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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24화 (24/150)

24화

이런 기능 없었잖아. 어쩐지 메뉴 상단에 적힌 ‘게임 마스터’가 도대체 뭔가 싶었는데 난이도 표시였냐고. 아연해선 알림 창만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난이도랑 기능 좀 추가된 거 가지고 쫄 거 없다. 알림 창을 끄고 「메뉴」를 연다. 추가된 기능을 살피는 게 우선이다.

「Mon 4/7│매우 어려움」

「:: 메뉴 ::」

「인물 수첩」

「이벤트 목록」

「지도」

「게임 종료」

…날짜 옆에 ‘게임 마스터’라 적혀 있던 게 ‘매우 어려움’으로 바뀌었다. 다른 건 이전과 다른 바 없었다. 아까 추적 기능이 해방됐다고 했나? 「지도」를 열어 본다.

‘이게 뭐야.’

지도에 꽤 깜찍한 도트 캐릭터들이 생겨났다. 한우주 캐릭터는 한우주 집 쪽에 있는 걸 보니, 주요 인물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기능인가 보다.

좀 더 꼼꼼히 살펴보자 지도 오른편에 새로운 UI가 생긴 게 보였다.

「:: 추적 ::」

「한우주 on / off」

「서연준 on / off」

「수학? on / off」

「임도윤 on / off」

…아, 미친. 윤태현 저거 아직도 수학이라고 돼 있네. 몰라. 지금 중요한 건 윤태현이 아니다. 시험 삼아 한우주의 추적 기능을 on 해 본다.

동시에 지도가 꺼지고, 눈앞에 나타난 화살표가 오른쪽, 한우주 방 쪽을 가리켰다.

기능은 대충 확인했다. 확실히 유용하네. 공략캐 위치를 알 수 있으니 한우주 끌고 이벤트 진행하는 데 쓸 수 있겠다.

‘…그런데 E 랭크라니.’

내가 E 랭크라고? 게임하면서 이딴 랭크 받아 본 적 없다. 새 기능이 열린 건 좋은데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쁘다. 이게 다 한우주가 말을 안 들어서….

감기 때문인가, 아니면 열받아서 그러나. 머리가 다시 어지럽다. 방 불을 켜니 책상 위에 약과 물이 놓인 게 보였다. …한우주가 두고 간 거겠지.

하…, 욕도 마음 편히 못 하겠네.

약을 챙겨 먹고 침대 위에 앉아 인물 수첩을 살폈다. 서연준 이벤트가 두 개, 수학? 이라고 적힌 윤태현 이벤트가 한 개, 임도윤 이벤트가 한 개…. 어딜 봐도 좋은 상황은 아니다.

약 기운이 돌아 다시 잠들 때까지 머리를 최대한 굴렸다. 몇 번이고 생각해도 결론은 같았다.

셋 중에 서연준이 제일 낫다.

이거저거 건드리는 것보다 하나 골라서 집중 공략하는 게 엔딩 보기에는 훨씬 나을 것이다. 오늘부터는 진짜, 서연준이랑 한우주 좀 어떻게 해야지.

졸음이 무겁게 내려앉은 와중에 몇 번이고 다짐했다. 서연준…, 한우주…. 서로를 친구로 볼 수 없도록 만들 것이다…. 너희 진짜 각오해라….

***

‘이런 개 같은….’

겨우 내린 열이 다시 오를 것만 같다. 이게 다 한우주 때문이다. 사건의 경위는 이러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열이 더 심하게 나 도저히 학교에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간병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덩달아 학교를 빠지려는 한우주를 쫓아내듯 내보냈다. 지도가 참 편하긴 하더라. 멀쩡히 등교한 걸 확인하고서야 눈을 붙였다.

…그런데 자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디링-

알림음에 눈을 뜬 게 2시쯤. 학교에선 이제 막 오후 수업을 시작할 시간이다. 뭐 때문에 알림이 뜨나, 했더니만….

「System: 이벤트 목록이 갱신되었습니다. :: 서연준 :: 불쾌한 관심」

‘…….’

한우주 얘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벤트 이름이 왜 이따위인데. 어딜 봐도 안 좋아 보이잖아. 급한 대로 핸드폰을 확인한다. 이놈의 단톡방. 알림이 또 잔뜩 쌓였다.

서연준과 한우주에게도 메시지가 와 있다. 하나씩 확인했다.

「한우주: 점심 챙겨. 약 먹고」

한우주에게 온 건 간단한 메시지 하나가 전부다. 으음, 서연준은….

「서연준: 현우야 괜찮아? 어디 안 좋아?」

「서연준: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알았지?」

…그냥 평범하게 걱정하는 내용이다. 나한테 온 메시지만 봐선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단톡방을 확인한다. 왜 학교 안 나왔냐며 야단법석 하는 걸 넘기고 보는데 중간중간 눈에 띄는 내용이 있었다.

