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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30화 (30/150)

30화

한우주가 나갈 채비를 하기에 곁을 따르려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왜 당연히 함께 갈 거라 여긴 걸까? 내 앞을 막아선 한우주를 마주하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넌 집에 있어.”

한우주는 애초에 날 데려갈 생각이 없었다. 하기야 나 같아도 팔에 깁스한 놈 데려가기 성가시겠다. 여기선 순순히 물러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한우주를 혼자 보내선 안 될 것만 같았다.

“인하성 안 보이는 곳에 있을게.”

“와서 뭐 하려고?”

할 수 있는 거? 있을 리 없다. 방해나 안 되면 다행이다. 한우주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나 목소리가 단호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번호를 치고 핸드폰 액정을 보여 주었다.

「112」

“혹시라도 너 위험할 거 같으면 신고하게.”

“알아서 할 수 있어.”

한우주 역시 만만치 않다. 어쩔 수 없지. 여기선 그냥 물러나는 게 맞겠다.

…하고 넘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

“절대 안 끼어들고, 안전한 곳에서 보기만 해도 안 돼?”

“여기가 제일 안전해. 왜 굳이 따라오려는 거야.”

그러게. 왜 그럴까. 아주 잠깐의 고민으로 답을 찾는다. 진심은 얕은 곳에 묻혀 있었다.

“…걱정돼서 그래. 혼자 보내기 싫어서.”

시원하게 퇴짜 맞았다.

그래도 한 10초는 고민하길래 희망을 품었는데 대답은 ‘안 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바로 포기하지 않고 끈질길 정도로 매달렸다. 쫓아가진 않을 테니 어디서 만나는지, 언제까지 올 건지만 말해 달라. 늦는 거 같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다. 이렇게까지 매달리는데 설마 그냥 갈 건 아니지?

“안 돼. 자정 전에는 올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있어.”

실랑이 끝에 얻은 거라곤 단호한 거절의 말뿐이다. 대놓고 탐탁지 않은 티를 냈지만 한우주는 나를 개 무시하고 가 버렸다.

어떻게 신경 안 쓰겠냐고. 상대는 미친놈인데. 안 쫓아가겠다니까? 진짜 늦으면 신고만 할 거라니까? 한우주 나 못 믿나? 나쁜 놈.

아무래도 불안이 가시질 않는다. 한우주가 떠나고 아주 오래, 깊이 고민해 봤다.

한우주가 인하성과 몸싸움이 붙으면 이길 수 있을까? 아니.

한우주는 충분한 대책이 있어 보였는가? 글쎄.

인하성과의 문제를 대화로 원만히 해결할 수 있을까? 절대 아니.

…지금 몇 시지. 한우주 나간 지 두 시간 된 거 아니야?

「오후 10:07」

나간 지 5분 됐다. 이러다 한우주 돌아오기 전에 스트레스로 기절할 거 같다.

안 되겠다.

후드 집업을 걸치고 지퍼를 목 끝까지 잠갔다. 호신용이 될 만한 게 없을까. 집 안을 둘러봤지만, 별것이 없다. 프라이팬이 가장 쓸 만해 보일 정도이다.

핸드폰만 챙겨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장소만 제대로 알려 줬어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을 텐데. 아는 게 없으니 불안해서 가만 못 있겠잖아. 그러니까 이건 다 한우주 때문이다.

「메뉴」를 열고 「지도」 창을 띄웠다. 한우주를 닮은 도트 캐릭터가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한우주 추적 기능을 켜자, 화살표가 나타나 방향을 안내한다. 걸음 한번 더럽게 빠르네. 벌써 거리가 꽤 벌어졌다.

온갖 나쁜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사실 다 본 적 있는 것들이다. 묶여 있거나, 협박당하거나, 맞거나 하는 것들. 그렇다. 새삼스럽지만 이 게임은 피폐물이다. 주인공이 구르고 구르다 못해 너덜너덜해지는.

