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복도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 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오재영이라든가, 걔 친구라든가, 다른 누군가가 껴들어서 상황 복잡해지는 건 질색이다.
“왜, 무슨 일이야? 괜찮은 거 맞지?”
서연준은 내가 퍽 걱정스러운 눈치다. 미안하지만 한가롭게 안부를 주고받으며 인사할 만큼 여유롭지 않다. 곧장 본론을 말했다.
“한우주 말이야.”
“아, 응.”
“어제 인하성 그렇게 되고 더 욕먹고 있는 것 같아서. 소문이 안 좋아. 사람 하나 묻고도 멀쩡할 거라느니….”
서연준의 표정이 차게 굳더니 제 미간을 꾹꾹 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이번 일은 잘잘못 가릴 것도 없는데. 그냥 씹어 댈 게 필요한 거겠지.”
“허지훈 얘기도 계속 나오더라.”
“그건…, 한우주 쪽에서 흔한 변명 한마디도 안 하니 그냥 다들 한우주 잘못이라 멋대로 결론지은 것 같아.”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러고도 답답한 듯 제 목덜미를 매만지며 이어 말한다.
“이제 좀 잠잠한가 싶었는데 인하성 때문에 괜히 같이 끌려 나와서는.”
그러니까, 이 상황. 한우주의 평판이 허지훈과 연관이 깊다는 거지?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마음 같아선 서연준을 짤짤 흔들며 아는 거 전부 불라고 하고 싶다. 물론 그럴 수는 없다. 적당한 말을 찾아 건넨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듣는 내가 답답해 죽겠어.”
“글쎄….”
서연준이 말을 끈다. 빨리 뭐든 얘기해 봐. 시간 가잖아. 이러다 종 친다고.
“허지훈 곧 퇴원하지 않아? 그럼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겠지. 나보다는 현우 네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응?”
“허지훈 너희 반이잖아.”
“아, 응. 그렇지. 나라고 특별히 소식 들은 건 없어서.”
“하긴. 대놓고 떠들 만한 일은 아니니까.”
“응. 그러네.”
허지훈이 우리 반이었구나. 전혀 몰랐다. 서연준이 진지한 투로 마저 이야기했다.
“어쨌든 난 한우주가 그랬을 거라 생각 안 해. 다들 걜 모르고 오해하는 거지.”
그런 일, 한우주, 허지훈, 입원…. 허지훈이 입원한 일과 한우주가 관련이 깊은 건 알겠다. 허지훈이 입원하면서 한우주 평판이 바닥을 쳤고…. 둘이 주먹다짐이라도 한 건가?
조현우랑 허지훈도 관계가 깊은 것 같던데.
자꾸 연락하라고 옆에서 보채는 걸 보면 아마 가까운 친구일 테고. 아, 모르겠다. 이건 그냥 허지훈이랑 한번 얘기해 보면 해결되겠지.
오재영이나 강준희한테 잘 둘러대서 허지훈 연락처를 받아 내는 게 낫겠다. 음, 방금 일 생각하면 오재영이 내 말을 순순히 들어줄지 모르겠지만….
생각이 줄줄이 이어진다. 한우주 연애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히 힘든데 뭐 이렇게 일이 많은지 모르겠다. 남의 몸으로 지낸다는 게 참 쉽지 않다.
“괜찮아?”
서연준이 걱정스레 묻는다. 내 표정이 안 좋아 보였나? 알아볼 것이 산더미라 머리가 아프긴 하다.
“응. 괜찮아. 이제 돌아가자. 종 치겠다.”
서연준에게 더 물을 것은 없다. 정말로 시간이 없기도 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 6반에 먼저 도착했다. 서연준은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말고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도 현우 너 있어서 다행이야.”
“뭐?”
“한우주 말이야. 걔야 워낙 사람 귀찮아하니까…. 다가가기 힘든 면이 있잖아. 그래서 더 오해 사는 것 같기도 하고.”
“…….”
“괜찮은지 묻고 싶어도 나한테는 뭘 말할 생각을 않더라.”
더 적극적으로 물어보라고. 뭐라도 캐내서 한우주 마음 좀 어떻게 하란 말이다. 너 공략 캐릭터잖아.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아…, 아니야.”
“응?”
“내심 많이 의지하고 있을 거야.”
“음….”
