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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25화 (25/150)

25화

화요일 아침이 되어선 완전히 평소의 컨디션을 되찾았다. 아니, 그 이상이다. 유독 상쾌한 날 있잖아. 오늘이 그렇다. 머리는 맑고, 몸은 가볍고.

웬일로 한우주까지 제시간에 기상했다. 적당히 아침을 챙겨 먹고 등교하는데 이때부터 조금 불안했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평화롭지? 오늘 뭔 일 생기는 거 아니야?

학교에 도착하고 오전 수업을 듣는다. 한우주는 뒷자리에서 죽은 듯 처자는 게 평소와 다른 바 없었다. 그런데도 이 모든 상황이 내게는 폭풍전야처럼 느껴졌다.

…모르겠다. 괜히 걱정하지 말고 내 할 일 해야지. 일단 한우주랑 서연준 붙여 놓고 둘 사이가 괜찮은지 두 눈으로 확인할 생각이었다. 괜히 내 힘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2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 서연준이 먼저 우리 반에 찾아왔으니까.

“현우야.”

여기서부터 문제다. 왜 한우주가 아닌 나를 찾아왔느냐는 말이다. 뒤집힌 속을 갈무리하고 어떻게든 웃으며 인사했다. 서연준이 다가오자 내내 뒷자리에서 숙면하던 한우주가 갑자기 깨어났다.

그리고 지옥이 시작됐다. 왜 항상 나쁜 예감은 적중하는 건지.

“…한우주 안녕.”

“그래.”

뭐 하냐, 한우주. 좀 더 성의 있게 인사 못 하냐. 서연준이 머쓱히 웃고는 내게 말을 건넨다.

“이제 몸은 좀 괜찮아?”

“어.”

…?

내가 대답한 게 아니다. 한우주 왜 저래?

“…우주 너도 어디 아팠던가?”

“아니.”

“그래. 그것 참… 다행이네.”

미치겠다. 분위기 완전 싸하잖아. 한우주 멱살 잡고 흔들고 싶다. 너는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웃는 얼굴 유지하기가 버겁다.

“약 먹고 푹 쉬었더니 금방 나았어. 걱정 고마워.”

“팔도 다친 지 얼마 안 됐잖아. 가족분들 걱정이 많으시겠다.”

“아….”

서연준이 할 법한 말이다. 가족이 워낙 많은 데다가 서로를 끔찍이 여기니까. 서연준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가족이라고 답하겠지.

진짜 조현우라면 무신경하다, 생각하고 상처받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조현우가 아니니 솔직히 별생각 안 든다. 대답할 게 마땅치 않아 곤란할 뿐이다.

“그러게.”

굳이 정정하며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으니 짧게 대답하고 만다. 이제 내 사정은 신경 쓰지 말고 한우주랑 대화했으면 좋겠다.

“서연준 너도 참 여전하다.”

“…무슨 뜻이야?”

…한우주 이 자식아!!!

저 지옥의 주둥아리를 어쩌면 좋냐. 이쯤 되니 입을 막아 두는 게 나은가 싶다. 그냥 잘생기게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든 공략캐 꼬실 수 있지 않을까?

한우주의 손을 툭툭 친다. 제발, 그만, 하라고. 그런데 이게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지금 무시하냐?

“한우주.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글쎄.”

“불만 있으면 똑바로 좀 말해.”

“내가 왜? 머리가 있으면 알아서 생각해야지.”

“으아악! 와아아악!!”

제발 싸우지 좀 마라!!! 냅다 비명을 질러 버렸다. 서연준과 한우주가 동시에 나를 본다. 하… 둘 다 미워 죽겠다. 제발 싸우지 말라고. 이왕 싸울 거면 사랑싸움을 해….

“현우 무슨 일 있어?”

“오늘 며칠이지?!”

“4월 8일인데, 왜?”

몰라. 아무 말이나 해 본 거다. 4월 8일, 4월 8일…. 이 시기에 잡을 수 있는 이벤트가 뭐가 있지. 무슨 말을 해야 화제를 돌릴 수 있을까. 기억을 헤집는다. 아, 맞다!

“시, 시험 3주 남았다!”

“…….”

“…….”

침묵이 무겁다. 아오, 이것들 진짜 꿀밤 한 대씩 때리고 싶다.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너희는 상상도 못 하겠지. 얄미워 죽겠다.

“갑자기 뭔….”

한우주가 대놓고 어이없다는 티를 냈다. 네 죽어 가는 연애사 살리는 중이니까 가만히 좀 있어 봐라.

