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허지훈은 천진한 얼굴을 거두고 나직하게 물었다.
“당연한 걸 왜 물어?”
“…당연하다고?”
그게 어떻게 당연한 거지? 내게는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현실감 없는 이야기다. 한우주는 내가 이곳에서 곤란에 빠질 때마다 기꺼이 나서 도움을 준 사람이다. 단 한 번도 한주우에게 적의, 혹은 그 비슷한 것조차 느낀 적 없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조현우가 한우주의 친구니까, 내가 조현우의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받은 호의이다. 한우주는 조현우에게 참 친절하다. 현실에서 게임을 플레이할 적에 본 한우주와 조현우의 관계, 그리고 게임 안에 들어와서 조현우의 몸으로 겪은 한우주. 어느 쪽을 되짚어도 한우주가 조현우를 해칠 이유 따위 떠오르지 않았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허지훈은 어리둥절했다가, 머리를 쥐어뜯다가, 끝내 나를 죽어라 노려보기 시작했다. 표정에서 생각이 고스란히 읽힌다. ‘저거 지금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추측건대 내 표정도 허지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마주 보고 있다가 허지훈이 맥 빠진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조현우 너…, 여태 정신 못 차렸냐?”
조현우는 어떤지 모르겠고 나는 제정신인데…. 말없이 눈만 끔뻑이자 허지훈의 얼굴이 경악에 물들었다. 몸을 벌떡 일으켜선 나를 내려다보는데 자꾸 무어라 말하려다 ‘허, 하? 와.’ 같은 소리만 냈다. 그러다 겨우 인간의 언어를 찾았나 보다.
“아니, 이 미친. 야! 와, 이런. 야!”
아니, 아직 못 찾았나?
“허, 허지훈 너 왜 그래?”
“왜? 왜냐고 했냐? 왜겠냐?! 이 정신 나간 놈. 어우, 진짜 이걸 한 대 쳐, 말아?! 으아악!”
허지훈 또다시 포효한다. 나는 또 거기에 쫄아서 의자에서 일어나 병실 벽에 달라붙은 채로 외쳤다.
“안 죽인다며! 안 팬다며!”
“패는 거랑 치는 거랑 같냐?! 너는 겁 안 먹는다며, 새끼야!”
“같지 그럼 뭐가 다른데?! 겁먹을 수도 있지! 네가 막 무섭게 소리 지르잖아!”
“너도 지르고 있잖아!!”
“내가 소리 지른다고 누가 겁먹겠냐?!”
“어! 존나 무서워서 뒤지겠다!!”
아까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잊고 서로 왁왁 소리를 질러 댔다. 결과는 뻔했다. 의료진이 들이닥치고, 나는 그대로 쫓겨났다. 내가 병실에서 뭘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그냥 목만 아프다.
병원을 빠져나와 잠시 봄볕을 쬐며 멍하니 서 있었다. 그래서 오늘 내가 큰마음 먹고 여기까지 와서 얻은 게 뭐지. 열심히 생각해 보지만 정말 별것 없다. 허지훈이 대충 어떤 녀석인지 정도…? 생각 이상으로 조현우와 친밀한 관계고, 한우주를 굉장히 안 좋게 보고 있다는 거.
그리고 또….
-조현우 너 이 새끼, 퇴원하고 보자?! 어?! 아주 정신머리를 뜯어고쳐 버려야…!!
-환자분! 환자분, 잠시만요. 진정하세요!
“…….”
병실 문이 닫히기 직전, 허지훈이 얼굴이 새빨개져선 내게 한 말이 생각나 미간을 좁힌다. 사지 멀쩡하고 목청 좋고 기운 펄펄한 게 정말 퇴원이 머지않아 보였다. 하…, 안 그래도 하루하루 피곤해 죽겠는데 거기에 허지훈까지 끼어들 걸 생각하니 눈물이 찔끔 날 것만 같다.
하필 그 순간에 오재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허지훈 슬슬 퇴원할 텐데. 걔가 너랑 한우주 꼴 보면 존나…, 셋 중 하나 뒤져도 안 놀라울 듯.
에이, 설마. 과장한 거겠지. …아닌가. 정말 과장한 게 맞나?
