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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33화 (33/150)

33화

적어도 신경 쓸 일 하나는 사라졌구나. 그 이상의 골칫거리가 몇 개는 더 생겼지만…. 조금은 마음 놓을 수 있겠다. 적어도 인하성이 또 보복을 노리고 연락하거나 찾아오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야….

“왜, 할 말 있어?”

“아니. 아무것도.”

잠깐 흘끔댔을 뿐인데. 한우주는 귀신같이 시선을 알아차린다. 나는 괜히 얼마 전, 낯설 정도로 잔인하게 굴던 한우주가 생각나 눈을 피했다.

인하성이 아무리 바보라고는 해도 바로 얼마 전에 그 꼴을 당했는데 또 덤벼들지는 않을 것이다. 한우주는 내 생각보다 더 집요하고 가차 없는 면이 있다.

됐어. 인하성 일은 머리에서 지우자. 깁스를 풀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종종 생각나겠지만. 이거 한 지 얼마나 됐지. 이제 2주 조금 넘었나?

하교하자마자 어김없이 병원을 찾았다. 평소보다 사람이 많아 앉아서 차례를 기다렸다. 안 그래도 지루한 대기 시간이 유독 길어지는 바람에 나는 점점 더 졸려 왔다. 어떻게든 잠을 내몰며 눈에 힘을 주고 핸드폰을 노려본다.

「ㅎㅈ」

허지훈…. 도대체 왜 차단되어 있었을까. 아마도 답은 이 안에 있을 것이다. 그래, 지금 바로 이걸 누르면 된단 말이다. 수신 차단 메시지 함. 솔직히 보기 두렵다. 강준희까지 야단법석인 거 보면 분명 보통 성질이 아닐 텐데.

‘미뤄서 뭐 하냐.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엄지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만 같다. 눈 딱 감고 문자를 확인하려는데, 불쑥. 갑자기 눈앞에 한우주의 얼굴이 나타났다.

“와아악!”

“…지금 내 얼굴 보고 놀란 거야?”

한우주가 슬쩍 뒤로 물러났다. 아니, 그게 아닌데.

“그런 거 아니야. 네가 갑자기….”

“갑자기 아닌데. 몇 번 불렀어.”

“아, 응. 미안. 오늘 정신이 없어서.”

“알았어. 일단 들어가서 진료받아.”

“진료?”

고개를 돌려 앞을 확인했다. 병원 모니터 화면에 뜬 번호가 나의 차례를 알리고 있었다. 뭐야, 언제 벌써 시간이…. 허둥지둥 일어나 진료실로 향한다. 서두르지 말고 조심히 좀 가. 걱정 섞인 한우주의 말이 뒤따른다. 그마저도 꿈속에서 듣는 것처럼 아득히 느껴졌다. 아쉬운 발걸음을 떼며 다짐했다. 정말, 다음부턴 절대 밤새우지 말아야지.

***

이 지긋지긋한 깁스를 2주는 더 해야 한단다. 그래도 이 정도면 빨리 붙는 거니까, 방심하지 말고 건강에 유의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머지 말은 기억 안 난다. 졸다가 한 소리 들은 것 같기도 하고….

힘 빠진 걸음으로 병원을 나서는데 한우주가 택시를 불러 놨더라. 평소 같았으면 질색하며 사양할 것을 기꺼이, 고맙게 받아들였다. 오늘만은 걸어서 집에 갈 자신이 없었다. 꿈틀꿈틀 뒷좌석에 올라타고 나서야 무언가 허전함을 눈치챘다.

“…어? 잠깐만, 내 핸드폰.”

핸드폰이 없다. 병원에 두고 왔나? 혹시 몰라 가방 속을 뒤져 봤는데도 안 보인다. 뒤따라 탄 한우주가 묻는다.

“왜 그래?”

“핸드폰이 없어. 아까 병원 대기할 때만 해도 있었는데.”

한우주는 나의 말에 인상을 살짝 쓰고는 제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작게 몇 번 울리다가 곧, 익숙한 안내음으로 넘어갔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한우주가 앞 좌석을 향해 말하며 도로 나갈 채비를 했다. 길 잃은 정신이 한우주의 목소리에 겨우 제자리를 찾는다.

“찾아보고 올게. 여기 있어.”

“뭐? 같이 가.”

따라 일어나려는 순간, 오른편 어깨가 얕게 눌린다. 온몸이 나른하니 작은 힘에도 쉬이 저지당했다. 한우주는 내게서 손을 떼며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쉬어. 눈 좀 붙이고 있든지.”

“아니, 그건 좀….”

“금방 다녀올게.”

말을 마치자마자 택시 문을 닫아 버린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한우주의 뒷모습이 멀어진다.

…미치겠다.

