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내가….”
겨우 낸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린다.
“학생 야구 팬이라서….”
“…….”
하여튼 변명 한번 더럽게 못한다. 한우주가 바보도 아니고 이런 어설픈 말을 믿겠냐. 한우주는 말이 없다. 침묵이 등을 떠미는 것만 같다.
“그, 어쩌다 보니 알게 된 게 전부야.”
“…그래?”
“떠오르는 거 아무거나 둘러댔을 뿐이라 틀린 정보도 꽤 있을 테고….”
“왜 둘러댄 건데?”
“…네가 물어봐서?”
“조현우.”
한우주가 이름 석 자를 불렀을 뿐인데 몸이 움츠러든다. 이젠 식은땀이 다 난다. 손바닥 축축해서 기분 나빠. 이 상황에 무슨 말을 해? 가장 그럴듯한 말이 ‘나 인하성 스토커야.’ 이따위다. 이 상황 모면하겠다고 그 미친놈 스토커가 되긴 싫다.
“고개 들어 봐.”
움직임이 무슨, 기름칠 안 한 녹슨 로봇 같다. 삐걱, 삐걱 내 목에서 날 리가 없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런데,”
한없이 검고 검은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내가 고개를 떨구고 말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놓을 때부터 죽, 저런 눈으로 나를 봤을 걸 생각하니 어쩐지…, 숨이 막힌다.
“거짓말은 하지 마.”
한우주의 말이 경고처럼 들린 것은 분명 나의 착각일 것이다. 제 발 저려서 그런 거겠지. 아마.
불길한 마음이 스쳤다가 사라진다. 나는 금방 안정을 찾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한우주가 굳은 표정을 풀었기 때문이다. 어이없네. 한우주 반응에 기분이 이렇게 극과 극을 달릴 일인가?
“생각난 김에 물어본 거야.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고.”
한우주가 태연히 말한다.
“어쨌든 넌 인하성 싫어하잖아.”
물음도 아니고 확신하는 투다.
“응. 싫어해.”
당연한 말을. 내 대답 끝에 한우주는 완전히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나는 되레 아까의 불편함이 다시 떠올라 피곤했다. 한우주는 조현우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군다. 물론 그럴 리가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사실 진짜 궁금한 건 따로 있어.”
건네 오는 말에 몸이 다시금 바짝 긴장했다. 물어볼 게 또 있다고? 조현우 영업 종료 팻말 만들어서 목에 걸어 버리고 싶다.
“뭔데…?”
이것만 답하고 올라가서 자 버려야지. 곤란한 거 물어보지 마. 제발.
“아까.”
“응….”
“왜 안 나갔어?”
“응?”
이게 뭔 질문이야.
“음…, 네가 가지 말라고 했지?”
“그랬지.”
“그게 이유일걸.”
“…내가 뭐라고 하든 무시하고 그냥 가 버릴 수도 있는 거잖아.”
그렇긴 해. 원래 계획은 그랬지. 조현우는 한우주 행동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면 곤란하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거리를 두어야 했다. 내가 괜히 집 나가려던 게 아니다. 합리적인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도 나가지 않은 이유. 한우주가 붙잡았으니까. 논리라고는 먼지 한 톨만큼도 없고 합리적이지도 않았다.
그 이상의 것, 한우주를 무시하지 못한 까닭. 생각에 잠긴 채 천천히 말을 이어 간다.
“글쎄. 한우주 너…, 혼자 있는 거 싫어하잖아?”
“…….”
“그게 신경이 쓰였나….”
“…….”
“…아.”
잠깐만. 이건 좀. 방금 말은 없던 것으로 해야겠다. 세이브 파일 로드하자. 아니, 애초에 여기에는 세이브고 로드고 없었지? 미친 게임. 미친 안태원.
“그, 나 좀 피곤해서. 자러 가 볼게.”
도망가자. 밖으로 나가면 붙잡을 거 같으니까 방으로 도망가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런데 망할, 너무 급하게 일어났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의자가 넘어진다.
“미, 미안!”
오늘따라 왜 이래. 아니, 원래 이랬나? 몰라. 난리 났다. 허둥지둥 의자를 일으킨다. 걸음을 서둘러 방으로 향한다.
“조현우.”
계단을 오르려는데 한우주가 날 부른다. 한우주는 여전히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내 쪽은 보지도 않고 요지부동이길래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혹시 나 불렀어?”
“응.”
