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26화 (26/150)

26화

“글쎄.”

한우주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답한다.

“싫다기보다는 거슬리지.”

그렇게 말하는 한우주의 표정이며 어투며, 모든 게 다 무심해 보였다. 가슴이 턱 막혀 온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처음?”

“인하성이랑 처음 만났을 때.”

“내가 걔랑 언제 처음 만났더라.”

…한우주는 인하성을 싫어하지 않는다. 싫어할 만큼의 관심도, 무게도 없다.

“저번 주에. 나한테 인하성 아느냐고 물어본 날에.”

“아.”

한우주의 눈길이 허공을 맴돈다.

“그럼 그때 처음 만났나 보네.”

“그때만 해도 괜찮았잖아.”

“뭐가?”

“그냥…, 인간적인 흥미 정도는 있었을 거 아냐.”

그마저도 없었다면 내게 인하성에 관해 묻지 않았겠지.

“그랬을지도. 그보다 계속 서서 얘기할 거야?”

다리 아프겠는데. 덧붙이는 말에서 무료함이 팽배한다. 나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한우주.”

“응.”

“네가 그랬어?”

“뭘.”

“인하성 그렇게 된 거… 네가 한 거야?”

한우주가 미간을 좁히며 시선을 바로 했다.

“응.”

그리고 바로 이어 말했다.

“왜 그런 반응이야?”

대답할 말을 쉬이 찾지 못했다. 한우주의 말이 나의 안일함을 첨예하게 관통한다.

“좀 더 기뻐할 줄 알았어. 안심하거나.”

기뻐해? 누가? 조현우가? 숨을 크게 들이쉰다. 머리가 어지럽다.

“내가 기뻐해?”

“어.”

심장이 빨리 뛴다. 지난 기억이 잘게 조각났다가 다시 모양을 갖추어 간다. 의아함을 풀지 못하고 넘긴 순간순간이 한 조각 퍼즐이 된다.

왜 유독 인하성을 꺼릴까, 인하성이 공략 캐릭터에서 삭제된 이유는 무엇일까, 한우주는 왜 아버지를 찾아갔을까, 아버지에게 뭘 요구한 걸까, 다른 공략 캐릭터보다 조현우를 친근히 여기는 듯한 태도는 나의 기우이고 착각일까.

그리고 오늘 아침, 서연준과의 일까지.

가장 묻기 두려운 말을 꺼냈다.

“내 감정이 중요해?”

“…….”

“나 때문에 그런 거야?”

제발 아니었으면. 한우주와 인하성이 어떻든 간에 신경 안 쓸 테니까.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선고 같은 말이 떨어진다.

“네가 그랬잖아. 인하성 벌받았으면 좋겠다고.”

“한우주.”

“…왜.”

“이러지 마.”

한우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는 신경 쓸 거 없어. 이유야 어쨌든 내가 한 일이잖아. 난 하기 싫은 일은 안 해.”

“그런 문제가….”

“그러면 뭐가 문젠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답답하다. 그러니 네 입으로 이유를 말해 달라. 한우주의 불안정한 시선에는 많은 의문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중간한 거짓뿐이었다.

“전부 다.”

한우주가 조현우에게 가진 감정이 우정이든 동정이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상관없다. 다만 그 크기가 공략 캐릭터를 향한 것보다 커서는 안 된다. 게임의 흐름을 해치는 일이니까.

이게 답이다. 한우주에게 말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힘없이 고개를 떨군다. 한우주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 화내는 모습, 따져 묻는 것, 내게 실망하는 것. 그냥 다 싫다.

공기가 답답하다. 그대로 뒤돌아 걷는다. 현관문 앞에 서서 문고리에 시선을 두고 말한다.

“바람 좀 쐬고 올게.”

그대로 문고리를 돌려 나가려 했다.

“가지 마.”

절박한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는다.

“가지 마, 조현우.”

“…….”

“…….”

“…….”

미친…, 못 나가겠다….

안태원 돌아이야…. 문 열고 나가. 문고리 돌리는 게 그렇게 어렵냐.

응. 놀라울 정도로 어렵다. 아니, 난 한우주가 붙잡을 줄 몰랐다. 진심으로. 나가서 가장 손해 볼 사람이 누구야, 집 없고 돈 없는 사람이지.