「오재영: 들었음?? 우리 학교 야구부 망한다던데ㅋㅋ ㅈㄴ」

「오재영: 그럼 인하성도 ㅈ 되는 거 아님?」

「오재영: 개꼬시다 ㅅㅂㅋㅋ」

「강준희: 오재 톡하지 말고 앞이나 봐라」

「오재영: ㅡㅡ」

…야구부가 망해? 오늘 어떻게든 학교에 가야 했나 보다. 뭐 이렇게 일이 많아? 스크롤을 마저 내린다.

「강준희: 야ㅐ 조현우」

「강준희: 너 허지훈한테 연락 안 했지」

「강준희: 빨리 하라고」

「오재영: 맞아 ㅅㅂ 걔 나한테까지 톡함」

「오재영: 개빡쳤던데 무서워서 지릴 뻔」

「강준희: 더러운 얘기 하지 마;」

「오재영: ㅅㅂ 야 너 어디임 매점이나 가자」

아, 허지훈. 맞다. 아니 근데 진짜로. 걔 번호 모르고 연락 온 것도 없는데 뭐 어쩌라는 건지.

「조현우: 나 감기 때문에 오늘 학교 못 갔어. 이제 일어났음. 내일 보자」

오재영이 또 난리를 피우면 골치 아플 테니, 적당히 답장을 남긴다. 그나저나 서연준이랑 한우주 사이에 무슨 일 있었나? 설마 싸우기라도 한 거야? 고민 끝에 쉬는 시간에 맞추어 서연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차피 한우주는 집에서 볼 테니까…. 서연준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현우야? 너 괜찮아? 어디 아파?]

“괜찮아. 그냥 감기야. 하루 쉬면 나을걸.”

[그럼 다행이다. 팔도 불편한데 어떡해. 집에 약은 있어?]

“응. 약도 있고, 식사 잘 하고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알았어. 내일은 나올 수 있는 거야?]

“그럴걸? 아, 그런데….”

괜히 목을 한 번 가다듬는다. 어색하게 들리면 안 될 텐데.

“나 아픈 건 어떻게 알았어?”

[아, 점심때 너희 반 들렀거든. 네가 없길래 그냥 뭔 일 있겠거니 짐작만 했지. 아픈 건 방금 알았어.]

“어…, 그래?”

[응. 한우주한테 너 어디 갔냐 물어봤는데, 음….]

“왜. 한우주가 뭐래?”

[…별말 안 했어. 걔 오늘 기분 안 좋아 보이더라.]

“아….”

[어, 한우주?]

“뭐?”

[잠깐만. 한우주 와서. 나중에 또 연락하자.]

둘이 괜찮은 건가? 한우주가 먼저 찾아갈 정도면 그렇게 나쁜 상황은 아닐지도.

…생각하기가 무섭게 둘이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 안 괜찮나 본데. 도대체 뭔 일이냐고.

[야, 조현우.]

액정을 다시 확인한다. 아직 서연준이랑 통화 중이다. 그런데 왜 한우주가 바꿔 받냐고.

“한우주 넌 무슨 일로 거기 있냐….”

[체육복 돌려받으러.]

“그…으래. 수업 잘 듣고…?”

[야.]

“어?”

[…….]

“…무,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끊는다.]

뚝, 그대로 전화가 끊겼다.

…뭐야, 진짜?

전화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림음이 울렸다. 느낌이 벌써 불안하다.

디링-

「System: 이벤트 목록이 갱신되었습니다. ::서연준:: 거슬림」

‘…….’

미치겠다. 둘이 원수라도 되려고 이래? 지금껏 문제없이 잘 지냈잖아. 혹여 둘 사이가 잘못되면 진짜 큰일이다.

서연준이 내 유일한 희망이고 동아줄인데. 어떻게든 썸 타게 해야 하는데. 급한 마음에 지금이라도 학교에 갈까, 고민했지만 그러다 내일도 학교에 못 갈 것 같아 관뒀다. 망할…, 빨리 건강해져야지. 밥 먹고 약 먹고 죽은 듯이 잘 거다. 그리고 내일 당장 이 사태를 해결할 거다.

‘제발 하루라도 마음 편히 보내게 해 주라.’

간절한 바람 속에서 몸을 뉜다. 그리고 아주 푹 잤다. 감기가 싹 달아날 정도로.

주변이 온통 캄캄한 시간에 눈을 떴다. 얼마 만에 느껴 보는 개운함인지 모르겠다. 앞으로 절대 비 안 맞고 싸움 안 말리고 몸을 유리 다루듯 해야겠다.

목이 말라 방을 나서는데, 한우주 방문 틈새로 새어 나온 빛이 보였다. 저 웬수. 공략캐랑 연애는 안 하고 싸우기만 하지. 다가가 두세 번 노크하고 방에 들어갔다. 한우주는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인기척에 읽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야, 한우주….”