“갑자기? 갑자기 아니거든. 어제 아파서 수업 빠졌지, 저번 주엔 인하성 때문에 수업 빠졌지. 팔 불편해서 필기 속도는 안 나지.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받고 있는지 알아?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인 건 아느냐고.”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몰라. 이 망한 분위기를 어떻게 할 수 있다면 책상 위에서 춤이라도 추겠다.

다행히 내 노력이 아주 헛된 것은 아니었는지 서연준이 웃으며 말을 건넨다.

“음…, 내가 필기해 둔 거 보여 줄 수 있어. 혹시 설명 필요하면 옆에서 같이 봐줄게.”

“어, 어어. 응? 아니, 그건 좀. 시간 뺏는 거 같아서 미안한데.”

“뭘. 설명하면서 나도 복습하고 하는 거지.”

이게 아닌데? 나 말고 한우주랑 공부해야 하는데? …당연히 한우주에게도 제안하겠지. 서연준은 그런 놈이니까.

“나 학원 때문에 일요일 오후에만 시간 되는데, 괜찮아?”

“아….”

안 괜찮은데.

한우주도 좀 챙기면 안 될까, 서연준아.

미처 할 말을 찾기 전에 한우주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할 거면 우리 집에서 해.”

어라, 한우주가 웬일로 예쁜 짓을 하지. 서연준은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것 같았다. 그야 그렇겠지. 옆에서 삐딱하게 굴던 놈이 갑자기 제집을 내어 주겠다 하니…. 한우주가 마저 말을 이어 간다.

“서연준 너희 집은 주말에 정신없잖아. 거기서 어떻게 공부하냐. 도서관이라도 가게? 설명하다가 쫓겨나고 싶으면 그래도 되고.”

“…으음, 한우주 너 괜찮아?”

“뭐가?”

“진짜 네 집 가도 괜찮은가 해서.”

“방금 내가 오라고 했잖아.”

“응…. 그러면 현우는 어때?”

“어?!”

나는 어떻냐고. 완전 땡큐지. 한우주가 이렇게 기특해 보인 적이 없다.

“난 좋아.”

“그러면 신세 좀 질게.”

“그래.”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무사히 공부 약속이 잡히고, 수업을 알리는 종이 친다.

“연준아, 일단 수업 들으러 가.”

“응. 나중에 마저 얘기하자.”

교실을 나서려던 서연준이 몸을 틀어 다시 이쪽으로 온다. 무슨 일이지, 싶었는데 한우주에게 말한다.

“한우주.”

“왜, 또.”

“그냥, 고맙다는 인사를 안 해서.”

“…….”

“이왕 모이는 거 너도 같이 공부해. 금방 잘할 수 있으면서 매번….”

“알았어. 잔소리는.”

“그래. 그럼 나 진짜 간다.”

“어. 잘 가.”

그대로 서연준은 자기 반으로 돌아갔다. 뭐지? 일이 너무 잘 풀렸다. 좋은 거지? 기뻐해도 되는 거지? 와, 진짜 기분 좋다.

“한우주, 한우주.”

그새 자려고 드는 한우주를 툭툭 치며 부른다.

“왜?”

“너도 같이 공부하는 거다.”

“…왜?”

“너는 시험 안 보냐? 같이 좀 하자고. 알았지?”

“뭐….”

대답이 시원찮다. 사실 공부 안 해도 된다. 서연준 옆에만 잘 붙어 있으면 좋겠다. 싸우지 말고.

“한우주, 한우주.”

“또 왜.”

“서연준이랑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딱히?”

“그럼 시비 걸지 말고 잘 좀 지내!”

“나 시비 건 적 없는데.”

“아까 걸었잖아.”

“그건 걔가 먼저 말실수해서 그런 거고.”

말실수? 아, 가족 얘기 말인가? 내가 가만히 있는데 한우주 왜 네가…. 이 자식 조현우 엄청 아끼나 보다? 대신 화도 내고?

“그거야…, 모르고 한 말인데 뭘.”

“…….”

한우주의 표정이 굳는다.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가 미간을 좁히는 게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지.

“모르면.”

얼핏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지만 분명, 감정이 억제된 목소리로 말한다.

“모르고 한 말이면 괜찮아?”

“…….”

가볍게 넘기기 어려울 정도로 진중히 묻는다. 한우주 또 이런다. 항상 이렇게 갑자기 치고 들어오지. 남의 속 복잡하게 만드는 데 뭐 있다.

차마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곧 선생님이 오신 탓에 시간이 없기도 했고, 또… 나는 정말로 멀쩡해서. 멀쩡한 게 당연한데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아, 한우주가 내게…, 아니 조현우에게 조금만 신경을 껐으면 좋겠다. 이대로는 서로 곤란하기만 할 테니까.

