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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20화 (20/150)

20화

학교 정문 쪽 담에 기대어 서서 핸드폰을 죽어라 노려보았다. 조현우가 친구들과 나눈 대화를 최대한 숙지해 두어야 할 것이다. 일 복잡하게 만들긴 싫으니까.

오재영이라는 애는 평소에도 성질이 좀 불같은가 보다. 다른 친구는 강준희일 것이다. 셋이 주고받은 연락이 잔뜩이다.

대화 패턴이 얼추 보인다. 오재영이 별거 아닌 일에 흥분하고, 조현우는 적당히 맞장구치며 달래다가 강준희가 진정시킨다. 음, 적당히 착하게 굴면 조현우 같으려나.

“야!”

우렁찬 소리가 들린다. 저 멀리서 누가 뛰어오고 있다. 조현우보다 조금 작은 키, 짧게 깎은 머리, 집 앞 편의점에 나온 것처럼 대충 입은 추리닝이 눈에 들어온다. 아까 들은 목소리, 오재영이다. 양손에 뭘 잔뜩 들고 있었다.

“조현우 개자식아!”

코앞까지 와서는 대뜸 욕한다. 깁스한 팔을 보고는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마저 욕한다. 정신없어.

“야. 작작해.”

키가 엄청 크고 눈매가 처져 졸린 인상의… 아마도 쟤가 강준희겠지. 강준희가 오재영의 목덜미를 잡아끈다. 오재영 쟤는 욕설이 기본 옵션인가, 말끝마다 욕이 붙는다.

“조현우. 왜 이렇게 오랜만인 것 같냐. 어제도 봤지만.”

강준희가 오재영을 옆에 치워 두고 말했다. 명백히 비꼬는 투다. 그도 그럴 게, 난 얘들을 본 기억이 없다. 아마 정신없어서 무시했거나, 부담스러워 못 본 척했겠지…. 머쓱한 웃음으로 답했다.

“웃냐? 웃어?!”

“오재 존나 시끄러워. 좀 닥쳐 봐.”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불편해 죽겠다. 이래서 만나길 꺼린 건데. 얼굴 필 수가 없다. 아, 좀 더 노력해 봐, 안태원.

“조현우 얼굴 구려. 어디 안 좋냐?”

“멍청아. 팔 아픈가 보지.”

“새끼, 아픈 놈이 왜 이렇게 싸돌아다니냐? 야, 어디 들어가자.”

난 한마디도 안 했는데 둘이 알아서 다 한다. 통화했을 땐 만나서 한 대 칠 기세더니, 오재영은 그냥 시끄럽게 욕만 하고 강준희는 차분하게 욕한다.

그런 둘을 따라 동네 분식집에 도착했다. 뭐, 나한테 묻는 것도 없이 알아서 주문한다. 5분도 안 돼서 음식이 나왔다. 비닐에 싸인 접시 위에 꾸덕꾸덕한 떡볶이가 한가득하다. 그 위에 갓 튀긴 김말이가 얹혀 있고, 순대에 내장까지 아주 푸짐하게 시켰다.

열심히 먹는 둘을 구경하고 있자니 강준희가 말을 건다.

“조현우 너 안 먹냐.”

“난 배불러서.”

“뭐? 밥 먹었어?”

“응. 아까.”

“고구마 반 쪼가리 먹어 놓고 뻥 치는 거 아냐?”

…조현우가 평소에 그러나.

“아니야. 진짜 배부르게 먹었어.”

“새끼, 우린 너 보러 간다고 굶었는데 어디서 뭘 배부르게 처먹고….”

“오재 넌 좀 다 먹고 말해.”

“씹, 맨날 나한테만 뭐래.”

욕하면서 말은 잘 듣는다. 관계가 참… 사이가 좋은 것 같기는 한데….

‘집에 가고 싶다.’

긴장하는 바람에 음식만 봐도 체할 것 같다. 둘은 정말로 배가 고팠는지 식사에 열중했다. 다 먹고 PC방에 가니, 운동으로 배를 비우니, 잔뜩 떠들더니 결국 카페에 가기로 했다. 다친 팔 때문에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녀석들은 자연스레 조현우 음료까지 계산했다. 아메리카노다. 그리고 자리에 앉고 나서부터 진짜 고난이 시작됐다.

맞은편에 앉은 오재영과 강준희가 날 빤히 쳐다본다. 오재영이 찬 음료를 한 번에 빨아 마시고는 인상을 구긴다. 관자놀이를 짚으며 짜증스레 말한다.

“너 요즘 존나 이상한 거 알지.”

“…뭐, 뭐가?”

일단 시침 떼 본다. 오재영 표정이 어둡다. 응, 안 먹히는구나. 강준희가 내 쪽으로 한 손을 펼쳐 보인다.

“연락 다 씹음. 학교에서 아는 체 안 함.”

손가락 두 개가 접힌다.

“며칠째 집 비움.”

“뭐? 진짜? 강준희 너 이 새끼 그걸 혼자 알고 있었어?”

“시끄러워. 말하는 중이잖아.”

