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17층입니다.]
안내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한우주는 현관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닫힙니다. 엘리베이터는 주뼛대는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얘 버튼을 누를 생각도 않고 덩그러니 서 있었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다시 문이 열린다. 그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한우주가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피하고 싶은 순간을 마주하고 말았다.
“꼴이 이게 뭐야?”
어떡해. 예상대로다. 기분 안 좋아 보여. 어디부터 어떻게 말해야 한우주가 이해할까?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바보같이 눈만 끔뻑였다. 한우주는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품속의 쇼핑백을 가져가더니, 팔을 잡아끈다.
“저기…! 한우주.”
“이따가 얘기해. 감기 걸려.”
여전히 가라앉은 목소리에 마음이 서럽다. 그래, 나 잘한 거 없어. 당연히 알고 있다. 그런데 속이 안 따라 준다. 조현우 친구들 상대한 일만으로도 힘들어 죽겠는데….
말없이 혼자 투정한다. 괜히 기분만 더 안 좋아졌다. 한우주는 집에 들어서기 무섭게 나를 욕실에 밀어 넣고는 씻고 나오라 일렀다. …씻고 나면 기분이 좀 나아지려나.
“으.”
푹 젖은 붕대의 무게가 팔을 압박한다. 어떻게든 풀어 보려는데 한 손으로 잘 안 돼 한참을 끙끙거렸다. 마음 착하게 먹고 살려고 했지만 이젠 모르겠다. 인하성 팔도 확 부러트리고픈 심정이다.
“들어간다.”
“응?!”
아!! 거의 풀 뻔했는데.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라 뒤돌아보니 한우주가 있었다. 뭐야, 언제 들어온 거야?? 당혹스럽다. 빠르게 욕실 구석에 콕 처박혀 버렸다. 아직 벗은 게 없어 다행이다.
“노, 노크는 해야지!”
“했는데 네가 대답 안 했잖아.”
“…진짜?”
“어.”
내가 못 들었나…? 한우주는 갈아입을 옷을 갖다주러 온 모양이다. 욕실 선반 위에 곱게 갠 옷가지를 올려놓는다. 그러고도 나가지 않고 한참 동안 나를 노려보기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땅이 꺼지도록 깊은 한숨 소리가 들린다.
“야, 조현우. 이리 와 봐.”
순순히 구석에서 빠져나왔다. 말이라도 잘 들어야 한우주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릴 것 같기 때문이다.
“벗긴다.”
“뭐?!”
뒷걸음질 쳐 다시 구석에 처박혔다. 취소다. 말 안 들을래. 쟨 또 뭐라는 거야!
“붕대 갈아야 할 거 아니야. 위에 벗긴다고.”
“내가 할 수 있….”
미친. 혀 깨물었다. 개 아파.
“괜한 고집 부리지 마. 그러다 날 샌다.”
그건 그렇지만. 괜찮은 걸까? 아니다. 안 괜찮다. 솔직히 무지 부담스럽다. 도망가고 싶다. 한우주는 내 의사는 중요치 않다는 듯 성큼 다가와 젖은 셔츠의 끝자락을 잡았다. 더 물러날 곳도 없다. 하나뿐인 손으로 한우주의 팔을 쥐어 저지한다. 울고 싶다.
“으으아, 잠깐!”
“시끄러워. 왜 이래?”
“괜찮대도!”
“괜찮긴 뭐가 괜찮아?”
“그, 으냥. 다.”
“…너 가만 보면 별걸 다 의식한다.”
“…….”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상황 좀 가려 봐. 환자잖아.”
전부 맞는 말이긴 한데 한 가지 반박하고 싶다. 한우주 너 비엘 미연시 주인공이야. 난 네가 남자랑 막, 사랑 같지도 않은 사랑 하는 걸 2주간 내리 봤단 말이야. 의식할 만하지 않아?
물론 한우주랑 조현우가 그럴 리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아 모르겠다. 그냥 신경 쓰인다고!
“팔 조금만 들어 봐. 할 수 있겠어?”
나만이 아는 사정을 배제하고 보면 한우주의 말이 백번 옳다. 논리에서 완벽히 졌다. 어쩔 수 없다. 얌전히 도움받고 빨리 넘겨 버리자.
“…이리 좀 나와. 벽에 붙어 있으니 불편하잖아.”
“응….”
혼자서는 힘겹던 일이 허무할 정도로 금방 해결되었다. 한우주는 젖은 붕대를 챙겨 들며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말했다.
“씻고 나와. 새 붕대 준비해 둘 테니까.”
욕실에 홀로 남고 나서야 민망함이 밀려왔다. 진짜로 나 혼자 유난 떤 거구나. 한우주 눈에 얼마나 이상해 보였을까? 창피해.
