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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34화 (34/150)

34화

“야, 한우주. 이건 아니야. 진짜 아니야.”

“뭐가 아닌데?”

“뭐겠냐!”

“모르겠어. 그냥 빨리 사고 가면 안 될까.”

토요일 대낮부터 한우주와 씨름을 벌이고 있다. 새 모델이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매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우주가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안달인 것도 이해한다. 그렇지만….

“나 핸드폰 아무거나 잘 써. 그냥 메신저랑 전화 정도만 작동하면 된단 말이야.”

“이거 메신저랑 전화 잘 돌아가.”

“아니, 야. 좀! 딸린 게 너무 많잖아. 너 가격 본 거 맞지?!”

“걱정 마. 예산 안쪽이야.”

예산이란 게 있긴 한 걸까? 지금 한국에서 파는 핸드폰 중에 이게 제일 비쌀걸. 살면서 사과 마크 달린 기기는 사 본 적 없고, 바란 적도 없다. 다른 브랜드 구형 모델만 해도 필요한 기능 다 있는데 굳이 사치 부릴 필요 없잖아. 안 그래도 없는 사정에.

그런데 웬걸, 한우주 이놈은 무슨 최신 모델 핸드폰을, 그것도 풀 옵션인 것을 분식집에서 김밥 주문하듯이 사려고 한다. 핸드폰 바꾸는 게 원래 간단했던가? 내 기억에는 아니다. 대리점 소문난 곳 찾아가서 최대 할인 받거나, 중고폰 구해서 제일 저렴한 요금제 가입하고 하지 않냐고.

아무튼, 나는 이런 비싼 기기 못 쓴다. 한 번 떨어트리기라도 하면 액정과 함께 멘탈도 함께 나가리 될 것이 뻔하다. 이번만은 절대 양보 못 한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역시 안 되겠어. 돈이 땅 파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조현우.”

“왜.”

“선물이라고 했잖아. 내가 고르게 좀 해 줘.”

“한우주. 억지 좀 그만….”

말을 끝맺지 못했다. 어제 한우주가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놈의 억지. 왜 이런 거로 억지를 부리냐는 말이다. 망할, 그대로 단호하게 밀고 나갔어야 했는데 한우주 저건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진짜 억지는 아직 부리지도 않았어. 계속 싫다고 하면 그냥 내 멋대로 사다가 너 잘 때 머리맡에 두고 간다.”

뭐? 이게 진짜 왜 이래. 미쳤나?!

“네가 무슨 산타야?”

“어.”

“야. 크리스마스까지 8개월은 남았어.”

“12월 업무량이 너무 많아서 분산하기로 했어. 오늘부터 일하려고.”

“한우주 너 나랑 장난치냐?”

“아니.”

이러다 어이가 가출하겠다. 그냥 다 이해가 안 간다. 돈 한 푼 안 받고 자기 집에서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것만으로 모자라 이젠 핸드폰까지 사 주겠다고? 그것도 내 부주의로 잃어버린 것을?

돈 쓸 곳이 없어서, 심심해서 이러는 걸까. 아니면 뭐, 조현우가 좋아서? …물론 연애적인 의미 말고 친구로서 말이다.

이쯤 되니 진심으로 걱정된다. 한우주는 공략캐에게 투자해야 할 인간성과 돈을 조현우에게 쓰고 있는 게 맞는 것 같다. 돌아 버리겠네. 아, 모르겠다. 당장은 한우주를 말리는 게 우선이다. 그런데 잠깐만. 얘 어디 갔어?

“아니, 야. 한우주!”

잠시 한눈판 사이 옆에 있던 한우주가 사라졌다. 그리고 10초 만에 찾았다. 기럭지가 보통이 아니다 보니 눈에 안 띌 수가 없더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저게 멋대로 핸드폰을 계산하러 간 모양이다.

하여튼 진짜 제멋대로다. 급하게 뒤쫓아 저 노답 부자의 소비를 막으려던 때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뭐야. 조현우?”

“엥.”

“헐, 진짜 조현우네. 여긴 웬일이냐?”

오재영이 반가운 듯 웃으며 성큼 다가온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까. 울고 싶다. 나는 원래 멀티가 전혀 안 되는 사람이란 말이다.