나는 아직 한우주의 그런 모습을 마주할 준비가 안 되었다. 언젠가는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당장은 아니다. 상대가 인하성인 건 더더욱 안 될 일이다.

걸음을 재촉한다. 어쩐지 길이 익숙하다. 아, 조현우 집 가는 쪽이잖아. 빌딩 대신 낡은 빌라와 주택이 늘어선다. 길은 점점 좁아지고 가로등의 간격은 넓어지기만 한다.

아스팔트가 깨진 골목, 더러운 골목, 좁디좁은 골목을 지나고 보면 한우주의 도트 캐릭터가 멈춘 장소에 도달한다. 이쪽은 재개발이 한창인지 건물 대부분이 철거되거나, 철거 과정에 있었다. 고장 난 가로등이 불규칙적으로 깜빡거린다.

…어떻게 이딴 곳에서 만나기로 할 수가 있어? 이거 그냥 마음먹고 사람 하나 끝장내려는 거 아니야?

모퉁이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어 근처를 살폈다. 골목의 끝, 막다른 곳에 인영이 보이는 것 같기도…. 어둡다. 잘 안 보여. 눈을 잔뜩 찌푸린 채 온 신경을 집중한다.

“아악!”

깜짝 놀라 제자리에서 튀어 오를 뻔했다. 뭐야, 누구 비명이야? 설마 한우주야? 어떡해.

한 걸음 내디딘다. 포장조차 안 된 바닥에 말라 굳은 흙과 돌부리가 널려 있었다. 그중 적당한 돌을 하나 집어 들었다. 혹시 몰라서….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

그대로 비명이 들린 곳을 향했다. 흐릿하게 겨우 보이던 형체가 시선 속에서 점차 선명해진다. 있다.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미친.’

발소리를 죽이는 것도 잊고 그대로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이 쓰러져 있다. 이럴 줄 알았어. 한우주 혼자 보내면 안 됐는데.

고통에 찬 신음이 가까워진다. 인하성 저 새끼 뭐야. 쟤 한우주 밟고 있는 거야? 이 개새끼가.

“아파?”

“씹….”

…잠깐.

걸음을 멈췄다.

“아픈 걸 알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이, 개새끼야.”

묵직한 타격음과 처절한 비명. 싸움도 무엇도 아닌, 일방적인 폭력이 눈앞에서 쏟아진다.

“내가 언제 말해도 된다고 했던가.”

무언가를 짓밟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린다. 소름 돋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그보다 선명히 귓가를 맴돈다.

“역겨운 벌레 같은 게.”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다가 툭, 돌부리를 건드리고 만다.

목소리의 주인이 고개를 돌린다. 눈이 마주친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서로를 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 나는 딱 그쯤에서 멈춰 서 있었다.

“…어?”

“…….”

기침 소리를 따라 아래를 내려다본다. 인하성이 널브러져 있다. 오른쪽 어깨에 발이, 그러니까 한우주의 발이 올라가 있었다.

한우주가 슬그머니 발을 치운다. 바닥에 운동화 밑창을 몇 번 문지르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선다.

다시 아래를 본다. 꿈틀거리는 게 인하성. 앞을 본다. 멀쩡히 서 있는 게 한우주. 곧 나를 보고 한다는 말이,

“…이제 막 집에 가려고 했어.”

방금과는 완전히 다른, 평소의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기분이 이상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들고 있던 돌을 바닥에 얌전히 내려 두었다. 그대로 주변을 둘러본다. 사람은 없다. 있으면 이상할 곳이긴 하다.

잠깐, 차 한 대가 보인다. 왜 이런 곳에 주차해 놓은 거야. 다가가 내부를 확인한다. 있다. 블랙박스. 한우주를 부르려 뒤돌았다가 기절하는 줄 알았다.

아니, 한우주 언제 따라왔어. 소리도 없이….

“…인하성 두고 와도 돼?”

“지금은 혼자 일어나기 힘들걸.”

아, 그렇구나….

“여기 차. 블랙박스 작동 중인데 어떡하지.”

“음.”