디링-

「System: 이벤트 목록이 갱신되었습니다. :: 서연준 :: 지독한 무지함」

***

‘…하아.’

푹, 한숨을 쉰다. 그 뒤로는 서연준과 발생한 이벤트 명이 왜 저런지 고민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번에도 역시 완전히 처음 보는 이름이다. 게다가 좋아 보이지도 않아.

한우주와 서연준 사이 수습하기. 비록 모양새는 얼기설기 엉망이지만 어느 정도 성공한 줄 알았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

둘에 대한 고민에 골머리를 앓던 것이 오후가 되어선 완전히 나았다. 안타깝게도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또 다른 문제가, 더 강렬한 것이 다가와 홀랑 잊어버린 거지.

사건은 오후 수업 시간 중에 일어났다. 복도가 소란스럽더니 인하성이 우리 반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어왔다.

또 인하성이냐? 하고 넘길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경직된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며칠 전 인하성과 있으며 느낀 감각이 다시 떠올라 나는 완전히 얼어붙어 버렸다.

“한우주 개자식아!”

인하성이 고함을 지르며 돌진해 온다. 뒤따라온 선생 몇 명과 야구부원들, 저번에 회의실에서 본 감독까지 달려들어 인하성을 붙잡고 말렸다. 다들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저거 그냥 두면 사람 하나 죽이겠구나.

“무슨 지랄을 한 거야. 씹, 뭘 한 거냐고!”

“인하성! 너 일 크게 벌이고 싶어?”

“아, 좀 닥쳐!”

정신이 나갔는지 감독 말도 안 듣는다. 다행히 사람 여럿이 붙잡으니 한우주에게 더 다가가진 못했다. 너덧 걸음 정도의 거리. 주먹질할 만큼 가깝지는 않지만 안심할 만큼 멀지도 않다.

무서웠다. 한우주를 데리고 도망쳐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한우주는 괜찮을까? 뒤돌아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 고함이 더 커진다.

“이거 놔, 저 새끼 가만 안 둬!”

“…….”

한우주는 턱을 괴어 입가를 가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나는 확실히 보았다. 슬며시 떠오른 웃음을. 한우주는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그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고함이 멀어진다. 한우주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툭, 한마디 뱉었다.

“앞에 봐야지.”

주문처럼 굳은 몸이 풀리고, 주변을 둘러본다. 인하성은 그대로 끌려 나간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과 이야기 중이었고, 학생들은 중간중간 엎어진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생각하려 들 때마다 틱, 스위치가 내려갔다. 하교 시간이 가까울 즈음 인하성의 소식을 들었다.

학교 폭력 가해 혐의가 인정되어 퇴학 심사 진행 중. 심사가 끝날 때까지 무기한 정학. 야구부 퇴출. 전학을 가도 1년은 대회 출전이 불가하고 퇴학 처리될 경우 선수 자격을 완전히 박탈한다.

인하성은 앞으로 야구를 할 수 없다.

학교와 부모가 나서서 그렇게 감싸려 들었는데, 어째서? 심사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퇴학을 당할지 전학을 갈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인하성에게 등 돌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만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결정적 증거인 시계도 잃어버렸고. 이렇게까지 처벌받을 수 있나?

짐작 가는 것은 하나뿐이다.

한우주.

인하성은 한우주에게 분노했다. 물론 혼자 착각해서 그 난리를 피운 걸 수도 있지만…, 그러면 뭐야? 학교가 갑자기 정신 차려서 처벌한 건 아닐 거 아냐.

하교 후 일정은 똑같았다. 한우주와 함께 병원에 들렀다가 한우주의 집에 간다. 우리는 내내 말이 없었다. 한우주가 말을 걸었는데 내가 못 들었을 수도 있고.

나는 집에 도착하고서도 바닥만 보다가 현관 복도에 우뚝 멈춰 섰다. 한우주가 거실로 향하며 말했다.

“저녁 어떻게 할래?”

“…….”

“조현우?”

“……응?”

“거기 서서 뭐 해.”

집에 들어서자마자 온갖 생각과 의문이 휘몰아쳤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라 무얼 먼저 말해야 할지, 어떻게 화두를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말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거 아무거나. 고개를 든다. 한우주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물은 것은,

“한우주. 너는 인하성이 싫어?”

주인공인 네가 공략 캐릭터를 싫어하게 된 것이 맞는지, 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인지. 혹시라도 그 이유 안에 조현우가 있는지, 직접 들어 알아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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