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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31화 (31/150)

31화

의중을 알기 힘든 질문에 미간을 좁혔다. 공기가 묵직하다. 한우주를 중심으로 중력이 더 세게 작용하는 것만 같다.

화가 났냐는 질문에는…, 글쎄다. 나야말로 알고 싶다. 지금 이 감정의 정체가 뭔지. 분명 분노는 아닐 것이다.

“나 화난 것처럼 보여?”

“…아까부터 말이 없길래.”

한우주의 목소리에 힘이 없다. 이상하다. 얘가 왜 이럴까. 내 눈치 볼 필요 전혀 없는데.

몸을 돌려 한우주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묘한 거리감, 이대로 가만히 두었다간 사이에 벽이 놓일 것만 같았다.

한우주는 내가 다가가자 엉뚱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무, 가로등, 구름, 달, 나 빼고 세상 온갖 걸 다 볼 작정인가? 바로 코앞에 섰는데 이렇게 무시하기도 쉽지 않을 거다.

“한우주, 나 좀 봐.”

“…….”

안 본다. 이대로 가다간 없던 화가 생기겠다. 오른손을 뻗어 한우주의 소매를 잡는다. 두어 번 당기자 내 쪽으로 순순히 고개를 돌린다. 드디어 눈을 맞추었으나 그마저도 잠시였다. 한우주의 시선이 다시 땅으로 옮겨 간다.

숨겨 놓은 잘못을 들킨 어린아이 같다. 한우주가 원래 이렇게 애 같았던가? 기죽은 모습이 낯설고 마음에 들지 않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화난 거 아니야.”

나의 말에 한우주는 내리깐 눈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한우주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검게 일렁이는 외로움을 마주했다. 내가 한우주를 곡해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늘 그렇듯 객관적 사실보다는 느낌이 나의 마음을 장악해 버린다.

“그냥, 이거저거 생각할 게 많아서 그래.”

“…무슨 생각?”

“으음, 우선 너 무사해서 다행이다 싶었지….”

바로 몇십 분 전에 바닥에서 뒹굴던 인하성을 생각하면 웃긴 말이다. 그때의 나는 어땠더라. 동정 한 점이라도 가졌던가? 아니다. 인하성에 대해선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오히려 이번 일로 한우주가 곤란해질 것을 걱정했다. 지금이라고 다를 거 없다. 인하성이 어떻든 나와 무슨 상관인가.

인하성은 완벽히 내 선 밖의 사람이다. 한우주가 아무 대책이 없었더라면 병원 정도는 데려갔겠지만, 그건 상식과 도리에 의한 것이지 나의 마음 탓이 아니다.

반면 한우주는….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마음 쓰였고.”

말을 건네며 생각을 정리했다. 한우주가 단순히 게임의 주인공이라서 걱정한 것이 아니다. 내 선 안의 사람이니까, 다친 모습을 볼 자신이 없어서.

“그래서 네가 원망스러운 것도 있고…, 또….”

…왜,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지?

나도 모르는 사이 한우주가 들어온 것인지, 내가 한우주를 들인 건지. 어느 쪽이든 한우주는 내게 꽤 중요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안태원 한심해. 하여간에 적당히를 모르는구나.

정신없이 뒤엉킨 나의 속내를 들여다보자,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애초에 대충 답할걸. 여태 겁이 나서 생각이 많았다든지, 여전히 보복이 걱정된다든지. 지금이라도 웃음으로 얼버무릴 수 있을까?

늘인 말끝 뒤로 침묵이 찾아오고, 손등에 온기가 느껴진다. 소매를 쥔 손에 한우주의 손이 겹쳐 왔다. 아…, 이걸 아직 잡고 있었네. 민망하게….

황급히 손을 뗀다. 거의 동시에 한우주가 손목을 붙잡았다. 가볍게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뿌리치지도, 한우주에게서 시선을 떼지도 못했다.

“뭐 때문에? 왜 원망스러웠는데?”

원망의 이유? 그야 네가 멋대로 위험한 일을 벌였으니까. ‘혹시 몰라서 블랙박스를 두었다.’라는 것은 자신이 잘못될 가능성을 계산에 둔 것 아닌가.

한우주가 홀로 나간 뒤로 일 분이 한 시간 같았고, 내내 초조하고, 애가 탔다. 무사한 걸 확인한 뒤에는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놓였다. 다른 건 다 제쳐 두고, 한우주의 안전만이 나의 걱정이고 바람이었다.

한우주는 예측 못 할 언행으로 자꾸만 내 마음을 어지럽힌다. 그러니 원망스러울 수밖에.

저녁의 찬 바람이 불어온다. 공기와 맞닿은 피부에 한기가 든다. 봄의 안온함을 등진 4월의 밤은 냉정하기만 하다. …밖에 얼마나 있었더라? 한우주를 바로 보고 말한다.