허지훈의 부상에 정말, 혹시라도, 한우주가 관여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미 한 번 하나 죽을 뻔한 거 아니야? 허지훈 저거 지금은 팔팔해 보이지만 입원까지 한 걸 보면 보통 부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에이, 설마 한우주가 그랬을 리가….
“…….”
…그랬을 수도 있나?
허지훈이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한 번 봤을 뿐이지만, 그럴 성격조차 못 되는 것 같고. 한우주와 무슨 일이 있기는 했을 거다. 바로 며칠 전의 나라면 ‘아니, 한우주가 어떻게 허지훈 같은 애를 건드려서 입원시키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하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얼마 전 한우주가 인하성에게 한 일을 직접 목격했으니까. 한우주는 자신의 적에게는 치밀하고 잔인하게 구는 면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뭐지? 허지훈은 어쩌다가 한우주 눈 밖에 난 건데?
‘허지훈…. 나쁜 놈 같지는 않았지.’
인하성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려니 하고 내심 넘겨짚으려 했었다. 그런데 만나고 보니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이쯤 되니 슬슬 지쳤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붙들고 있나. 한우주 연애랑 직결된 문제도 아니고. 허지훈은 어떻게든 고이 치워 두고 공략캐랑 잘 비벼 보면 되는 거 아닌가? 아, 그게 제일 힘들지 참. 공략캐와 싸우지나 않으면 다행이니….
돌고 돌아 원점이다. 개인적인 호기심을 차치하고 보면 그냥… 결론은 하나다. 어디서 뭐가 어떻게 지랄하든 한우주 연애만 잘 시키면 된다. 그런데 한우주는 연애 생각이….
망할…….
따사로운 햇살은 자외선 빔이고, 봄바람은 알레르기 유발하는 꽃가루 운반 수단이고, 라일락 나무에 맺힌 꽃봉오리들을 보면 마음이 들뜨기는커녕 ‘저거 다 지고 나면 쓰레기가 되겠지….’ 이따위 생각만 든다. 세상천지 어디서든 하나씩 원망할 구석을 찾고 있을 때였다.
[♪~]
주머니 속에서 낯선 음악이 들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날 위해 마련된 장송곡인가? 엉뚱한 생각을 겨우 밀어내자 어제 핸드폰을 바꿨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벨 소리인가 보다. 전화인가? 핸드폰을 꺼내 발신인을 확인한다.
「한우주」
자기 생각하는 건 어떻게 알고 지금 전화를 하냐.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11시가 넘어갔다. 일요일의 한우주치고는 꽤 일찍 일어났다. 툭, 액정을 끌어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한우주?”
[…….]
“여보세요?”
[…으음.]
“…여보세요. 여보세요? 한우주 너 지금 전화 걸어 놓고 자는 거야?”
대답은 없고 고른 숨소리만 들려온다. 어이가 없다.
“야, 한우주! 전화 끊는다!”
[…조현우?]
“그래!”
[언제 전화 걸었어? 아, 맞다. 너 집에 없더라….]
얘 아직 꿈꾸나? 지가 전화 걸어 놓고 나더러 걸었단다. 웃기는 자식.
[왜 웃어?]
“뭐? 나 웃은 적 없는데?”
[방금 웃었는데….]
“참나, 세수하고 잠이나 깨.”
[음…. 너 어디야?]
“메신저 확인 안 했어?”
[그랬나…. 아마도?]
한우주 그냥 잠이나 더 자는 게 나아 보이는데…. 메신저를 켜 확인하니 숫자 1이 여전히 떠 있다. 아직 안 읽었다.
“잠깐 볼일 있어서 밖에 나왔어. 지금 들어가려고. 너도 이따가 보면 알겠지만 나 메시지 남기고 나왔다? 말없이 막 나온 거 아니다?”
[…….]
“여보세요. 야?!”
[…어?]
“그냥 자. 나는 한…, 1시간 안에 도착할 거야.”
[…….]
한우주 진짜 골 때리는 놈. 또 말이 없는 걸 보니 자나 보다. 멋대로 끊었다가 나중에 다른 소리 할까 봐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 주려고 했다. 이젠 숨소리도 안 들린다. 잠자리가 불편한가. 조금 뒤척이는지 천이 스치는 소리만 종종 들렸다.
