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눈앞에 떠오른 알림 창을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공략 캐릭터 4인, 아니 3인의 인물 수첩을 모두 열었다. 이걸 기뻐해야 하나. 아니지…, 기쁘게 생겼냐. 눈앞의 임도윤이 사라지면 조금은 기쁠지도 모르겠다.
무슨 오해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대답할 가치는 없어 보였다. 무시하자. 무시하고 방에 들어가서 잠이나 자자. 지친 몸을 일으켜 임도윤을 지나쳐 간다.
나도 참 안일하다. 임도윤 성질을 간과했으니. 저놈이 어디 무시당하는 걸 그냥 넘어갈 위인이던가?
임도윤이 오른쪽 손목을 그러잡는다. 고통에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생긴 건 샌님 같아서 악력은 왜 이리 센 거야. 뿌리치길 몇 번 시도했으나 전부 실패했다.
“대답 안 해?”
“놔.”
“떳떳하지 못한가 봐?”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시침 떼시겠다.”
말하며 한쪽 손을 올리기에 눈을 꾹 감아 버렸다. 이놈 지금 한우주 때문에 완전히 돌아 버린 참이니,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맞지는 않았다. 대신 내 턱을 우악스럽게 쥐고는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차라리 맞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기분 나쁘다.
“이런 게 한우주 취향인가.”
“뭐?”
“가족이 없댔지. 어지간히 갈 곳이 없었나 보네.”
“…….”
“야, 한우주한테 어디까지 해 줬어?”
…이,
개새끼가.
불쾌한 의도가 여실히 느껴지는 말에 애써 지켜 온 이성이 뚝, 끊어졌다. 있는 힘 없는 힘 전부 쥐어짜 저 망할 새끼의 정강이를 세게 차 버렸다. 임도윤이 주춤하는 사이 최대한 떨어져 거리를 뒀다.
…거기까지만 해야 했는데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임도윤에게 가장 모욕적일 말을 내뱉는다.
“더러운 새끼. 네가 그러니까 한우주한테 안 되는 거야.”
한순간 임도윤의 움직임이 멈춘다. 고개를 숙여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네 아버지처럼 살 것 같아? 수치도 모르고, 난잡하고, 그딴 의도 없이는….”
“한우주가 그랬냐?”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숨을 들이 삼킨다. 안태원 멍청한 놈. 스스로 관 짓고 무덤까지 파지, 아주.
벽을 짚고 두어 걸음 물러난다. 뛰어서 방까지 도망갈 수 있을까. 그러기엔 임도윤과 거리가 너무 가깝다. 중간에 잡힐 것 같은데.
임도윤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일그러진 표정에서 성난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난 존나 만만한 새끼고, 아버지는 좆이 가볍다? 와, 그놈이 너한테 별말을 다 했나 봐?”
그렇게까지는 말 안 했다. 아예 틀린 말도 아니지만….
“한우주가 잘해 주니까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지.”
“야. 잠깐….”
“한우주 그 새끼 아무것도 아니야. 너 같은 거지새끼랑 어울리는 거 보면 알 만하지 않아?”
임도윤이 내게 다가온다. 다가오는 만큼 뒷걸음질 쳐 보지만 그마저도 잠시였다. 툭, 발뒤꿈치가 계단에 걸린다.
“…저리 가.”
“이제야 주제 파악이 돼?”
겁먹을 거 없다. 임도윤이 하는 말의 9할은 의미 없는 협박이니까.
“너 하나 처리하는 것쯤….”
아닌가? 나 죽나? 재벌 아들 건드려서?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고 이 꼴이냐고. 임도윤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리고 기어코 일을 쳤다.
짜악-
“…….”
“…….”
손바닥이 얼얼하다. 임도윤이 옆으로 돌아간 고개를 천천히 돌린다. 맞은 뺨에 손가락 자국이 선명히 남았다. 아…, 아프겠다. 임도윤은 양손으로 제 뺨을 감싸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더듬었다.
“나, 나를… 쳤어?”
“…그게.”
“…내가 너한테 맞았다고?”
“…….”
사람을 처리하니 마니 하던 기세는 어디 가고 충격받은 임도윤만 남았다. 이제 어떡하냐. 머리를 굴려 봐도 떠오르는 건 없었다. 임도윤은 손까지 떤다. 분해서 저러는지, 속상해서 저러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다 모르겠다.
“야. 임도윤….”
“…….”
“아, 아프냐? 나 힘 별로 안 센데.”
“…….”
“그, 그러게 사람 막 협박하는 거 아니야.”