“별거 아니야. 그냥 들어가자.”

“조현우.”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미간을 살며시 찌푸리자 한우주는 “…미안.” 하고 사과하며 손목을 놔주었다.

…아, 어색하다. 이런 분위기 싫다. 평소와 다름없는 투로 말을 붙인다.

“한우주 네가 그랬잖아.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며.”

“…….”

“지금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

말하기도 싫고, 더 깊이 생각하기도 싫다. 예감이 안 좋다.

한우주는 무언가 말할 듯하더니 이내 입을 다물었다.

짜증 난다. 나는 정말 신경 끄고 싶은데 그게 안 된다. 한우주 얘는 왜 이렇게 시무룩한 건데? 안쓰러운 마음에 가만히 두고 보기 힘들어, 결국 한 마디 덧붙이고 말았다.

“나 정말 화 안 났어. 내 기분 맞춰 줄 필요도 없고. 그냥… 신경 쓰지 마.”

찰나의 순간, 한우주의 잔잔한 눈동자에 거친 파도가 일었다. 억누른 감정이 물결과 같이 굽이친다.

“그게 마음대로 돼?”

“뭐?”

“신경을 쓰고, 말고 하는 거.”

“그건….”

한우주는 대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이미 신경 쓰이는 걸 억지로 돌려놓을 필요는 없잖아.”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조현우.”

누가 쟤 입 좀 막아. 그만 말하라고 해.

“너 얼굴이 빨개.”

“뭐? 그….”

몰라.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쩌다 대화가 이딴 식으로 흐르게 된 건지도 모르겠고, 이 상황의 모든 걸 이해 못 하겠다.

“추, 추워서 그래. 그러게 내가 아까 들어가자고 했지.”

분명 바람이 차긴 하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조금 전부터는 얼굴이고 몸이고 덥기만 했다.

저거, 한우주가 이상한 소리 해서 그래. 사람이 지나치게 당황하면 몸에 열나고 심장도 빨리 뛰고 그렇잖아.

다행스럽게도 한우주는 그 이후로 별말이 없었다. 그저 앞장서 오피스텔을 향했다. 한우주는 굳이 내 보폭에 맞추어 걸었다. 왜 하필 지금 이런 게 눈에 들어와 신경을 거스르는 것인지, 환장할 노릇이다.

***

한우주의 집에 도착하고 보니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곧장 방에 들어가 잠자리에 들 채비를 하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린다. 상대는 당연히 한우주다.

문을 열자마자 뭔 보고하듯이 할 말을 줄줄 읊더라.

“방금 연락받았어. 차 수거했고, 인하성 걔도…, 자리에 있길래 데려갔다고 하네. 크게 다친 건 아닐 텐데 피곤했는지, 바닥이 좋았는지. 어쨌든.”

“…….”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어.”

한우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장 뒤돌아 방을 나가 버렸다. 나와 오래 말할 생각 없다는 듯이.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허공만 바라보다가 급히 뒤를 쫓았다.

“야, 한우주!”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무시하고 제 갈 길 간다. 저게 진짜. 바짝 다가가 한우주의 옷자락을 잡자 그제야 한우주가 나를 본다. 아무런 말도 없이.

아, 나 왜 붙잡았지. 그야, 신경 쓰일 만한 일을 하니까. 답지 않게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부르는 말에도 반응 없고….

잠깐, 설마 한우주 삐진 건가?

“야, 한우주.”

“어.”

“…너 뭐야?”

“왜?”

“방금. 무슨 로봇도 아니고, 말하는 게….”

“네가 아까 그랬잖아. 나랑 말하고 싶지 않다며.”

“뭐?”

아니, 진짜 삐진 거야? 내가 언제 그렇게까지 말했어? 사람 말을 어디로 들은 거야? 눈치를 봤다가, 시무룩했다가, 삐졌다가,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치사하다. 거짓말쟁이.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며. 거짓말만 안 하면 된다며? 이런 식으로 나오기냐? 쪼잔해.

반듯한 한우주의 옷이 구겨져 주름진다. 무슨 상관이야. 한우주 옷 사정까지 봐줄 여력은 없다. 되레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 뭐라도 말해야 하나.

“…야.”

“왜.”

“아까 네가 물은 거. 들으면 어이없을걸…. 괜한 참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듣고 판단할게.”

숨을 크게 내쉰다. 그래, 하면 되잖아. 이 정도 말은 친구끼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괜히 의식하지 말자.

“나는 네가 이번처럼 위험한 일 벌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딱히 위험한 일 한 적 없는데.”

“했어. 인하성이랑 밤에 둘이서만 만난 거. 걔가 어떻게 나올지 정도는 알았을 거 아니야. 인하성이 흉기라도 들고 왔으면 어쩌려고 그런 거야?”

“어쨌든 안 다쳤잖아.”

