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결국, 핸드폰은 한우주의 뜻대로 되었다. 안 그래도 지쳐 보이는데 더 말씨름하기도 좀 그렇고, 어차피 내가 아니라 조현우가 받는 건데. 그렇게 생각하니 그나마 속이 편했다.
집에서 핸드폰을 개통하고, 한우주의 번호를 가장 먼저 저장했다. 그리고 허지훈, 오재영, 강준희…. 아, 맞다. 서연준 것도 있어야지.
“한우주! 서연준 번호 좀 알려 줘.”
“서연준 번호?”
“응. 저장하게.”
“음.”
“한우주?”
대답까지 해 놓고 못 들은 척이다. 또 유치한 씨름을 하고 나서야 겨우 서연준 번호를 알았다. 한우주 저건 알려 줄 거면서 괜히 저런다. 함께 지낼수록, 한우주에 대해 알아 갈수록 드는 생각인데, 저 녀석 참 웃기다.
…그리고 참 좋은 사람이다. 인하성처럼 먼저 몰상식하게 구는 게 아니라면, 주변에 피해 주는 것도 없고.
그래서 더더욱 허지훈이 궁금했다. 만약 허지훈이 입원한 일과 한우주가 연관되어 있다면, 차라리 허지훈이 나쁜 사람이었으면 했다. 오재영이랑 강준희, 그리고 많은 사람이 한우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전부 오해였으면 했다. 허지훈을 만나 본 적도 없으면서 참 무례한 바람을 품고 말았다.
‘…내일 바로 만나 봐야겠다. 병문안 간다고 하면 되겠지.’
이 답답함을 얼른 풀고 싶다. 한우주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고 싶다. 이게 정말 중요한 일일까, 공략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딱히 할 말이 없다. 이건 그냥…, 내가 답답해서. 하루쯤 투자해도 괜찮겠지, 싶어서.
한참을 심호흡한 뒤에 문자를 보냈다.
「조현우: 허지훈. 몸은 좀 괜찮아? 나 조현우인데, 내일 찾아가도 돼?」
***
높고 푸른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봄바람이 살랑이며 기분 좋게 불어온다. 병원을 중심으로 줄줄이 심긴 라일락은 금방이라도 꽃봉오리를 터트릴 듯했다. 아마도 다음 주쯤이면 만개하겠지.
마침 일요일이고 소풍 나오기 딱 좋은 날인데 나는 울고 싶었다. 오전 10시, 주말에 외출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다. 한우주는 한창 꿈속을 헤매고 있을 시간이고, 내가 찾아온 병원의 병문안 가능 시간대이기도 하다. 그래, 그놈의 병문안. 내가 일찍이 집을 나선 이유. 이제 병원 안에 들어가야만 한다.
그런데 발을 뗄 수가 없다. 지금이라도 관두고 집에 돌아갈까? 병원 앞에 도착한 지 1분이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도망치고 싶다. 어제 한우주에게 받은 핸드폰을 소중히 쥐고 들여다본다. 병원 안에 들어가기 싫어서, 괜히 시간 끌려고 이러는 거 맞다. 그리고 핸드폰 화면을 켜자마자 끔찍한 것을 마주하고 말았다.
「문자 메시지 21건」
「부재중 전화 14건」
‘와, 진짜 미친 새끼….’
전부 허지훈한테서 온 거다. 이제는 조현우가 허지훈을 왜 차단했는지 알 것만 같다. 나도 지금 차단 박고 싶은 걸 겨우 참아 내고 있으니까. 조현우랑 허지훈 친구 사이 맞지? 얘한테 뭐 돈이라도 빚진 거 아니야…? 생각하기 무섭게 허지훈에게서 문자 한 통이 더 왔다. 내용은 일부러 확인 안 했다.
미치겠네….
어젯밤 허지훈에게 문자를 보낸 이후로 죽 이 상태다. 처음에는 전화가 왔었다. 오재영과 강준희가 한 말을 상기하며 마음 단단히 먹고 받긴 했는데, 허지훈은 정말… 상상을 초월한 놈이었다.
살면서 그렇게 많은 욕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허지훈에 비하면 인하성은 성난 강아지쯤 되는 것 같다. 게다가 목청은 어찌나 큰지, 깜짝 놀라 벽에 머리를 박는 바람에 한우주까지 찾아왔었다. 변명하느라 진땀 뺀 건 말할 것도 없고.
아무튼…, 문자나 전화로는 허지훈과 제대로 된 소통이 불가능했다. 어느 병원에 입원했는지도 오재영이랑 강준희한테 물어 알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는 일찍이 겁에 질려선 얼굴에 철판 깔고 오재영, 강준희에게 SOS까지 쳤었다.