뭐야 이 미적지근한 반응.
“그러니까 자주 와서 한우주랑 얘기도 하고 그래.”
“요즘 좀 귀찮아하는 거 같아서.”
“아니야!”
내 외침에 서연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한우주가 조금 시큰둥하다고 포기하려는 거 아니지? 너 그렇게 끈기 없는 자식 아니잖아. 집착하고 사람 가두고 별 난리 다 피우면서 왜 벌써 약한 소리야. 답답하게!
“나랑 한우주랑은 서로 안 지 이제 고작 일 년이잖아. 너랑 한우주는 훨씬 오래됐고. 알아 온 시간 무시 못 해. 일 년 인연 그거 별거 아니다. 반 갈라지면 금방 멀어지거나….”
“어….”
“내 말은, 네가 한우주 좀 잘 챙겨 주라고. 나보단 나을 거니까.”
“그, 그런가.”
삽질하지 말고 알아서 잘 좀 하자. 안 그래도 한우주가 연애랑 벽 쌓으려는 거 같아서 불안해 죽겠는데 서연준까지 이러면 진짜 곤란하다. 부탁이니 너라도 들이대란 말이야.
짧은 침묵이 지나고 수업 종이 쳤다. 경쾌한 음이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서연준도 나도, 서로 눈만 끔뻑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서연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현우야.”
“응?”
“한우주는 널 편하게 생각하고 있을걸.”
“…….”
“현우 너는 그렇게 말했지만, 내 느낌은 그렇네. 한우주 앞에서는 일 년 인연이 뭐랬더라…, 나한테 했던 말은 하지 말아 줘. 부탁할게.”
“어…?”
“걔 삐지면 네가 더 귀찮을 거야. 그래서 그래.”
“…….”
“참견 같았으면 미안. 그럼 또 보자.”
서연준은 말을 마치고 교실에 들어가 버렸다.
…도대체 뭐야.
서연준은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하지? 질투하는 낌새는 아니었다. 정말 한우주랑 나 생각해서 말한 거 같은데 그게 더 신경 쓰인다.
서연준 얘는 한우주랑 사귈 수 있는 거 맞아? 서연준 너 한우주한테 마음 있긴 한 거지? 당장은 없더라도 앞으로 생길 수 있는 거지?
예감이 안 좋다. 게임하면서 알게 된 서연준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서연준과 애매하게 관계를 쌓고 다른 캐릭터 루트를 타 버릴 경우, 서연준은 한우주를 깔끔히 포기한다. 사랑에 눈이 멀어 맛이 가기 전까지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좋은 친구이긴 하다.
왜 지금 이런 걸 떠올리느냐? 방금의 서연준이 게임에서 한우주를 포기할 적의 모습과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아닐 테지만.
한우주는 지금 루트 탄 캐릭터가 없다. 루트는 무슨, 공략 캐릭터에게 사랑 비슷한 감정 한 톨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요즘 예민해서 그래. 걱정이 많아서 별걸 다 착각하고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아무렴. 착각이 맞을 것이다. 서연준과 한우주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그래야만 한다.
“수업 시작했는데 여기서 뭐 하는 거니?”
“아…. 이제 들어가려고요.”
요즘 자꾸 정신을 놓고 다닌다. 6반 수업 온 선생님이 말을 걸 때까지 복도에 멀뚱히 서서 잡생각이나 하고 앉았다.
서둘러 교실로 돌아간다. 한우주는 아직도 졸고 있다. 고작 쉬는 시간, 그 짧은 시간 동안에 겪은 일을 생각하니 억울해 죽겠다. 한우주 뒤통수 한 대만 치고 싶다.
겨우 참고 자리에 앉았는데 생각할수록 열이 오른다. 한우주 네가 괜히 서연준한테 까칠하게 굴어서 이런 거 아니야.
“야, 한우주. 일어나! 수업 시작했어!”
한우주가 수업 시간에 자는 건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에서 지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라, 굳이 깨운 적 없다. 오늘은 괜히 심통이 나서 잠을 깨우는 척 한우주 등을 몇 대 때리고 서둘러 앞을 바라봤다. 어차피 한우주는 이 정도로 꿈쩍 안 한다. 잘만 자겠지.
그리고 후회했다.