“다칠 수도 있었어. 너도 고려하고 블랙박스 둔 거면서.”

조용히 내린 시선이 한우주의 옷자락에 안착한다.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거라는 기대는 안 한다. 괜한 참견 맞으니까.

그래서 말 안 하려고 한 건데. 억지 부리는 것처럼 보이기 싫다. 이상하잖아. 이번 일 가지고 한우주를 원망하고 말고, 뭐 해라, 뭐는 하지 마라. 내가 뭐라고 왈가왈부할 수 있겠어.

한우주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뜻밖의 대답이 들려온다.

“알았어.”

“어?”

“나 때문에 불안했다는 거지?”

“…아마도.”

“이제 위험한 일 안 할게.”

…뭐야?

속이 울렁거린다. 한우주는 이상하다. 지나치게 이상하다. 한우주와 있으면 나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다.

가까스로 고개를 들자 한우주는 줄곧 나를 보고 있었다. 한우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뭐야, 왜. 뭐가 좋다고 웃어? 삐진 거 아니었어?

“집이 좀 추운가.”

“…별로?”

“아니면 조현우 네가 유독 추위를 잘 타는 건가.”

“왜….”

“너 귀까지 온통 붉은데?”

“…….”

잡고 있던 옷자락을 곧장 놓았다. 거의 손을 털듯이 했다. 그대로 서둘러 방에 돌아가려는데 문고리가 이상하다. 왜 안 열려. 고장 났어?

바로 뒤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한우주가 손을 뻗어 문고리를 돌리자 방문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열려 버린다. 나 무슨 생쇼를 벌이고 있는 거냐? 미치겠네.

창피함이고 뭐고 느낄 틈이 없다. 그냥 머릿속이 새하얗다. 잠이나 자야겠다. 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려는데 한우주가 문고리를 잡고 안 놓는다.

“나 잘 거야.”

“할 말 생각나서.”

“피곤하니까 짧게 요약해 줘.”

한우주가 웃는다. 웃겨? 넌 이 상황이 웃겨? 난 문짝이든 뭐든 부수고 싶은데?

망할, 웃는 얼굴이 참 예쁜 한우주가 말했다.

“난 내가 감당 못 할 일은 안 해.”

“…….”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다 책임질 수 있어서 하는 일이니까.”

“갑자기 뭐야? 책임은 또 무슨….”

“요약하라며. 요약 끝이야. 잘 자.”

한우주가 웃는 낯으로 인사까지 마치고는 문고리를 놓고 자기 방으로 돌아간다. 저게 지금 날 놀리는 건가? 나는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소리쳤다.

“한우주 이, 넌 멍청이야!”

그대로 문을 걸어 잠그고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쓴다. 그리고 지칠 때까지 발길질했다.

뭐? 감당 못 할 짓은 안 해? 책임을 져?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는 함부로 장담할 수 없는 거 아냐? 사람 일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한우주는 바보에다가 오만하기까지 하다.

말도 행동도 재수 없고 짜증 난다. 나는 열이 잔뜩 올라서 속으로 한우주의 말을 따지고 들었다.

나를 집에 들인 일은? 막말로 내가 절대 안 나가겠다고 버티면 그것까지도 감당할 생각인가?

네가 벌인 일들 때문에 죄다 루트 삭제 뜨고 엔딩 못 보게 되면 어떻게 할 건데? 책임질 수 있어? 어떻게? 네 행동에 무엇이 달렸는지조차 모르잖아.

…그래. 모르는 게 당연하다. 한우주에게 화내 봤자, 소용없다는 거 안다. 한우주가 감당해야 할 것은 앞으로 공략캐들과 나눌 감정이다. 사랑이든 뭐든 간에 비슷한 거 하겠지.

그러니 엉뚱한 사람 앞에서 감당이니 책임이니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하나도 와닿지 않으니까.

짜증 난다. 괜한 사람 원망하는 나 자신이 싫다. 꼴사나워.

곱씹어 삼켜 낸 생각이 마음을 어그러트린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비밀스레 모습을 감춘 감정이 점차 크기를 더한다. 주인마저 눈치챌 수 없도록 고요하게, 어두운 밤 속에서 깊고 또 깊어진다.

이 순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조현우도, 한우주도, 이 게임도, 전부 개 같다는 거.

그냥 다 꺼졌으면 좋겠다. 내 인생에서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으면. 이 모든 게 지나치게 생생한, 길고 긴 악몽이었으면.

긴 밤 내내, 의미 없는 바람만이 내 곁을 지켰다.

디링-

「System: 인물 수첩이 갱신되었습니다. :: 공략 가능 인물 :: ???」

「System: 이벤트 목록이 갱신되었습니다. :: ??? :: ??? ??」

「System: 특수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이후로 ‘???’의 공략이 가능합니다.」

「System: ‘???’ 루트가 추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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