한우주는 대답 대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삐빅, 소리와 함께 차의 잠금이 풀린다.

“…….”

“…혹시 몰라서 둔 건데.”

곧이어 운전석을 열고 들어가 블랙박스를 만지더니 메모리 카드를 꺼내 와 내게 보여 준다.

“이젠 없는 게 낫겠다.”

그래, 이 차는 한우주가 준비한 거고, 목격자 없고 증거도 없구나. 인하성은 아파서 구르고 있고. 누가 봐도 한우주가 팬 거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묻는다. 상황이 이런데도 걱정이 가시지 않는 게 또 황당하다.

“한우주 너는…, 다친 데 없어?”

“없어.”

“인하성 쟤는 어떻게 해?”

“일어나서 집 갈 수 있을 정도로만 했어.”

“…인하성이 신고하면 어쩔 건데?”

“신고 못 할걸.”

“왜?”

“…….”

한우주는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사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그저 이 괴리감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아까 본 건 환상인가, 싶을 정도로 지금 내 앞에 선 한우주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목소리, 말투, 표정까지. 현실감이 없다.

한우주가 말한다.

“계속 여기 있을 거야?”

…그건 아니지. 이런 현장에서 일 초도 더 있고 싶지 않다.

돌아가는 길, 한우주는 묻지도 않은 설명을 해 댔다. 자정쯤에 저 차는 거둬 갈 거다. 그때까지 인하성이 여기 누워 있으면 인하성도 거둬 갈 거다. 쟤 크게 다친 거 아니다. 운동하다 다치는 부상이 더할 거다….

한우주가 단시간에 그렇게 많이 말하는 건 처음 봤다. 꼭 변명하는 사람같이.

나는 제대로 대꾸할 수 없었다. 한우주를 보고 당황한 것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나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 있었다.

내면의 이질감.

…나 왜 이렇게 멀쩡하지.

한우주에게 느낀 괴리는 생각보다 금방 모습을 감췄다. 그 자리를 안도감이 대신한다. 한우주가 다치지 않아 다행이다. 그 마음이 가장 컸다.

도덕관념이 고장 난 걸까? 그렇지만 이 게임에 나오는 다른 인물들에 비하면 한우주가 한 짓은 깜찍한 수준 아닌가?

…야, 안태원. 범죄자를 기준으로 잡으면 어떻게 해. 아니, 그렇지만 진짜 괜찮은 걸 어쩌라고. 없는 생각을 만들어 낼 수는 없잖아.

오피스텔을 향해 걷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머릿속이 바빴다. 그런데 한우주가 자꾸 말을 걸었다.

“웬만하면 대화로 해결하려고 했어.”

“어….”

“먼저 덤벼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야.”

“응….”

물론 그랬겠지. 인하성이랑 말이 통할 리가 있나. 묻고 싶은 건 다른 데 있었다.

“한우주 너 싸움 잘해?”

“인하성이 못하는 거지.”

“힘 더럽게 세던데.”

“힘만 세고 기술은 없더라.”

“…….”

그러니까 싸움 잘한다는 거잖아. 한우주가 또 묻지도 않은 걸 말하기 시작했다.

“딱 받은 만큼만 돌려줬어. 뺨에 멍들고 팔 깁스하는 게 다일걸. 아마도.”

“아마도?”

“…내가 의사는 아니니까. 정확히는 모르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인다. 한우주도 그 뒤로는 말이 없었다. 어둑한 골목에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울렸다.

돌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옆에 사람이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해 있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앞으로 몇 보만 더 걸으면 오피스텔이다. 곁의 발소리가 멈춘다. 시선이 뒤처진 동행자를 향한다.

어쩐 일인지 한우주는 자리에 멈춰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선 채로 바닥을 응시한다. 그래서 나도 걸음을 멈추고 한우주가 곁에 오기를 기다렸다.

한우주는 한참 뒤에야 떨군 시선을 들었다. 그에 어쩐 일인지,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 물으려고 했다. 한우주가 먼저 입을 연다.

“조현우.”

“응.”

“…너 화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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