잘못 들은 게 아니구나. 얜 또 이런다. 불러 놓고 말이 없다. 나는 한우주가 혹여 이상한 질문을 할까 봐 벌벌 떨었다. 사실 질문보다 무서운 건 나의 입방정, 그리고 헛소리다.
“…하, 한우주?”
말할 거 있으면 빨리하고 보내 줬으면. 계단을 오를까 말까 주춤한다.
“그냥. 잘 자라고.”
한우주는 끝까지 등을 돌린 채로 있었다. 긴장이 무색하도록 평범한 인사를 건넨다.
“응…. 너도 잘 자.”
그대로 방에 뛰어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침대에 고개를 박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다.
뭐? 가까운 사이가 되면 곤란해?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안태원, 이 자식 생각이랑 행동이 아주 따로 논다?
한우주가 혼자 있는 걸 싫어해서, 그게 신경 쓰여서 못 나갔다고. 미쳤나…? 나야말로 아주 한우주 중심으로 행동하잖아. 한우주는 그거지. 혼자 있기 싫고 외로운데 마침 옆에 있는 게 조현우라서…. 누가 봐도 내가 더 심하네.
이래서 정이 무섭다. 그러게 애초에 정 붙이면 안 됐다니까. 큰일이다. 한우주가 조현우랑 우정 놀음 하느라 연애 안 하면 어떡해?
생각해 봤자 머리 아프다. 이건 미연시잖아.
…방법은 하나뿐이다.
얼른 엔딩 보자.
목표 대상은 여전히 같다.
서연준.
어제오늘 한우주와 분위기가 좋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다른 공략캐보다는 나을 것이다. 윤태현, 임도윤 쪽을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하다.
마침 서연준과 주말 약속도 잡았겠다, 앞으로는 더 적극적으로 접점 늘리고 호감도 꾸준히 쌓으면 되겠지. 이 게임에서 가장 힘든 건 초반, 루트 진입 단계이다. 루트 한번 타면 엔딩 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한우주도 다른 공략캐들도 한번 마음 주기 시작하면 정도를 모르고 야단법석이니까…, 그때 가선 한우주도 조현우가 뭐 어떻든 신경 쓸 겨를도 없을 거다. 우정보단 사랑이 먼저일 거 아냐. 미연시 주인공이면 그래야지.
현시점에서 불안한 점을 하나 꼽자면 서연준 관련한 정체 모를 이벤트들이 잔뜩 쌓여 있다는 것. 후에 어떤 위험 요소로 다가올지 알 수 없지만,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공략 캐릭터 정했고, 계획도 얼추 세웠고. 마음이 조금은 편해야 할 텐데 되레 가라앉는다.
아니, 왜 속까지 울렁거려. 아까 먹은 치킨이 얹힌 건가. 왜지? 여태 너무 긴장해서? 이 약해 빠진 위장과 작별하기 위해서라도 엔딩을 봐야…. 아오, 이젠 골까지 울려. 조현우 몸으로 안 아프고 건강한 날이 있긴 한 거냐.
앓는 소리가 컸나 보다. 새벽에 한우주가 찾아와서는 물과 소화제를 줬다. 아플 때 챙겨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순수하게 기뻐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 얄궂다.
상체를 일으키는데 시야가 핑 돈다. 한우주 어깨를 잡아 몸을 지탱한다. 침대맡에 기대어 앉아 속이 진정되길 기다린다.
한우주는 아예 책상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자리를 잡았다. 금방 갈 생각이 없는지,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가져온다.
내가 아예 괜찮아질 때까지 곁에 있을 생각인가? 진짜 미안한 말인데, 날 위해 하는 행동인 거 아는데, 그저 원망스럽다. 이러니 내가 정을 떨칠 수가 없다.
“야, 한우주.”
“응.”
“난 신경 쓰지 말고 네 방 돌아가서 자….”
“졸리면 가려고.”
말하고는 책을 펼쳐 읽는다. 가만 보면 한우주는 집에서 하는 일이 자거나, 책 읽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방해하기 싫은데 뭐 읽는지 궁금하다. 심심하기도 하고.
“한우주. 바빠?”
“안 바빠.”
“뭐 읽는지 물어봐도 돼?”
한우주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책을 덮어 표지를 보며 대답했다. 몇 번을 읽은 것인지 책이 너덜너덜하다.
“음악 치료학?”
음악…. 맞다, 이 방에 악기 많았지. 게임하면서 한우주가 뭐 연주하는 건 못 봤는데.