진짜로 미련하고 멍청하다, 안태원. 정신을 아예 놓고 다니는구나. 이거저거 동시에 신경 쓰느라 힘 다 빼 놓고 제대로 한 것은 없다. 새로 추가된 공략 캐릭터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는 게 없고, 핸드폰은 잃어버리고. 허지훈에 대해선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했는데.

그냥 다 피곤하다. 눈가를 꾹꾹 누르다가 허리를 숙여 양손에 얼굴을 묻어 버린다. 온통 암흑뿐인 시야 속에서, 한계에 내몰린 의식이 고요히 침잠했다.

***

기분 좋게 묵직한 향이 잔잔히 다가온다. 차체의 미세한 덜컹거림이 몇 배는 크게 느껴져, 잇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허리를 감싼 단단한 힘에 나는 금방 다시 안정을 찾았다. 괜찮아, 더 자. 차분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보다 더 작은 소리, 얕은 숨과 규칙적인 박동이 다시금 나를 의식 아래로 끌어 내렸다.

하늘을 나는 꿈이라도 꾸고 있나? 둥실, 몸이 떠오른다. 나는 높은 곳이 싫다. 무섭잖아. 떨어지면 아플 거 아니야. 몸 전체를 지탱하는 어떤 것에 더욱 깊이 파고든다. 얼핏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꿈과 현실의 어중간한 경계에서 한참을 헤매었다. 감각이 하나둘 먼저 깨어났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부드럽고 푹신한 천의 아늑함, 그리고 익숙함.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내가 언제 침대까지 왔지. 가구에서 풍기는 은은한 목재 향과 책 냄새가 익숙하다. 나 병원에 있지 않았나? 아니, 택시에 있었던가.

……뭔가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은데.

아, 맞아. 핸드폰!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병원에 갔다가 택시 타고, 핸드폰 잃어버리고…. 그 뒤로 기억이 없다. 뭐지, 자면서 걸은 건가?

몸이 갑갑하다. 목 끝까지 채워 잠근 단추를 두어 개 풀어낸다. 잠깐만, 나 교복 차림으로 침대에서 잔 거야? 외출복 입은 채로 눕는 거 싫어하는데.

…얼마나 잔 걸까. 핸드폰이 없으니 시간을 알 수 없다. 창밖이 캄캄한 게 밤인 것 같다. 비척비척 걸어 방을 나서고, 바로 옆 한우주의 방문을 두드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한우주의 멀끔한 얼굴이 보였다.

“벌써 깼어?”

기분 좋아 보이네. 표정도, 목소리도 평소보다 밝다.

“응…. 지금 몇 시야?”

잠기고 갈라져 형편없는 목소리로 묻는다. 아, 잠 좀 깨라. 눈가를 살살 누르는데 바로 앞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한우주 웃어? 뭐가 그렇게 웃기냐. 웃는 얼굴이 보기 좋긴 하다.

“얼마 안 됐어. 저녁 9시쯤. 좀 더 자야 할 것 같은데?”

“아니야. 그보다….”

하품이 때를 못 가리고 나온다. 간신히 타이밍 맞춰 입가를 가렸다. 눈꼬리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길고 긴 하품을 했다. 이젠 대놓고 웃어 대는 한우주를 애써 무시하고 말을 이어 간다.

“…내 핸드폰 어떻게 됐더라?”

“아, 핸드폰.”

“응. 병원에서 잃어버리고, 택시 타고…, 또….”

“내가 찾으러 갔지.”

“맞아. 그랬지. 혹시 찾았어?”

“음, 아니.”

…환장할 노릇이다. 일이 이렇게까지 꼬일 필요가 있나. 망할 세상, 아니. 세상은 무슨. 정신 놓고 다닌 날 탓해야지.

“혹시 발견하면 연락 달라고 병원에 얘기해 놨어. 병원 어딘가에는 있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

나의 절망을 읽은 것인지 한우주가 위로를 건넸다. 핸드폰이 발견되기를, 무사히 찾을 수 있기를, 이렇듯 운에 문제를 맡겨야 하는 상황은 질색인데.

“조현우? 뭘 그렇게 생각해.”

한우주의 물음에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그럴듯한 말로 답한다.

“아무것도. 그냥 당분간 답답할 것 같아서.”

“하긴. 핸드폰 없이 지내기 좀 그렇겠네. 내일 바로 나가자.”

“응? 뭐?”

“내일 나가자고.”

“뭐 하러?”

“핸드폰 사러.”

“어?”

한우주 얘는…, 핸드폰 하나 장만할 자본을 누구나 갖추고 있을 거라고 여기는 걸까? 물론 구형 모델로 저렴하게 맞추는 정도라면 큰돈 들이지 않아도 되겠지.