안태원, 생각해 봐. 이 상황에 안 나가는 것도 참 웃기고 멋없잖아. 이런 타이밍에는 상대가 무슨 지랄을 하든 박차고 나가 주는 게 정석이다. 어떤 매체에서든 그렇다. 근데 내가 그런 걸 따를 필요가 있나? 어차피 조연인데?

확실히 말해 두는데, 나의 당혹감은 결코 가짜가 아니다. 쟤가 나… 아니, 조현우 때문에 공략 캐릭터 인생을 조져 놨다는데 머리 복잡하고 죽겠는 게 당연하지. 그러니 나가서 바람 쐬는 게 맞다. 생각 좀 정리하고. 그 뒤에 다시 돌아오든, 돌아오지 말든.

근데 쟤가 가지 말라고 하잖아….

내가 나가면 집에는 쟤 혼자잖아….

여기 밤에 혼자 있으면 꽤 무섭단 말이야….

빡쳐….

신발을 도로 벗어 가지런히 정리했다. 그리고 뒤로 한 보, 또 한 보 걸었다. 한우주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전의 상황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쪽팔렸다.

“조현우….”

부르지 마. 그냥 기절해 버리고 싶으니까.

“그렇게 걸으면 다쳐….”

“…그래.”

순순히 몸을 돌려 바로 걸었다. 이젠 없다시피 한 체면을 지키느라 고개를 들지는 못했다.

……어색하다. 개 어색하다. 이럴 거면 그냥 나가는 게 맞았나. 인생은 후회의 연속이라더니 게임 속이라고 다를 바 없구나.

한우주와 나는 소파에 앉았다. 변명하자면 내가 먼저 앉았는데 한우주가 따라 앉은 거다. 소파가 길어서 다행이다. 나는 왼쪽 끝에, 한우주는 오른쪽 끝에 있다.

곁눈질로 한우주를 살피다가 눈이 마주쳐서 고개를 획 돌려 버렸다. 멋쩍어서 행동이 부산러워졌다. 짜증 난다. 무릎을 끌어안아 움직임을 봉인했다.

“…조현우.”

대답 안 하련다.

“저녁 뭐 먹을 거야.”

…와중에 밥을 챙긴다. 목을 가다듬고 겨우 대답한다.

“입맛 없어.”

“…조현우.”

대답 안 할 거다.

“…나는 배고파. 현우야.”

“…….”

한우주가 들고 온 봉투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긴다. 치킨 시켰다. 메뉴 선정은 당연히 내가 했다. 한우주가 끈질기게 물어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식탁 위에 갓 튀긴 치킨이 놓인다. 튀김옷이 노랗고 윤기 나는 게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입맛 없다고 한 거 거짓말이다. 그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말한 건데, 한우주가 조르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위가 요동을 친다.

조용히 밥만 먹어야지. 밥 먹고 올라가서 빨리 자 버려야지.

딱 결심한 순간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야, 한우주.”

“…왜?”

“너 뭐 하는 거야?”

“뼈 바르는데.”

누가 치킨을 포크랑 나이프로 발라 먹어?

“너 치킨 안 먹어 봤어?”

“먹어 봤어.”

“허.”

“…왜 그러는데.”

한우주 이놈은 아까부터 은근히 내 눈치를 본다. 지금도 그렇다. 슬그머니 포크랑 나이프를 내려놓는다.

“비닐장갑 있어?”

“음….”

한우주가 조용히 일어나 주방 카운터 근처를 뒤적이더니 비닐장갑을 들고 온다. 다행히 비닐장갑은 평범하다. 금칠 같은 거 안 되어 있다.

비닐장갑을 끼고 치킨의 큰 조각을 먹기 좋게 나눴다. 다리 하나는 한우주 접시 위에 올렸다. 이건 기본적인 매너니까. 둘이서 치킨 한 마리 먹는데 혼자서 다리 두 쪽 차지하는 사람이랑은 겸상하면 안 된다.

그리고 조용히 치킨만 먹었다. 서비스로 온 콜라도 마시고. 한우주는 콜라 대신 물을 마셨다. 날 따라서 비닐장갑으로 치킨을 깨작이더니 두 조각 정도 먹고 만다.

왜 저렇게 조금 먹어? 신경 쓰여 물어보니 배부르단다. 1인 1치킨 국룰 아니야? 덕분에 내가 거의 다 먹다시피 했다.

한우주는 내가 다 먹을 때까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볼일 없으면 자기 방으로 좀 가든가…. 불편하게.

결국, 내가 먼저 말을 붙였다. 궁금한 것이 꽤 남아 있었다.