몸에 열이 오른다. 아까까지만 해도 냉기가 돌아 추웠는데 이제는 덥다. 나는 한여름에도 뜨거운 물로 씻는 사람인데…, 찬물 샤워까지 해서 겨우 머리를 식혔다.
깁스 그거 고작 며칠 했다고 왼팔이 허전해 어색하다. 조심조심 한우주가 두고 간 옷을 입다가 팔을 잘못 건드려 눈물이 찔끔 났다. 인하성 개새끼. 망할 새끼. 아픈 거 진짜 싫다.
***
“이게 다 뭐야?”
거실 테이블 위로 하얀 붕대가 잔뜩이다. 새 깁스 팔걸이까지 있다. 한우주는 소파에 앉아 내가 나오길 기다린 모양이다. 들고 있던 붕대 하나를 내려놓고는 옆자리를 툭툭 친다.
“병원에서 받아 온 거.”
“이런 걸 받아 왔어? 언제?”
“너 진료받을 때. 혹시 몰라서.”
말하며 한우주가 다시 옆자리를 두드린다. 얌전히 옆자리에 앉았다가 도로 일어날 뻔했다. 한우주가 한 말 때문이다.
“위엔 또 왜 입고 나왔어?”
“…뭐?”
“어차피 다시 벗을 거.”
용수철처럼 튀어 오를 뻔한 걸 한우주가 허벅지를 눌러 저지했다. 또냐? 작작 좀 해라. 차게 식은 눈이 내게 말한다.
알았다고. 내가 바보다. 왕바보다. 바보는 정신 놓고 있으련다. 민망한 과정을 다시 한번 거쳐 상체가 훤히 드러났다. 내 몸 아니지만, 조현우 몸이지만 그래도 맨살 보인 채로 있기가 참… 힘들다.
한우주가 바짝 다가와 붙었다. 다친 곳이 어깨와 가까워 붕대를 가슴에 둘러 고정해야 했다. 그러니 한우주의 손이 피부에 닿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숨 쉬는 것마저 잊은 채로 얼른 이 시간이 지나길 기다렸다.
“…한우주. 얼마나 남았어?”
“…조금만 기다려 봐.”
한참이 지나고도 진전이 없다. 둘렀다가, 풀었다가, 둘렀다가, 풀었다가. 주변이 붕대로 어지럽다. 한우주가 괜히 한 마디 더 얹는다.
“나도 이런 거 처음이라고.”
“무리해서 할 필요 없는데….”
“깁스 풀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렇긴 한데 한우주 너 진짜 힘겨워 보이거든….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 미안하기도 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커서 창피함은 금방 잊었다. 붕대와 씨름하는 한우주를 보다가 조금 웃어 버렸다. 한우주가 퍼뜩 고개를 들어 날 노려본다. 비웃는 줄 알았나 보다. 그런 거 아닌데.
한우주가 조금 물러나 핸드폰 액정을 두드린다. 뭘 하나 싶었는데, 화면 속 낯선 사람이 ‘붕대 감는 법’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아, 미친. 쟤 지금 영상 찾아서 보는 거야?
“풉.”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한우주의 눈빛이 한층 더 흉흉해졌는데도 멈출 수가 없다. 힘이 빠져 소파에 몸을 푹 기댔다.
“아, 아야.”
팔이 소파에 눌린다. 아프다. 다시 허리를 세우고 앉자 한우주가 비장하게 다가온다. 아, 쟤 진짜….
“뭐가 그렇게 웃겨?”
“아니, 아니야. 웃겨서 그런 게 아니라….”
귀여워서 그런 건데.
‘…안태원 뭐래.’
음, 아니. 사람이 귀여울 수도 있지. 웃겨서 웃은 것도 있을지도. 좀 미안하네. 할 말이 사라졌다.
한우주는 말없이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설마 삐졌나? 불쑥 든 걱정은 금방 모습을 감추고 놀라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조금 전과는 다르다. 수십, 수백 번은 해 본 사람처럼 능숙하다.
홀린 듯 구경하고 있자니 한우주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춘다. 그 순간, 내내 은은하게 맴돌던 향이 확 끼쳐 왔다.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하고 따뜻한, 기분 좋은 향이다. 한우주 향수 뿌리나. 아니면 보디 워시 향인가?
“…이제 이쪽 감을 거야.”
“아, 응.”
“아프면 바로 말해.”
섬세한 손길이 왼팔에 닿는다. 세공품을 다루듯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니 괜히 낯이 뜨거웠다.
“…으.”
“아파?”
“아니, 아니야. 괜찮아. 참을 만해.”
“참지 말고 그냥 솔직히 말해. 그래야 조심하지.”
“…방금 거기, 조금 아팠어.”