맹세코 진짜 살짝 때렸는데. 안 깰 줄 알았는데. 평소에 깨울 땐 더럽게 안 일어나면서 이번엔 귀신같이 알아채고 일어나더라. 억울한 일이 또 하나 적립됐다.
한우주는 수업 시간 내내 손가락으로 내 등을 꾹꾹 누르며 나를 괴롭혔다. 난 딱 한 번 했는데 이렇게 치사할 수가 있나?
참다못한 나는 공책 가장자리를 찢어 분노의 쪽지를 휘갈기고 대충 접어 뒤로 툭 넘겼다.
10초도 안 돼서 종이가 도로 넘어온다.
「야 한우주 유치한 놈아 그만 좀 해」
「먼저 시작한 게 누군데」
다시 적어 넘긴다. 종이가 또 돌아온다.
「내가 뭐 했다고? 난 아무것도 안 했어」
「거짓말쟁이」
그 뒤로도 한참을 쪽지를 넘기고 받았다. 나중엔 쓸 자리가 부족해져 공책을 몇 번이나 더 찢어야 했다.
…그러다가 선생님께 들켰다. 짜증 나는 건 나 혼자 걸리는 바람에 딴짓한다고 꾸중을 들었다는 것이다. 나만 한 거 아닌데. 한우주 얘도 했다고 고자질하고 싶은 걸 겨우 참아 냈다.
다음 쉬는 시간은 한우주에게 성질을 부리는 데 다 써 버렸다. 그러다 수업 종 치고서야 생각났다. 아, 맞다. 서연준. 한우주랑 붙여 놔야 하는데.
점심시간에 냅다 매점으로 향하는 한우주를 붙잡고 6반에 가서 서연준을 데려왔다. 그렇게 같이 밥 먹은 게 전부다. 다행히 한우주가 또 시비를 건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사이가 나빠 보이지는 않지만….
“현우야, 어디 가?”
“어? 응? 아니. 아무것도. 스트레칭하려고.”
이것들이,
“조현우 뭐 하냐.”
“…나 다 먹어서 먼저 가려고.”
“나도 다 먹었는데.”
“너는 연준이 좀. 하…, 아니다. 그냥 있을게.”
나를 안 놔준다.
둘이서만 좀 있어 봐. 나 좀 빼 달라고. 탈출을 시도하는 족족 걸리고 붙잡히고 말았다. 어이가 없다. 연애를 둘이 하지 셋이 하냐?
상황이 이러다 보니 둘 사이에 진전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개 빡쳐….
오후 시간은 그냥…, 아무 일 없이 흘러갔다. 6반 오후 시간표가 통으로 이동 수업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건진 거라곤 허지훈 얼굴 정도.
허지훈 얼굴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출석부에 붙은 증명사진을 확인한 게 전부다. 한우주랑 끝자락 자리를 나란히 차지하고 있더라. 음, 한우주 사진 잘 나왔네. 그래도 실물이 더 낫다.
‘……안태원 정신 차려라.’
정신 차리고 다시 살피자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한 명 보였다. 눈매고 눈썹이고, 코나 얼굴형까지 전부 날카로워 무표정으로 있으니 험악해 보인다. 와, 오재영이랑 강준희 둘이 난리를 치더니 진짜 성깔 있어 보이네.
‘허지훈 연락처는…, 내일 알아봐도 늦지 않겠지. 조만간 연락하든지, 직접 찾아가든지.’
그렇게 허지훈에 대한 것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당장은 생각할 거리를 더 늘리기는 싫었다.
왜냐하면 오늘의 가장 큰 고비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놈의 인하성. 저녁이 다가오는 게 두려웠다. 하지만 내 감정이 어떻든 시간은 공평히 흘러간다.
학교를 마치고, 병원을 가고, 저녁을 먹는다. 평화로운 일상이 지나간다. 저 앞에서 마주하고 싶지 않은 비일상이 굳이 배웅을 나와 마음을 어지럽혔다.
불안을 못 이기고 한우주에게 묻는다. 너 무슨 대책이라도 있어?
바보 한우주가 답한다. 글쎄.
한우주 진짜 짜증 난다. 인하성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집에 가둬 버리고 싶다. 오피스텔 보안 장난 아니던데. 그냥 여기 영원히 있으면 인하성 볼 일도 없겠지.
화가 섞인 터무니없는 생각을 물린다.
그리고 머지않아 밤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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