“어려운 거 읽네.”
“그런가. 그냥 있는 거 아무거나 집어 온 거라.”
“한우주 너 음악 해?”
“아니.”
“악기 다룰 줄 아는 거 있어?”
“없을걸.”
그러면 저 책도, 벽장에 가득한 악기도 한우주 게 아닌가. 모른 채 넘어간 의문이 다시 떠오른다. 이 방의 주인은 누구일까?
“그럼…, 이 방 누구 거였는지 물어봐도 돼?”
“…….”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저번에 너 없을 때 심심해서 방 구경을 좀 했거든. 그런데 누가 쓰던 방 같아서….”
“…….”
한우주는 입을 꾹 다문 채 묵묵부답이다. 어째서지, 물어보면 안 되는 거였나?
“벽장에 악기도 막 있고…?”
“음….”
“미, 미안?”
“뭐가?”
“마음대로 막…, 둘러봐서?”
“뭘 새삼스럽게.”
한우주가 눈으로 방을 살핀다. 감정을 읽기 어려운, 복잡한 시선이다. 구태여 짐작하자면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방 주인은 없어. 여길 몇 년 동안 안 썼더라….”
“엄청 깨끗하던데.”
“청소는 꾸준히 했으니까.”
잔잔한 시선이 다시 내게 안착했다.
“누가 쓰긴 했어. 한 5년 전쯤에.”
“꽤 됐네.”
“응.”
혹시 내가 곤란한 걸 물어봤나. 그렇다고 하기엔 불쾌하다거나, 불편한 낌새는 아닌데. 한우주는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말했다.
“어머니 방이야.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같이 안 살아.”
“…….”
“딱히 숨기려고 한 것도 아니고 말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신경 쓰지 마. 편하게 써도 돼.”
“…….”
혹여 한우주가 내 당혹감을 읽을까 싶어 서둘러 고개를 숙인다. 아, 젠장. 그렇구나. 한우주 어머니가 쓰던 방이라고?
한우주 어머니라면 그 사람이잖아. 한우주 두고 도망쳐서 여태 연락이 없는….
한우주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아니다. 분명 대수로운 일이다. 내가 오기 전부터 말끔히 정리되어 있던 것, 방 주인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둔 것, 몇 번을 반복해 읽어 너덜너덜한 책들, 별게 아닐 리가 없다.
그제야 한우주의 복잡한 시선에 담긴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리움과 기다림. 시간과 함께 무뎌졌으나 차마 지울 수 없는 것.
모르는 게 나을 것을 알아 버린 기분이다. 고작 조현우에게 털어놓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우주의 눈동자 너머, 메울 수 없는 감정의 골을 마주한다. 이걸 어떡하지? 답 없는 고민이 머릿속에서 마구 날뛴다.
한우주랑 거리 둬야지, 다짐해 놓고 몇 번을 실수하는지 모르겠다. 안태원 멍청한 놈.
“몸은 좀 어때?”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몸 상태를 묻는 말에 나의 정신은 더욱 혼미해졌다. 괜찮다는 애 앞에서 유난스럽게 굴고 싶지는 않아, 애써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이제 좀 괜찮아.”
“그래. 누워서 쉬어.”
“응….”
“괜한 생각 하지 말고 얼른 자.”
“…너도 네 방 가서 자.”
한우주는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가려나 보다, 싶었는데 방 불을 끄고 다시 돌아와 곁에 머무른다. 잠 오면 간다더니, 아직 안 졸린 건가. 나는 눈을 꾹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사실 나도 안 졸리다. 졸렸는데 방금 다 깨 버렸다.
‘괜한 생각 말라고…? 그게 되냐.’
생각을 안 할 수가 있나. 조현우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그럴 수가 없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때때로 무거운 가시 공이 마음속을 구르는 것만 같다. 솔방울인 줄 알고 들인 뒤에는 이미 늦은 것이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한우주에 대해 아는 것이 무섭다고 생각했다. 깊이 관여해서는 곤란하다. 어차피 게임 캐릭터잖아, 하는 마음 뒤편에서 연민이 싹을 틔웠다.
이성이 먼저 잠들고, 감성이 차오르자 고요히 떠오른 생각이 곁을 맴돌았다. 한우주와 어머니는 사이가 좋았을까. 어머니는 어떤 분일까. 굳이 내가 알 필요 없는 것일 텐데도.
망할 호기심은 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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