애가 넋이 나갔다. 완전히 축 처져서는 나를 지나쳐 가더니, 계단에 걸터앉는다. 미치겠네. 숨소리도 안 들린다. 저거 숨 안 쉬는 거 아니야? 죽은 거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주뼛주뼛 임도윤을 살폈다.
“저기…?”
“…….”
무릎에 고개를 처박고 꿈쩍도 안 한다.
“너 혹시 울어…?”
“울긴 누가 울…, 윽.”
미쳤다.
나 공략캐 울렸다.
어떡해? 거실 가서 티슈를 잔뜩 뽑아 건넸다. 안 받는다. 하, 씨…. 얼굴이랑 무릎 사이에 티슈를 끼워 본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정확히 내가 한 생각을 익숙한 목소리가 읊는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와, 한우주다! 한우주 뒤에서 광채가 비쳐 보인다. 농담 아니다. 평소보다 더 예쁘게 잘생겼다. 반가워서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로.
한우주는 흰 셔츠에 회색 정장을 빼입었는데 정장 조끼 핏이 어디 패션모델 못지않다. 재킷은 한쪽 팔에 걸쳤고, 머리는 말끔히 넘겨 세팅한 것 같은데…, 밖에 바람이라도 분 건지 자연스레 흐트러진 게 또 장관이다.
엉뚱한 걱정이 들었다. 임도윤이 저거 보고 반하면 어떡하냐. 임도윤이랑은 이어 주기 찝찝…….
응, 안태원. 김칫국 마시지 마. 모르겠다. 당장은 한우주 반가운 것만 생각하련다.
“한우주!”
거의 환호성을 지르듯 이름을 불렀다. 한우주는 이제 막 현관 복도를 지나왔는지 거실 입구에 선 채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내 옆의 인간…, 임도윤은 근처에 온통 먹구름이 낀 것 같다. 우중충해 죽겠다. 한우주 목소리에 한 번 움찔하더니 다시 죽은 듯하다.
네 형 좀 어떻게 해 봐. 나 미치겠어. 눈으로 도움을 구했다.
한우주가 다가온다. 차림 때문인지 런웨이에서 모델이 걷는 것 같다. 주접 아니다. 객관적 사실이다. 바로 앞까지 다가와 나를 내려다본다. 임도윤 때문인가, 기분 안 좋아 보인다.
그러곤 나를 잡아 일으켰다. 뭘 그렇게 쳐다보는지, 사람 얼굴 뚫어지겠다. 손등을 들어, 내 뺨에 가져다 대는데 어째 낯이 점점 어두워지기만 한다.
“저기….”
안 그래도 임도윤한테 이상한 오해 사고 있는데 이러고 있기 좀 그렇다. 한우주의 손을 떼어 놓으려는데 되레 내 손이 붙잡혔다. 한우주 표정이 무섭다. 한우주의 시선이 임도윤에게 옮겨 갔다. 임도윤은 그새 고개를 들고 한우주를 노려보고 있었다. 얼핏 멀쩡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눈이 조금 충혈됐다.
“네가 이랬어?”
“…그렇다면 어쩔 건데.”
임도윤이 내 손목을 흘끔대는 걸 보고 나서야 한우주의 말뜻을 이해했다. 아까 임도윤이 붙잡은 곳에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한우주, 임도윤 뺨에 난 손자국은 안 보이냐…? 안 보이나 봐….
한우주는 임도윤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데리고 계단을 올랐다. 뒤쪽에서 임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역겨운 놈들.”
…저거 아직도 이상한 오해 하고 있나 본데. 임도윤의 외침이 발악에 가까워졌지만 한우주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임도윤은 온갖 저주를 퍼붓더니 갑자기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부스럭, 비닐 소리가 들린다. 아까 산 약을 챙겨 들고는 조현우가 어쩌고, 내가 샀으니 가져가겠다 어쩌고, 한다.
보기 안쓰러울 지경이 되어서야 본론을 말한다. 거실 전체에 울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개새끼야, 아버지는 왜 만난 건데? 네가, 네가 뭔데 항상 이런 식으로.”
한우주가 멈춰 선다. 보란 듯,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내가 그거 만나러 간 게 신경 쓰여? 남의 집 쳐들어와서 이 난리를 칠 만큼? 임도윤 너도 참 여전하다.”
“너는, 넌…, 씹, 집안이 망했으면 좋겠지?”
처절하다. 임도윤은 언제나 불안한 인간이다. 한우주가 제 것을 앗아 갈 것이 두려워서. 아버지의 관심, 사랑, 그리고 어쩌면 후계자의 자리까지. 임도윤을 저렇게 만든 것은 아마도, 그의 아버지일 것이다.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평소에는 자신이 뭘 하든 신경도 안 쓰던 아버지가 한우주를 만나는 것 같으니 안 그래도 끓던 속이 불어 터졌겠지.