그렇지만 조현우의 지갑 사정은 차원이 다르다고. 물론 인하성 일로 받은 돈이 있긴 하다. 그마저도 팔 치료 마치고, 다음 달 자취방 월세 내고 나면 바닥을 드러낼 게 뻔한데.

아무튼…, 차라리 병원 연락을 기다리고 말지 핸드폰 새로 사는 건 지나친 사치다.

“됐어. 무슨 새 폰이야. 그냥 좀 불편하고 말지, 뭐.”

내 말이 못마땅했는지, 한우주가 한쪽 눈썹을 살포시 찌푸린다.

“그냥 새로 사지? 네 폰 툭하면 배터리 닳고 꺼지고 난리잖아.”

“아니…. 그렇긴 한데….”

“이참에 바꿔.”

얘는 진짜. 필터 안 거치고 말해야 알아들으려나 보다.

“나한테 그럴 돈이 어디 있겠냐….”

한우주가 큰 눈을 느리게 끔뻑인다. 그러고는 정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내가 사면 되지 않아?”

“…뭐?”

“내가 살게.”

“내 핸드폰을 왜 네가 사?”

“없으면 불편하잖아.”

“아니, 그러니까 네가 왜….”

“내가 불편해서.”

뭐라는 거야, 진짜? 한우주 생각을 못 따라가겠다. 내 상태가 어떻든, 한우주는 멋대로 자기 할 말을 이어 갔다.

“또 어디 혼자 나갔다가 연락도 없이 늦으려고? 핸드폰이 있어도 연락 한 번을 않는데, 없으면 얼마나 더할까.”

“아니 그건 배터리가….”

“우리 일단 같이 사는 사이고, 연락 안 돼서 걱정하는 건 당연하다며. 네가 그랬잖아.”

“그건 그런데….”

“또, 내가 늦을 때는? 나는 어디다 연락하는데?”

“…….”

“봐, 서로 불편하잖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솔직히, 나 편하려고 하는 일이니까 네가 맞춰.”

어이가 없다. 이렇게까지 말하니 뭐라 반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상하고 한우주 말이 맞는 건가? 그건 아니지 않아?

한우주 이 녀석은 도저히 생각 정리할 틈을 안 준다. 바르고 곧은 시선을 하고선 자꾸만 이상한 말을 한다.

“정 부담스러우면 선물인 셈 쳐.”

“웬, 갑자기 무슨 선물?”

“생일 선물 미리 받는다고 생각해.”

“그게 무슨 억지야.”

조현우 생일이 얼마 안 남았던가? 그걸 내가 알 턱이 있나. 어쨌든 어떤 친구가, 그것도 고등학생이 생일 선물로 핸드폰을 사 주냐고. 단호하게 받아치려던 때에, 한우주가 일을 쳤다.

“억지면? 내 억지 좀 받아 주면 안 돼?”

“…….”

머릿속이 하얗다. 생각이 활활 타서 전부 잿더미가 되어 버린 것만 같다. 뭐지? 이게 다 뭐야.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조현우.”

한우주가 내 등을 떠민다.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가 아무렇게나 밀리고 말았다. 밀고, 끌고, 밀고, 또 끌고…. 한우주는 고생스러운 과정을 거쳐 나를 손님방에 데려다 놓았다.

“일단 자. 머리 비우고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

“…….”

“또 밤새우지는 마.”

그 말을 끝으로 한우주는 방을 나갔다. 친절하게 문까지 꼭 닫고 가 버린다. 그 뒤로 나는 그냥…, 옷 갈아입고…, 씻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 이상의 뭔가를 할 정신력이 없다. 그런데 망할, 환청인지 뭔지. 바란 적도 없는 다시 보기 서비스를 뇌에서 멋대로 제공한다.

-내 억지 좀 받아 주면 안 돼?

미친놈.

진짜 미친놈.

누가 미쳤냐고? 몰라. 그냥 다. 그건 그렇고 저거 진짜, 돈 쓸 곳 참 없다 보다. 그치.

제기랄….

어쩌다 이렇게 됐지? 모른다. 안태원, 이 새끼 도대체 아는 게 뭐야? 그런 거 없다.

나의 무능함이 이렇게 낱낱이 드러나는구나. 한우주도, 공략캐도, 허…허지훈? 걔 관련해서도. 뭐 하나 제대로 해낸 게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지, 나쁜 기분은 아니다. 그저 내일 한우주가 또 이상한 짓으로 내 정신을 빼 놓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될 뿐이다.

아무래도 나는 한우주에게 완전히 말려 버린 모양이다. 분하다. 언젠가는 꼭 이겨 먹을 거다. 잠결에 떠오른 생각들은 하나같이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기분 전환에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효과가 좋았다. 더할 수 없이 엉망진창으로 보낸 하루가 그다지 나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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