「조현우: 얘들아; 나 내일 허지훈 병문안 갈 건데 같이 갈 사람?」
「오재영: 아 ㅈㄴ 배고프다」
「강준희: 돼지 새끼; 아까 저녁 먹은 거 어디로 감?」
「오재영: 아니ㅡㅡ 내가 분명 배 덜 찼다고 아이스크림 먹자고 했는데」
「오재영: 니가 싫다고 해서 못 먹어서 그렇잖아 존나」
「강준희: 혼자 사서 처먹든가.」
「조현우: 야? 얘들아? 나 보여?」
「강준희: ㅇ」
「오재영: ㅇㅇ」
「조현우: 내일 병원 같이 갈 사람」
「오재영: 그래서 야식 뭐 먹지」
「강준희: 공기」
「조현우: ???」
오재영과 강준희는 다른 말에는 잘만 대답하면서 병문안 가자는 말은 전부 씹었다. 내가 앵무새처럼 병문안 가자고, 가자고, 제발 가자고, 질릴 때까지 반복하고 나서야 반응을 보였다.
「오재영: ㅅㅂ 조현우 시끄러」
「오재영: 야 뭘 같이 가냐? 너 혼자 가」
「오재영: 난 아직 더 살고 싶음;」
「조현우: ㅠㅠ?」
「강준희: 뭐 어쩌겠냐 네 업보인데」
「강준희: 죽기밖에 더하겠음?」
「조현우: 아ㅠㅠ」
오재영과 강준희는 저 꼴이고, 허지훈 병문안을 한우주한테 같이 가자고 할 수는 없다 보니 이렇게 나 홀로 와 버린 것이다.
‘쫄지 말자. 미루지 말자. 야, 안태원. 빨리 들어가, 인마.’
나 자신을 열심히 채찍질한 뒤에야 겨우 병원에 들어갔다. 병문안 절차는 원망스러울 정도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다인실이면 다른 환자들 봐서라도 난리 못 치겠지, 싶었는데 허지훈은 1인실에 있었다. 망할.
똑똑.
식은땀이 나 축축한 손으로 병실 문을 노크한다. 그런데 대답이 없다. 뭐지? 자고 있나? 아니면 자리를 비운 걸까. 오늘은 날이 아닌가 봐. 이어지는 생각에 마음이 들뜰 때 즈음 병실 안쪽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밖에 누군데. 조현우?”
깊고 낮은 목소리에 투박한 억양, 어제 전화로 욕을 쏟던 그 목소리다. 안에 있었구나. 미친, 나 진짜 못 들어가. 그냥 돌아갈래. 발소리가 나지 않게 살금살금, 게처럼 옆으로 걷는 중에 벌컥 문이 열렸다. 곧, 복도를 빠르게 훑는 날카로운 눈과 마주치는 바람에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
“…….”
만나자마자 사람 끝장낼 것처럼 굴던 허지훈도 어쩐지 움직임이 없었다. 소란스러운 정적이 이어졌다.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정말 그랬다. 허지훈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눈으로는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듯했다.
나는 긴장감에 숨 쉬는 것도 잊은 채로 허지훈을 바라보았다. 이목구비가 크고 뚜렷한 데다가 어디 하나 날카롭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살짝 탄 피부에 얼굴선이 굵직해 성숙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허지훈을 직접 보고 느낀 인상을 짧게 표현하자면…, 시원하고 묵직했다.
출석부에서 처음 사진을 봤을 때도 생각했지만 풍채가 남다르다고 해야 하나, 꼭 다 큰 어른 같다. 그러나 지금, 경계를 완전히 허물고선 크게 뜬 눈과 저 아연한 표정의 얼굴은 조금 앳되어 보이기도 했다. 그마저도 아주 잠깐, 한순간에 스쳐 가고 말았지만.
“야.”
금방 맹수 같은 얼굴로 돌아와선 사나운 목소리로 말한다.
“거기서 날 샐 거냐?”
허지훈을 피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머릿속에 크게 울린다. 허지훈은 인상을 잔뜩 구기고는 다시 내게 말했다.
“이리 안 오냐고, 새끼야.”
안 가면 정말로 날 찢어발길 것만 같다. 허지훈의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기 전에 무거운 발걸음을 겨우 옮겼다. 가까이서 본 허지훈은 내 시선보다 한참 위에 있어서 이전보다 훨씬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쿵.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뒤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허지훈 쟤는 문을 닫는 것인지, 부수는 것인지.
“너 이거 왜 이래.”