나는 청각에 신경을 집중한 채로 길을 걸었다. 병원 바로 앞이 버스 정류장이지만, 어쩐지 걷고 싶은 기분이었다. 죽 이어진 가로수 길에는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옅은 분홍색의 꽃잎이 살랑이며 떨어졌다.
저걸 보니 생각난다. 뭐였더라, 떨어지는 벚꽃 잎을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나? 그런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내 사랑은 모르겠고, 한우주 사랑이나 이뤄졌으면 좋겠다.’
한우주의 엉뚱한 짓 때문인지, 꽃이 예뻐서인지, 불안하게 술렁이던 마음은 어느샌가 잠잠해져 있었다. 평화롭게 길을 걷는데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왔다. 턱. 벚꽃 잎 하나가 얼굴에 명중한다. 코 위에 얹혀 간지럽다.
“…한우주. 아직 자?”
떼고 싶은데 팔을 하나밖에 못 쓰니 불편하다. 한우주 얘는 일어날 낌새도 안 보이고, 슬슬 끊어야겠다.
“끊는다.”
[…….]
잘도 자네. 용케도 전화를 걸었다. 뚝, 전화를 끊고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코에 붙은 벚꽃 잎을 떼어 내 바닥에 흘려 보냈다.
꽃놀이 가고 싶다.
문득 떠오른 생각을 속으로만 읊는다. 지금 딱 가기 좋은 시기인데. 내 처지에 무슨 한가로운 소리인가 싶지만…. 됐다, 됐어. 한우주가 공략캐랑 알아서 꽃놀이 가면 더 바랄 게 없겠네.
의도적으로 머리를 비웠다. 옆에 아무도 없고, 날은 좋고.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여유를 부려 보나 싶어서. 덕분에 집까지 가는데 1시간이 넘게 걸렸다.
…한우주가 벨 소리도 못 들을 정도로 숙면하는 바람에 밖에 발이 묶여 고생을 좀 했지만. 일주일 치 산책 오늘 하루에 다 한 것 같다.
오후 느지막이 녹초가 되어 집에 들어갔더니 한우주가 또 엉뚱한 말을 했다.
“너도 그냥 출입증 가지고 다닐래?”
“…어? 뭐라고?”
“입주민 등록하고 발급받아. 그러면 또 이럴 일 없을 거 아냐.”
“아니, 내가 왜 그런 걸 해? 입주민도 아닌데.”
“어차피 여기서 살잖아.”
“계속 살 것도 아닌데 뭘. 그런 거 아무한테나 해 주는 거 아니야.”
황당하기도 하고 지치기도 해서 맥 빠진 목소리로 건성건성 대답했다.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자니 한우주가 또 말을 걸었다.
“오늘 어디 다녀왔어?”
“응? 으음…. 그냥 나갔다 왔어.”
허지훈 만나러 갔다고 말하기엔 둘 사이가 신경이 쓰여 대충 변명했다. 이게 문제였나….
한우주는 그 뒤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언제까지 말을 안 했냐면…, 해가 지고 저녁을 먹을 때까지. 중간에 몇 번이고 말을 걸었는데 전부 씹혔다. 잘 자라는 인사에도 입을 다물길래 그제야 확신했다.
저거 삐졌구나.
눈치챘을 땐 시간이 늦어서 달랠 틈도 없었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어? 달랠 필요도 없지. 알아서 풀라고 해. 어이가 없어서 진짜?
아침엔 허지훈한테 치이고, 저녁엔 삐진 한우주에게 치이는구나. 으, 나쁜 놈들.
한우주 쟤는 이럴 거면 아예 삐돌이로 개명을 해라. 한삐돌…. 저렇게 속 좁아서 연애는 어떻게 하냐. 알면 알수록 미연시 주인공 해서는 안 될 놈이라는 확신만 깊어진다.
「System: 2주 차의 플레이를 평가합니다.」
「랭크: E, 엔딩은 볼 수 있을지 우려됩니다.」
「경고 1회 부여합니다. 3회 누적 시 난이도가 하향 조정됩니다.」
「경고: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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