말없이 다가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내 이마에 손을 대 보는 것이다. 짜증 난다. 차라리 잘해 주지나 않으면 그냥 미워하고 말 텐데.

“열 내렸네.”

“…이제 말짱해.”

“그래.”

조현우 대하는 것의 반만 해도 공략캐랑 문제없겠다. 도대체 한우주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것인지.

“배는 안 고파? 지금 늦어서 뭐 시켜 먹기도 어렵긴 한데.”

“몇 시인데?”

“새벽 3시쯤.”

“뭐?”

내가 그렇게 오래 잤다고? 아니, 그것보다….

“너는 여태 안 자고 뭐 해?”

“곧 누울 거야. 원래 이 시간쯤 자.”

“왜?”

“잠이 안 와서.”

이 녀석이. 이러니까 아침에 정신을 못 차리지. 바로 앞에 선 한우주를 꾸역꾸역 침대 쪽으로 밀어냈다.

“누워야 잠이 오지. 학교 가야 하는데 여태 안 자면 어떡해!”

“…….”

한우주가 순순히 침대에 눕는다. 핸드폰을 보려 들길래 뺏어서 책상 위로 옮겨 버렸다.

“그냥 눈 감고 있어.”

“음….”

“빨리 자. 4시간 뒤에 깨울 거니까.”

그대로 돌아서 나가려 하던 때였다.

“조현우.”

“왜?”

“감기 다 나은 것 같아?”

“응. 이제 괜찮아.”

“그럼 가지 말아 봐.”

“뭐?”

“넌 방금 일어났잖아. 어차피 안 졸릴 거 아냐. 잠깐만 옆에 있어.”

“…….”

할 말이라도 있나?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데 말없이 내 쪽을 계속 쳐다본다. 손을 뻗어 눈가를 아예 가려 버렸다.

“자기나 해.”

“…야.”

“왜.”

“서연준한테 왜 전화했어?”

“…메시지 왔길래.”

“나도 보냈는데.”

“너야 뭐, 나 아파서 빠진 거 다 아는데 뭘 굳이.”

“…….”

눈가에 올린 손을 뗀다. 한우주는 얌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문득 서연준이 한 말이 떠올랐다. 한우주 기분 안 좋아 보인다고 했는데.

“…한우주.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왜?”

“그냥.”

한우주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조금 뜸을 들이더니 느리게 입을 움직여 대답했다.

“별일 없었어. 재미없고, 지루하고….”

“응.”

“집에 가고 싶고….”

한우주의 목소리에 졸음이 잔뜩 묻어난다. 나도 모르게 말에 웃음이 섞여 든다.

“한우주 가만 보면 집 진짜 좋아해.”

“…별로.”

“응?”

“집 안 좋아….”

그 뒤에 또 무어라 했는데, 발음이 뭉개져 알아듣지 못했다. 잠 안 온다더니 아주 잘만 잔다. 누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금방 잠들 거면서.

일어나 내 방에 가려고 했으나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모르는 목소리가 나를 붙잡으며 말한다. 그냥 옆에 더 있어.

“…….”

방 불을 끄고 다시 곁에 앉았다. 어둡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속에서 나는 한우주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가지런한 눈썹, 고이 감긴 눈, 고른 숨을 쉬는 코와 좀처럼 올라가는 일이 드문 입꼬리, 혈색이 돌아 예쁜 색을 띤 입술까지.

음, 속눈썹이 더 길었던가? 콧대가 좀 더 높았던 것 같기도. 처음엔 조금 어설픈 한우주였는데, 시간을 들일수록 점점 더 한우주다워졌다. 심심함을 못 이겨 만들어 낸 나름의 놀이였다.

무슨 꿈을 꾸는 것인지, 한우주가 앓는 소리를 낸다. 그대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팔을 툭 떨구었다. 한우주의 손이 내 손 위로 겹쳐진다. 더울 정도로 손이 뜨겁다.

‘집이 안 좋다고.’

그런데도 나는 손을 밀어내지 않았다. 이유를 대자면… 글쎄. 악몽을 꾸는 것 같아서?

‘그러면 뭐 때문에 그렇게 집에 오고 싶었어?’

떠오른 질문을 서둘러 지웠다. 직감이다. 이런 건 물어서도, 궁금해해서도 안 된다는 직감.

시간이 흘러 새벽의 푸른빛이 방을 비출 때,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우주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방을 나간다. 한 시간이라도 눈을 붙이는 게 좋겠지. 학교에 가면 서연준이랑 한우주 사이는 괜찮은지 먼저 확인해야 한다. 진짜 딱 하루. 하루 눈 뗐을 뿐인데 이게 뭐야. 연애는 못 할망정 공략캐랑 싸우기만 하고.

…남의 속을 마구 뒤집어 놓고 아예 미워할 수도 없게 하니, 한우주는 정말로 질 나쁜 멍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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