거리가 너무 가깝다. 분노로 가득 찬 시선을 받아 내기 힘들어 뒷걸음쳤으나 툭, 얼마 못 가 닫힌 문에 등이 닿고 말았다. 허지훈이 다시 말을 건넨다.
“조현우. 귀먹었어? 이거 왜 이러냐고.”
“뭐, 뭐가?”
허지훈에게 처음 건넨 말이 저 꼴이다.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자 허지훈은 못마땅한 듯 입가를 샐쭉거렸다. 그러곤 어딘가를… 아, 내 왼팔을 집요하게 쳐다보았다. 참, 허지훈은 내가 다쳤던 걸 모르겠구나. 나는 어떻게든 입가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후회했다. 허지훈의 낯이 더욱 험악해졌기 때문이다. 아오, 개 무섭네. 숨을 크게 들이쉬고 가까스로 대답했다.
“다쳤어….”
“내 눈이 장식 같냐?”
“부, 부딪혔어.”
“뭘 어디에 어떻게 부딪히면 팔이 이 지랄 나냐고.”
망할…. 환자가 뭐 이래. 나 병문안 온 거 맞아? 입원했다길래 병상에 누워 있거나 몸 어디가 불편하겠거니 생각했는데 개뿔, 아주 멀쩡해 보인다.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 안 했다간 허지훈이 남은 오른쪽 팔도 부러트릴 것 같다는 망상을 하며 굳이 공포심을 키웠다. 허지훈의 기에 눌려 솔직해진 입이 진실을 줄줄 늘어놓는다.
“밀쳐져서 벽에 부딪혔는데 팔뼈에 금 갔어. 엄청 잘 낫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
“…허.”
허지훈은 헛웃음을 한 번 치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조금 진정했나? 잠시 헛된 희망을 품었다.
“야.”
“응….”
“나 어떡하냐?”
“응?”
“개 빡치는데. 빡치는 일이 너무 많아서 존나….”
꾹꾹, 허지훈이 말에 눌러 넣은 감정이 당장이라도 들끓을 것만 같다. 허지훈은 어떻게든 진정하려는 듯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나는 그제야 허지훈의 검은 머리카락이 출석부에서 본 것보다 훨씬 길어진 것을 눈치챘다. 한동안 다듬지 못한 머리와 환자복 차림새. 그 두 가지만이 허지훈의 입원 생활을 증명했다.
그리고 훤히 드러난 이마에서 왼쪽 눈썹을 가로지르는 깊고 선명한 흉터를 보았다. 저거 사진에선 못 본 거 같은데. 안 그래도 무서운 인상이 배로 험악해졌잖아.
도대체 뭘 어쩌다 다친 걸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데 허지훈과 시선이 마주쳤다. 허지훈은 미간에 힘을 팍 주더니 도로 앞머리를 내리고 머리를 대충 정리했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너 표정이 왜 그래?”
“어? 응? 뭐, 뭐가? 내 표정이 왜?”
“하얗게 질렸잖아. 뭔, 겁먹은 사람처럼….”
그렇게 티가 났나. 급하게 표정을 갈무리하지만 이미 늦었다. 허지훈의 얼굴이 당혹감에 젖어 드는데 그것마저 무서웠다. 그냥 병실 문 열고 뛰쳐나가고 싶다.
“야. 너 진짜 뭔데? 뭐 때문에 쪼는데?”
“아, 아니야. 나 멀쩡해. 내가 왜.”
시침을 떼자니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아, 젠장. 울고 싶다. 허지훈은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자기가 어떤 얼굴로 말하는지 알면 저런 말 못 할 거다.
“뭔, 처맞을까 봐 겁먹은 것처럼…, 잠깐.”
정확히 맞췄다. 내 자리에 아무나 세워 놓고 봐라. 백이면 백 다 쫄 거다. 허지훈은 정말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이 휘둥그레져선 큰 소리를 냈다.
“너 설마…. 지금 나한테? 조현우 너 나한테 쫀 거냐? 내가 너 패기라도 할 거 같아?”
도리도리. 고개를 필사적으로 가로저었다. 한 열 번은 넘게 저어서 나중엔 머리가 어지러웠다. 허지훈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날 향한 시선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조현우 너…. 나를 무슨…, 네가 어떻게….”
그쯤 되어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허지훈에 대해 전해 들은 이야기나 인상과 말투. 허지훈을 겹겹이 둘러싼 것을 하나씩 들춰내 보면….
“네가 이러면 안 되지. 안 된다고. 씹, 조현우 너도 알 거 아니야.”
그저 억울하고 속상한 사람 한 명이 보였다. 당연히도 나는 허지훈이 어떤 사정으로 저러는지 알 수 없다. 내가 아닌, 조현우나 알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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