“썅. 난 것도 모르고 집 먼저 찾아갔네.”

식은땀이 흐른다. 강준희가 네 번째로 손가락을 접으며 말한다.

“한우주랑 붙어 다님.”

“내 말이! 조현우 돌았냐?”

“조용히 좀 하라고.”

“알았다고.”

왜들 저러지. 조현우랑 한우주 원래 친구 사이잖아. 같이 다니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 일단 입 다물고 마저 듣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왜 허지훈한테 연락 안 하냐? 너 대신 내가 욕먹었다.”

“…응?”

마침내 손가락이 전부 접힌다. 강준희는 주먹 쥔 손을 내려놓으며 내게 답을 요구했다. 다른 건 무슨 말인지 대충 알아듣겠는데 마지막 건 도저히 모르겠다. 허지…누구?

나를 향한 네 개의 눈이 부담스럽다. 마음 같아선 ‘야, 난 조현우가 아니야. 너희랑은 완전 초면이거든.’ 하고 말하고 싶다. 내가 너희 신경 쓸 겨를이 있었겠냐고.

여기서 가장 억울한 사람은 단연코 나일 텐데, 솔직히 말할 수도 없다. 머리를 굴려 그럴듯한 말로 변명했다.

“요즘 기분이 안 좋았어. 알바 잘렸거든.”

“뭐?! 그 머리 다 까진 미친놈이? 너 같은 호구 아니면 누가 거기서 일해 주는데?”

“그냥 실수 좀 했어.”

“그 새끼 트집 잡을 거 없냐? 확, 신고 때릴….”

“야, 오재 조용히 해 봐. 마저 좀 듣자.”

여기서 강준희가 제일 기 세구나. 무서워 죽겠다. 어서 더 말하라 재촉한다.

“너희뿐만 아니라 오는 연락은 그냥 다 안 받았어. 정신없고 힘들어서. 학교에서도 그냥…, 기운 없어서 그랬어. 그게 다야.”

“야! 그럼 더 연락해야지. 너 언제까지 호구 새끼처럼 살래?”

그래…. 조현우는 호구같이 사는구나. 알려 줘서 고맙다. 불행 중 다행이다. 내 조현우 흉내가 나쁘진 않았겠네.

“비밀번호 잊어서 집에도 못 들어가고?”

가만히 있던 강준희가 말한다.

“어, 어떻게 알았어?”

“너 팔 그렇게 되고도 연락 없길래 살아 있나 궁금해서 집 찾아갔지. 주인아주머니한테 들었어.”

“아….”

“그동안 도대체 어디서 지낸 거야?”

“…….”

오재영마저 입을 다물고 가만히 날 쳐다본다. 망했다. 이걸 뭐라고 해? 한우주 집에서 지낸다곤 절대 말 못 한다. 혹시라도 이야기가 새어 나가 공략캐 귀에 들어가면 돌이킬 수 없이 골치 아파질 거다.

그럴듯한 변명을 찾지 못해 입 다물고 커피만 내려다본다. 한숨 소리가 들렸다.

“고개 들어, 인마. 네가 죄인이야?”

그래, 나 죄인 아니다. 조현우는 더더욱 아니다.

“조현우 너 우리한테 손 벌리기 싫어하는 거 알아. 그걸로 뭐라 할 생각도 없고. 다른 건 대충 이해하는데….”

나는 이제야 겨우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목이 탄다. 강준희가 무슨 말을 할까.

“한우주는 도대체 뭐냐? 허지훈 연락은 왜 안 받아?”

…제일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되레 내 쪽에서 묻고 싶다. 뭐가 그렇게 이상하고, 허지훈은 누구인지. 조현우 핸드폰으로 그런 사람한테 연락 온 적도 없는데. 당황한 티를 내며 사실을 말한다.

“나 허지훈 연락 못 받았는데?”

“허지훈 말로는 너한테 전화 백 통은 걸었을 거라는데.”

“진짜야. 연락 온 적 없어.”

“…그럼 나중에 걔한테 연락 좀 해 봐. 나한테 지랄하게 두지 말고. 그 새끼 지금 예민해서 상대하기 배로 귀찮거든?”

잘 모르겠지만, 아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조현우랑 허지훈 둘이 친한 사이인가? 어째 날이 갈수록 신경 쓸 게 배로 늘어나는 것 같다.

강준희의 심문이 얼추 끝나자 오재영이 입을 비죽이며 불편한 티를 낸다. 빈 컵을 빨대로 휘휘 젓는 게 정신 사납다. 얼음과 잔이 부딪치는 소리 위로 오재영의 목소리가 겹친다.

“새끼,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허지훈 슬슬 퇴원할 텐데. 걔가 너랑 한우주 꼴 보면 존나…, 셋 중 하나 뒤져도 안 놀라울 듯.”

“…응?”

한우주랑 허지훈이 아는 관계야? 아, 머리 아파. 이걸 어디서부터 알아봐야 하나. 한우주 연애만으로 충분히 골치 아픈데 조현우 인간 관계는 또 왜 이리 복잡한지.