“야, 한우주.”

“응.”

“너 인하성 어떻게 한 거야?”

“…….”

“다른 뜻 없어. 궁금해서 그래. 시계는 잃어버렸잖아.”

한우주는 말없이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의자를 한 번 당겨 앉았다.

“그쪽에서 돈으로 합의하자고 했다며.”

“응.”

“그래서 비슷한 방법으로 누른 것뿐이야.”

…그러니까 돈으로 해결하셨다? 내 시선이 흐려진 걸 느꼈는지 한우주가 서둘러 말을 이어 간다.

“확실히 말해 두는데 불법적인 일은 안 했어.”

“그래?”

“…아닌가.”

“지금 나랑 장난해?”

“협박 정도는 했을지도 몰라.”

어이가 없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뭘 한 건데.”

“음….”

한우주가 눈을 내리뜬 채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인하성한테 직접 뭘 한 건 아니야. 학교를 조사한 거지.”

“어떤 걸?”

“야구부.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닐 것 같아서.”

“…그래서 어땠는데?”

“한두 건이 아니던데. 선수 폭력 건 덮고 넘어간 일.”

와, 쓰레기 학교.

“마음먹고 찾으면 어려운 것도 아니라. 피해자는 여럿 있고, 가해자 중에는 프로 선수도 있어서.”

와, 미쳤나.

“그런 증거를 모은 다음에….”

“…다음에?”

“…학교를 협박했을 뿐이야.”

“뭐?”

“…….”

“뭐라고 협박했는데?”

“인하성 처리 안 하면 외부에 폭로하겠다고.”

“아.”

“네 이름 댄 건 아니고, 나도 맞았잖아. 그거랑 이거저거 엮고 보니 징계 주기엔 충분하던데.”

“…인하성 걔는 네가 한 짓 알아?”

“짐작은 하고 있겠지. 오늘 반까지 찾아왔으니까. 그래 봤자 심증뿐일걸. 내가 직접 한 일은 없거든.”

돌겠다.

여기까지 듣고 나니 또 다른 고민이 생긴다. 낮에 본 인하성은 열받다 못해 맛이 갔던데. 그 자식은 한우주가 벌인 짓이라고 확신하고 있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인하성이 보복하러 오면 어쩔 거야?”

“생각 안 해 봤어.”

“…걔라면 분명 보복하려 들걸. 어차피 선수 생활 물 건너간 거, 감옥에 가든 말든.”

“그럼 대비해야겠네.”

나는 불안해 죽겠는데 한우주는 천하 태평한 얼굴이다.

“겁먹어서 지레짐작하는 거 아니야. 진짜 무슨 짓 벌일 거라니까.”

“지레짐작한다고 생각한 적 없어.”

미치겠네. 뭘 믿고 저러는 거야. 부자든 아니든 잘못 맞으면 골로 가는 건 똑같잖아. 피부가 강철인 것도 아니고.

…아랫입술을 잘근거린다. 어디 보호 요청 못 하나. 인하성이 근처에 못 오게.

“조현우.”

“…어, 왜.”

“그러다 피 난다.”

까딱하면 너도 피 흘리게 생겼다고 이 자식아…. 남의 속 타들어 가는 건 모르고. 피곤함에 눈가를 꾹꾹 누른다. 한우주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먹은 걸 정리했다. 여전히 식탁 앞에서 끙끙대는 나를 보곤 맞은편에 다시 앉는다.

“조현우.”

“응.”

“나도 궁금한 거 있어.”

“…뭔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뭘?”

“인하성에 대한 거.”

…어라.

“방금도 그렇고, 저번 주에 인하성에 관해 물었을 때도.”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던 태도를 거뒀다. 내게 묻는 한우주의 눈빛은 깊고 진중했다.

“굉장히 자세히 알고 있던데. 원래 알던 사이라고 하기엔 인하성은 네가 초면인 양 굴고.”

“…….”

“너는 인하성만 나타나면 겁먹어서 아무것도 못 하잖아.”

마른침을 삼켰다. 변명할 거리를 찾아야 하는데 머리가 안 돌아간다.

“…인하성이랑 뭐야?”

예전에 한 말을 기억하고 다시 물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모른 척 의연하게 구는 것도 안 된다. 시선이 흔들리는 게 느껴진다.

한우주와 눈을 맞출 수조차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랬다간 속마음이 낱낱이 읽힐 것만 같았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선호작품 등록/취소알림 등록/취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