, 잎채소는 신선하다 못해 상큼했다. 재료 하나하나가 맛있는데 합쳐 두니 더 맛있다.

커피의 아픈 기억이 싹 날아가 버렸다. 딸기 라테 역시 잘게 다진 과육이 씹히는 게 내가 먹어 본 것 중 가장 맛이 좋았다.

한우주가 자주 올 만하다.

천천히 먹으면서 대화할 생각이었는데 먹는 데 너무 집중해 버렸다. 내가 베이글에 음료까지 깔끔히 비웠을 때 한우주는 이제 겨우 반을 먹어 갔다.

“…하나 더 시킬까?”

“아니? 배불러.”

“응.”

……한우주는 정말로 천천히 먹었다. 심심해서 몸을 비틀고 사람 구경하고 바깥 구경하고 한우주 구경하고 깨끗한 바닥도 구경했는데 아직도 먹고 있다.

“한우주 너 되게… 느긋해 보인다.”

한우주의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움직인다. 그러곤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 얼굴을 쳐다본다.

“서두를 필요가 없으니까.”

“아, 그래.”

“그건 그렇고.”

식기를 내려놓고 몸을 반쯤 일으킨다. 내 쪽으로 상체가 기울고, 순식간에 거리가 좁아졌다.

…한우주 뭐 하냐?

“너는 보고 있으면 정신없어.”

“뭐?”

“칠칠찮기도 하고.”

“뭐, 인마?”

내 말이 핀잔주는 걸로 들렸나? 지금 시비 거는 거야?

반발하려니 한우주의 손이 가까워졌다. 내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니, 아니다. 반사적으로 그랬나 보다. 아무튼,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한우주가 냅킨으로 내 입가를 가볍게 두드린다.

“묻히면서 먹네.”

말하고는 태연히 다시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는다.

“…….”

미간을 좁히고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고개를 몇 번 기울여 보고 팔짱을 껴 본다. 갑자기 몸에 힘이 빠져 소파에 온전히 몸을 기댔다. 뇌에 버퍼링이 걸린 것 같다.

그러다 팔걸이에 아예 고개를 처박아 버렸다. 머리가 띵하고 얼굴이 뜨겁다. 열받아서 그렇다. 나한테 칠칠찮다는 말을 하다니, 열받아 죽겠다.

한우주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어깨를 쿡 찌르며 “살아 있어?” 하고 묻기에 보란 듯 벌떡 일어났다.

한우주는 천천히 일어나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으며 나긋하게 말했다.

“뭐 하고 지내냐고 했지?”

“응. 취미 같은 거.”

“음…, 집에서 쉬거나, 책 읽거나, 운동해. 건물 지하에 피트니스 센터랑 수영장이….”

우웅-

“…….”

갑작스러운 진동이 대화를 끊는다. 한우주는 손에 들린 핸드폰을 흘끗거리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만.”

내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는 모습이 영 심상치 않다. 무관심과 성가심의 사이를 넘나드는 모습이 낯설다. 통화는 길지 않았다. 이마를 짚고 긴 한숨을 내쉰 뒤에야 다시 내게 말을 건넨다.

“…나 일이 좀 생겨서.”

“아.”

“집에서 쉬고 있어.”

아주 잠깐 통화했을 뿐인데 피곤한 낯이다. 어제 다 못 하고 왔다는 일 때문인가…? 여유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도 한우주는 굳이 현관까지 쫓아와 내가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했다.

“자정쯤에는 돌아올 거야.”

“심각한 일이야?”

“별로. 그냥 귀찮은 일.”

“또 아버지 보러 가?”

“…굳이 나를 찾네. 필요 없을 텐데.”

빈정대는 어투에서 불쾌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우주가 간신히 표정을 풀고는 현관문을 닫으며 말한다. 신경 쓰지 말고 쉬어.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아버지랑 사이 어떤지 훤히 아는데. 도로 문을 열고 나간다. 벌써 엘리베이터에 탄 한우주와 눈이 마주친다.

“한우주!”

나도 참 대책 없이 나왔다.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그냥… 조금이라도 마음 풀고 갔으면 좋겠는데.

내려갑니다. 하강을 알리며 작동하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기 직전, 겨우 한마디 말을 건넸다.

“그냥, 잘 다녀오라고.”

“…응.”

늘 그렇듯 짧고 간결한 답. 문이 닫히고, 한우주의 모습이 가려진다. 직전에 본 한우주의 표정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감정을 가늠하기 어려운, 처음 보는 표정. 적어도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아 다행이다.

***

“…아오!”