한우주 뜯어말리면서 오재영한테 인사도 해야 하고, 한우주와 함께 있는 나를 오재영이 본다면 어떻게 반응할지도 생각해야 한다. 왜 한우주랑 같이 있냐고 물어보기라도 하면 나는 뭐라고 해야 하지? 오재영이 한우주한테 시비 걸면 어떡해?

“조현우 너 무슨 일 있냐? 표정이 뭐 씹은 사람….”

“조현우. 여기서 볼일 끝났어. 나가자.”

썅.

한우주가 기어코 사과 그려진 쇼핑백을 들고 왔다. 그리고 오재영은…, 한우주를 발견하자마자 표정이 썩었다. 나를 봤다가, 한우주를 봤다가, 나, 한우주, 나, 한우주…. 바쁜 시선이 끝에는 내게로 안착한다.

“둘이 같이 왔냐?”

망했다. 대답할 말이 생각 안 난다.

“이제 가려고.”

한우주가 대신 답한다. 오재영은 내게 물은 건데, 왜? 알 턱이 있나. 그냥 한우주가 한우주 한 거지. 오재영이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야, 조현우. 한우주랑 같이 온 거 맞아?”

“…그, 그럴걸.”

“뭐, 이제 간다고? 그럼 볼일 끝난 거?”

“그렇지…?”

“그럼 나랑 놀자. 강준희 이 새끼는 여태 퍼질러 자는지 연락 안 받아.”

“어?”

“개놈. 오늘 보기로 했는데 펑크 낸 거다. 나 불쌍하지 않냐?”

“그게….”

흘끗, 한우주를 살펴본다. 한우주도 내내 나를 보고 있던 건지 시선이 바로 마주쳤다. 이제는 익숙한 온기가 손끝에 닿는다.

“조현우, 가자.”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오재영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야, 너 이제 간다며? 혼자 가. 조현우 나랑 볼일 있어.”

“네가 조현우한테 볼일이 있는 거겠지. 일방적으로.”

“뭐 인마?”

“그만! 잠깐만! 둘 다 말하지 말아 봐!”

이러다 싸울까 싶어 서둘러 외쳤다. 한우주와 오재영이 말을 멈추고 동시에 나를 본다. 미치겠다. 골이 당긴다. 매번 중간에 껴서는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이제는 이런 상황이 낯익게 느껴져 서글프다.

나는 일부러 힘이 잔뜩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친 기색을 내보이면 조금은 자중하지 않을까, 티끌 같은 희망을 품은 탓이다.

“한우주. 나 잠깐 오재영이랑 얘기 좀 할게.”

“하!”

오재영이 통쾌한 듯 이상한 소리를 낸다. 순간 한우주의 눈가에 그늘이 진 것만 같다. 아오, 내 말 아직 안 끝났는데.

“잠깐이라니까. 한 10분 정도만.”

“뭐?! 왜!”

목소리 한번 크다. 귀청 따가워. 강준희가 툭하면 오재영 입을 막아 버리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한우주랑 선약 있어.”

“볼일 끝났다며?”

“여기서 볼일은 다 봤다는 거지. 이 뒤에…, 여튼 또 뭐 있어.”

오재영은 얼굴이 부루퉁해져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조현우 너는 어제 나랑 강준희 톡은 다 씹고. 오늘 아침 것도 씹고. 한우주랑은 놀러 다니고….”

“그, 그러니까! 그거 관련해서 얘기할 게 있다고!”

“뭐! 도대체 뭔데! 됐어! 그냥 나랑 놀기 싫다고 말하든가!”

오재영 이 유치한…, 고등학생 맞냐? 한우주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낸다. 잠깐만, 자리 좀, 비켜 줘. 한우주의 미간이 좁아진다.

“왜. 내 앞에서 못 할 말이야?”

“그건 아니지만….”

씩씩거리는 오재영을 열심히 곁눈질한다. 한우주 너 있으면 얘랑 대화가 안 될 것 같단 말이야. 잠깐 좀 비켜 주라. 한우주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바로 옆 카페에 앉아서 기다릴게.”

“아, 응. 고마워.”

이걸 용케 알아듣는다. 한우주는 순순히 자리를 비켜 주었고, 오재영은 저러다 한우주 뒤통수 뚫리겠다 싶을 정도로 매서운 눈길을 보냈다. 혹여 저러다 욕설이라도 뱉을까 봐 얼른 주의를 끌었다.

“야, 야야. 오재영.”

“왜. 10분짜리 친구 새끼야.”

“나 핸드폰 잃어버렸어.”