“알았어.”
한우주는 완전히 열중해 말이 없었다. 침묵이 유독 어색하다. 고개를 돌리고 아예 먼 곳의 벽을 보며 이 순간이 얼른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이윽고 왼팔에 다시 붕대가 둘둘 감겼다. 병원에서 한 것과 다름없이 깔끔한 모양새다. 고맙다는 인사 후, 윗옷을 걸치는데 한우주가 말을 건다. 집중한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불퉁한 한우주만 남아 있었다.
“충분히 알아들었는데.”
“응? 뭐를?”
“같이 사는 사람이 제대로 된 연락도 없이 늦으면 걱정하는 거.”
“…아.”
“어디 간다는 말도 안 하고.”
“…….”
맞다…. 깁스 때문에 잊고 있었다. 한우주… 화났지….
“미안해….”
늦기 전에 얼른 사과했다. 어제 한우주에게 쏟은 잔소리가 떠오른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고 황당하다.
“그, 친…구가 갑자기 불러서 나간 거야. 오래 볼 생각은 없어서, 너보다 일찍 돌아올 줄 알고 말 안 한 건데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친구라는 말이 낯설다. 초면인 사람들에게 잔뜩 시달리기만 했는데. 한우주 듣기에는 친구가 부른다고 신나게 나가 놀고선 걱정 끼친 놈으로 보이겠지….
“연락은 왜 안 받았는데?”
“진짜 몰랐어. 문자도 전화도 뒤늦게 확인한 거야. 하필 배터리까지 나가서…, 미안.”
어제 그 난리만 안 쳤어도 이렇게까지 미안하고 민망하진 않았을 텐데. 하…, 한우주 얼굴 볼 면목이 없다.
작은 한숨이 들린다.
“알았어.”
“어?”
“알았다고. 충전이나 잘 하고 다녀.”
“응…?”
이걸 이렇게 넘어간다고? 진짜? 기분 엄청 나빠 보였는데….
“돌아왔으니 됐어.”
한우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나는 정신이 멍해 하얀 거실 테이블만 바라보다가 인기척을 따라 뒤쪽으로 몸을 틀었다. 주방에 있는 한우주가 바로 보인다. 아, 그러고 보니.
“한우주. 내가 갖고 온 쇼핑백 어디에 뒀어?”
“쇼핑백?”
“응.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네가 가져간 거 있잖아.”
“아, 그거.”
한우주는 무얼 하는지 분주해 보였다. 뭔가 데우는 것 같기도 하고.
“버렸어.”
“…어, 뭐?”
“안에 음식 들어 있던 거 말하는 거지?”
“응. 맞는데…, 그걸 왜…?”
“다 쉬었던데.”
무심한 말이 무겁게 떨어졌다. 띵, 타이머가 울리고, 무언가 열리는 둔탁한 소리가 대화를 끊는다. 곧, 고소한 냄새가 거실까지 퍼져 코끝을 맴돌았다.
저녁은 무척 맛있었다. 한우주가 사 온 스테이크에 필라프를 먹었는데, 생전 그렇게 부드러운 고기는 처음이었다. 식사를 마칠 즈음, 한우주는 내일도 외출하게 되었다, 늦지 않게 올 것이라 말했다. 표정이 안 좋은 게 또 아버지를 보러 갈 모양이었다.
그 뒤로는 그냥, 각자 방에서 할 일 했다. 나는 완전히 지쳐서 침대에 기절한 듯 누워 있었다. 생각할 게 많은데 뇌까지 파업했다.
오재영, 강준희, 허지훈, 그리고 한우주. 한우주의 아버지. 조현우는 도대체 뭐 하던 놈인지. 아, 그리고 오재영이 준 거. 한우주가 버린 그거….
오재영에겐 미안하지만, 별생각 안 든다. 애초에 내게 준 것이 아니라 여겨서 그런가 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한우주도….’
걱정, 친절, 정성스레 치료해 준 것까지. 따지고 보면 날 향한 것이 아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가슴이 갑갑하다.
…그럴 수밖에 없지.
나는 한우주를 한우주로 알고 대하는데, 한우주는 그게 아니다. 당연한 사실에 서운해 봤자 나만 피곤하다.
잠이 쏟아진다. 생각이 길을 잃는다. 미친 척 다 털어놓으면 속이 편할까?
야, 한우주. 나 네가 아는 놈 아니야. 조현우가 어떤 녀석인지도 잘 몰라. 난 아예 다른 사람이야.
…그래도 이렇게 잘해 줄 거야?
떠오른 생각을 하나하나, 의식의 바깥으로 밀어낸다. 꿈처럼 금방 잊어버릴 생각들이 눈꺼풀과 함께, 무겁게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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