오재영은 그 뒤로도 한참 호들갑을 떨었다. 학교 벽 하나쯤은 그냥 무너질 거다, 학생들 대피시켜야 한다, 고함이 천둥 소리보다 클 거다, 오재영 말만 들으면 허지훈은 인간이 아니라 거대 고릴라, 괴물 뭐 그런 거 같다.

강준희는 턱을 괸 채로 오재영의 난리를 구경하다가 내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조현우. 전화 온 거 아니야?”

“설마 허지훈이냐? 지 얘기하는 거 알고 그러나?”

바로 옆에서 웅웅대는 핸드폰을 이제야 눈치챘다. 딱히 연락 올 곳도 없는데. 진짜 허지훈인지 뭔지, 하는 애한테 온 건가?

…미친, 메시지가 뭐 이렇게 많이 와 있어. 진동이 한 번 끊겼다가 다시 울리기 시작한다.

「한우주」

“…….”

뭐지, 아직 5시인데. 벌써 집 도착한 건 아닐 테고…. 무슨 일 생겼나? 바로 받기에는 오재영과 강준희가 신경 쓰인다.

“얘들아, 나 먼저 가 볼게.”

“뭐?”

“미안. 일이 좀….”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는데 오재영이 붙잡더니 손에 억지로 뭔가 쥐여 준다. 오재영이 쭉 들고 있던 쇼핑백이다.

“새끼. 뭐가 그렇게 급하냐? 이거 가져가.”

“이게 뭐야?”

“반찬이랑 이거저거. 병문안 겸해서 가져온 거니까 그냥 받아라. 거절하면 진짜 절교야.”

“…….”

당황스럽다.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

“야, 나 진짜 괜찮아.”

“조현우. 그냥 가져가.”

가만히 앉아 있던 강준희까지 말을 얹는다.

“고마우면 연락이나 재깍 좀 받아라.”

“팔 불편해서 그러냐? 집까지 들고 가 주랴?”

“아, 아니! 괜찮아. 그럼 고맙게 받을게.”

받지 않으면 안 보내 줄 것 같다. 들어 주겠다는 말도 진심 같아서, 건네받은 물건을 들고 얼른 그 자리를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조현우, 오재영, 강준희는 내 생각보다 훨씬 친한 사이인가 보다. 솔직히 불편했다.

몸은 당연히 불편하고, 마음은 더 불편하다. 오롯이 타인을 위한 호의를 내가 받는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어색해 죽겠다. 조현우 취급받으며 겪는 어려움은 배로 억울하고, 좋은 일은 찝찝하기만 하다. 모르는 이야기로 추궁받는 것도 지친다.

정신없이 걷다가 겨우 앉을 곳을 찾는다. 짐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꺼내 든다. 한우주에게 연락할 생각이었다.

‘망할 똥폰.’

그새 배터리가 닳아 핸드폰이 꺼졌다. 아…, 집에 가서 연락해야겠다. 연락 안 받는다고 뭐라 한 게 바로 어제 일인데 미안해서 어떡하냐.

빨리 걸으면 15분 안에 도착할 수 있겠다. 핸드폰을 도로 집어넣고 길을 서두르려 했다.

“…….”

쏴아아, 걸음을 옮기기 무섭게 마른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미친 거 아니야? 재수가 없으려니. 근처 편의점 비가림막 아래 발이 묶여 버렸다.

금방 그칠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오래 내린다. 편의점에 핸드폰 좀 충전해 달라고 빌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비 맞고 갈까. 하늘을 원망스레 올려다본다.

‘…안 되겠다. 뛰어가자.’

쇼핑백을 품에 안고 달렸다. 젖은 천이 살갗에 달라붙어 온몸이 눅눅하다. 게다가 조현우는 상상 이상의 저질 체력이라, 겨우 5분 정도 뛴 것으로 숨이 찼다. 겨우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을 땐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달렸는데도 몸이 차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서야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아, 이 철벽 보안 오피스텔…. 방문객은 집에 사람이 없으면 못 들어가지….

얼른 씻고 싶은데. 로비 통해서 한우주랑 연락할 수 있을까.

‘집에 없을 것 같지만….’

로비에 연결하려다가 1701호를 눌렀다. 혹시나, 지금이면 집에 들어왔을까 하는 마음에. 연결음 한 번이 안 울려서, 처음에는 인터폰이 고장 난 줄 알았다.

[…여보세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한우주 언제 집에 온 거지.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집에 도착하고 보니 내가 없어서 쭉 연락한 건가? 미친, 난 그 연락을 다 씹은 거고?

아니길 바란다. 차라리 용건 있어서 연락했는데 도통 받지를 않아서 집에 빨리 온 거였으면…. 아니, 이쪽도 무섭다.

[조현우?]

하…, 그냥 나갈 때 문자 한 통 보내 놓을걸. 안태원 이 멍청한 새끼. 마른침을 삼킨다.

“응….”

대답하기 무섭게 연결이 끊긴다.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작동했다.

…어떡하냐. 나 좆 된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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