왜 이 시기에 임도윤이 한우주를 찾아왔는가? 답은 쉽다. 한우주가 사흘이나 연속해서 아버지를 만나러 갔으니까. 그러면 또 다른 의문이 남는다. 한우주는 왜 아버지를 찾아갔을까.
한우주가 손님방의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선다. 내 팔을 잡아끄는 힘이 조심스럽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임도윤에게 말한다.
“상관없어. 망하든 말든.”
그리고 방문이 닫혔다. 임도윤의 목소리로 내내 시끄럽던 공간이 순식간에 고요해진다. 나는 어쩐지 숨이 막혀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한우주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조금 전의 소란은 아예 없는 취급 한다. 멀뚱히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를 침대에 눕힌다. 괜찮다며 사양하는 말에도 꿈쩍 않았다.
“누워. 너 지금 열나.”
아, 맞다. 아픈 것도 잊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나. 사실 지금 몸 상태가 나쁘진 않다.
“내리고 있을걸. 아까 약 먹었어.”
“언제부터 아팠어?”
“…점심 즈음. 자고 일어나서부터? 어제 비 맞아서 그런가.”
“나한테 말하지.”
“뭘. 심하게 아픈 것도 아니고.”
일상적인 분위기가 어색했다. 임도윤은 어쩌지. 한우주는 아예 침대맡에 자리 잡았다.
“…한우주. 밖에 안 나가 봐도 돼?”
“왜?”
“저거…, 임도윤….”
“신경 쓰지 마. 곧 나갈걸. 이미 나갔을 수도 있고.”
…신경 쓰이는데 어떡하냐. 걔도 나한테 잘못 참 많이 했지만, 나는 뺨을 때려 버렸는데.
한우주는 임도윤 따위 벌써 잊었나 보다. 옆에서 내 증상이나 묻고 있다. 그러곤 약국 문 닫기 전에 약을 사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도윤이 사 온 거 있다, 말하려다 말았다. 아까 임도윤이 도로 들고 갔지, 참.
아. 그리고 중요한 거 말 안 했다.
“한우주!”
“응.”
방을 나서려는 한우주를 급히 불러 세웠다. 아, 음. 그러니까.
“그, 임도윤이…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어.”
“오해?”
“그냥 한 말일 수도 있는데, 아닐 수도 있고…. 그런데 내가 봤을 땐 진지한 거 같아서….”
“뭔데.”
“너랑 내가….”
와, 진짜 말하기 민망하다. 최대한 덜 민망하게 표현할 방법이 있을까? 말을 못 고르겠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자니 웃음소리가 들렸다. 뭐야, 지금 웃냐? 나는 심각해 죽겠는데.
“금방 갔다 올 거니까 이따가 말해.”
“알았어….”
…그래. 그게 낫겠다. 한우주 나가 있는 동안 고민해야지.
우리가 친구가 아닌 줄 알아. 음…, 내가, 아니 조현우가 네 취향인 줄 알아. 그러니까 연애적인, 혹은 성적인 의미로…. 아오, 팔만 아니었으면 벌써 침대에서 여덟 바퀴는 굴렀다.
지친다. 임도윤 일이랑, 이 엿 같은 오해를 한우주에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그리고 아마 약 성분 때문인가? 자꾸 하품이 나온다.
안 되겠다. 그냥 눈 감고 생각해야지. 물론 결말이 뻔한 짓이었다. 눈을 감고 고작 몇 분이 흘렀을 때 즈음, 나는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
다시 눈을 뜬 건 몇 시간이 지나고 난 뒤였다. 아직 밤인데도 눈앞이 훤했다. 얼핏 알림음이 들린 것 같았는데, 헛것이 아니었나 보다. 눈 뜨자마자 보이는 게 무슨… 길고 긴 알림 창이다. 비몽사몽 해 눈가를 한참 비비적대고 나서야 글이 겨우 읽혔다. 그리고 눈이 번쩍 뜨였다.
「System: 1주 차의 플레이를 평가합니다.」
「랭크: E, 엔딩은 볼 수 있을지 우려됩니다.」
「사유: 일부 루트 삭제 / 공략 캐릭터의 호감도 변화가 없거나 하락함 / 이벤트 결과가 부정적….」
「랭크가 C 이하로, 난이도가 하향 조정됩니다.」
「게임 마스터 → 매우 어려움」
「다음의 기능이 해방됩니다: 지도_추적」
…랭크?
……난이도 하락?
이게 다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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