“어쩌라…. 아니? 에엑?”

오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래, 어이없겠지. 나도 어이없어서 그 마음 잘 안다.

“어제 병원에서 잃어버렸어. 그러니까 허지훈 번호 좀 알려 주라. 그, 네 번호랑 강준희 번호도.”

바로 본론을 꺼냈다. 마구 엉킨 머릿속을 정리하고 보면 여기서 오재영을 만난 건 제법 큰 행운이다. 잃어버린 핸드폰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불투명한 것에 매달려 속앓이하는 것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나았다.

그러니…, 조현우 핸드폰에 있던 메시지 함 같은 건 신경 쓰지 말자. 연락처만 알면 허지훈이 어떤 사람인지, 한우주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직접 겪어 보고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재영은 황당함에 할 말을 잃었나 보다. 쉴 틈 없이 움직이던 입이 잠잠하다. 그저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선, 근처 직원에게 종이와 펜을 빌려 와 번호를 적어 건넸다. 그러고 나서야 정신이 좀 들었나 보다.

“그럼…, 뭐냐. 너 여기 폰 사러 온 거야?”

“…응.”

“한우주랑?”

“응.”

“…….”

오재영의 낯빛이 어둡다. 이전에 한우주 일로 충돌하고 화해한 것이 고작 하루 전의 일인데, 혹여 또 말싸움을 벌이게 될까 봐 조마조마하다. 그러나 오재영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웬일로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소곤 말한다.

“조현우. 너 혹시 한우주랑 뭐 있는 거면….”

“어? 뭐가 있어?”

“막, 몰라. 한우주가 협박…? 뭐든 간에 너한테 뭔가 하고 있으면!”

“…….”

“나랑 강준희한테 말해. 허지훈만큼은 아니어도 뭐…, 조금…, 뭐라고 하냐. 의지? 아, 아악.”

자기 입으로 말해 놓고 혼자 간지럽다고 야단법석이다. 오재영이 준 쪽지, 생각보다 가지런한 글씨로 적힌 숫자의 나열을 눈으로 한 번 훑는다. 다시 오재영을 보고 슬며시 웃어 본다.

“그래. 고마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이전에 비슷한 말을 들은 적 있다. 팔을 다친 날에 담임이 그랬던가? 그땐 마냥 화나고 어이없기만 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그간 오재영의 행동을 돌아보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오재영은 조현우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다. 강준희도 마찬가지고. 그럼 나도 거기에 맞추어 행동하는 게 맞겠지.

그리고 한우주…. 한우주가 왜 이렇게 주변의 불신을 사게 된 것인지는 허지훈에게서 알아보면 된다. 직접적인 관련이 있어 보였으니까.

오재영은 조금이라도 진지한 상황이 어지간히 싫은가 보다. 제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어쩔 줄을 모르더니 돌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무언가 확인하자마자 활짝 웃고는 내게 자랑한다.

“야. 강준희 이 새끼 깼다. 지금 오고 있는 듯?”

“어…, 그래? 다행이네.”

“새끼, 아무튼 별일 아니면 다행인 거고. 가 봐라! 이번만 쿨하게 놔준다.”

“알았어. 월요일에 보자.”

뒤돌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재영의 신경 건드리는 일 없이 넘겨서 다행이다. 한우주는 옆 카페에 있겠다고 했지. 두어 걸음 내디뎠을 때, 뒤쪽에서 오재영의 외침이 들렸다.

“야! 폰 개통하면 바로 연락해라?!”

고개만 살짝 돌려 웃음으로 답한 뒤 재빨리 한우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한우주는 새카만 커피를 마시고 있다가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웬 음료를 건넨다. 딸기 라테다.

“여기 커피는 맛없던데. 그건 어떨지 모르겠다.”

“…잘 마실게. 고마워.”

음료는 맛만 있었다. 한우주 입맛이 까다로운가 보지.

한우주는 오재영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얼른 집에 가고 싶은 눈치다. 그러나 한우주가 집을 그리워하는 마음만큼 나는 이 고가의 핸드폰이 부담스러웠다. 환불을 재차 강력히 주장하며 한우주를 질질 끌고 핸드폰 매장에 다시 들러 보았다. 시간은 어느새 저녁에 가까워져 사람은 더 붐비기만 했다. 흘끔, 한우주를 살펴보는데 표정만 보면 곧 쓰러질 것만 같다. 얘를 어쩌면 좋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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