성질이 뻗쳐 핸드폰을 거의 집어 던질 뻔했다. 주말이 참 엉망이다. 한우주는 연애와 일절 관련 없는 일로 집을 비웠고, 나는… 소파에 널브러진 채로 뻘 짓 중이다.

시간을 의미 없이 보내기 싫었다. 없는 한우주에 매달리지 말고 조현우에 대해 알아볼까, 싶어 핸드폰을 뒤지기 시작한 게 화근이었다. 잠긴 앨범이 신경 쓰여 어떻게든 풀어 보려 애쓰기를 반복하고 반복하여….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등록된 계정으로 메일을 발송하였습니다. 인증 코드를 입력해 주세요:_____」

이 꼴이 났다.

하필 이 ‘등록된 계정’이 핸드폰 브라우저에는 로그인이 안 돼 있다. 망할 조현우….

이미 몇 번이고 살펴본 메모장을 다시 켜 본다. 혹시라도 놓친 게 있을까, 싶었다. 계정이든 비밀번호든 뭐 안 적어 놨냐고.

우웅-

…!!!

툭,

핸드폰이 얼굴에 명중한다. 깜짝이야. 개 아프다. 망할, 이번엔 또 뭐야. 진동? 전화인가?

얼얼한 코를 움켜쥐었다. 액정 너머가 소란스럽다. 절묘하기도 하지. 코로 전화를 받아 버린 것 같다. 내가 빙의한 게 미연시가 아니라 시트콤이었던가?

[야, …우?]

끙끙대며 몸을 일으켰다. 엎어진 핸드폰을 들어 귀에 대자마자 귀청을 찢을 듯한 고함이 들렸다.

[야!!! 조현우 미친 새끼야!!!]

뚝.

…방금 뭐야.

놀라서 바로 끊어 버렸잖아. 누구였지?

우웅-, 우웅-

“허억….”

끊기가 무섭게 또 전화가 온다. 미친, 사채업자 같은 거 아니야? 심호흡하고 액정을 확인한다.

「오재영」

낯설지만 본 적 있는 이름이다. 누구였지? 조현우 친구 중에 이런 이름이 있었던 것 같기도. …일단 받아 보고 이상한 사람 같으면 바로 끊어야겠다.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왜 끊고 지랄이야!!]

“오, 오재영?”

[그래, 미친놈아! 너 지금 어디야?]

옆에서 누군가 말리는 소리가 들린다. 혼자가 아닌가 봐.

“어…, 그건 왜?”

[왜???]

와, 얜 왜 이렇게 화가 났지.

[왜랬냐 이 새끼야? 몰라서 묻냐? 우리 지금 네 집 앞이거든?]

“아?”

[이 새끼가 연락은 다 씹고 학교에선 못 본 체하고 존나 팔까지 부러트려 먹더니 지금 뭐 하자는….]

혼란하다. 중간에 말이 끊기더니 오재영이랑 누군가가 실랑이를 벌인다. 오재영이 졌는지 다른 목소리가 바꿔 받는다.

[여보세요. 조현우? 귀는 멀쩡하냐. 미안하다. 이 새끼 또 돌아서 이래. 너 집은 아닌 거지? 바빠?]

“집…은 아니고, 안 바빠.”

[그럼 얼굴 좀 보자.]

“그게….”

[거절 안 하는 게 좋을걸. 이제 나도 오재 못 말린다.]

“…….”

기억났다. 얘네 조현우 친구 맞다. 오재영이랑… 무슨, 준희였던가? 단톡방도 있던데, 조현우가 아닌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뿐이라…. 알림을 꺼 놨다. 지금 보니 메시지가 천 개는 넘게 쌓였다. 세상에.

[조현우?]

“으, 응?”

[대충 학교 쪽으로 갈 테니까 연락해. 올 수 있지?]

“…그래.”

[이따가 보자.]

전화가 끊긴다.

…조현우 친구들도 만나 봐야지,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하긴, 나도 친한 친구가 연락 다 씹으면 짜증 나긴 하겠다.

학교서든, 밖에서든 언젠가는 겪을 일이지만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조현우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도 조현우 행세를 할 수 있을까?

…한우주 앞에서 괜찮았으니 문제없겠지.

외출복을 대충 갖추어 입고 집을 나섰다. 한우주에게 문자라도 해 둘까, 고민하다 유난인 것 같아 관뒀다. 어차피 한우주보다 내가 일찍 들어올 것 같다. 자정 전에 온댔으니까….

‘가기 싫다.’

제발, 별일 없기를. 조현우인 척하다가 곤란한 일 겪는 건 미치도록 싫다. 내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성난 오재영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조현우 친구들 성질 꽤 있어 보였지.

하….

조용히 넘어가리라는 기대는 버리는 게 낫겠다.

발걸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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