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6. 조연의 의무
또다시 찾아온 평일을 아무렇지 않게 맞이하는 나 자신이 못마땅했다. 게임 속 생활, 조현우로 지내는 일상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고, 내가 게임 속에 들어온 지도 벌써 3주가 다 되어 가는 것을.
늘 그렇듯 이번 주 역시 다사다난할 것이라 예상한다. 원인이야 뻔하다. 한우주, 그리고 조현우와 허지훈, 기타 등등.
아, 맞다. 허지훈. 그나마 다행이랄 것은 병문안 이후로 허지훈의 집요한 연락이 끊겼다는 것이다. 내가 실수로 차단이라도 한 건가? 싶어 핸드폰을 살펴보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좋게 헤어지지 못했으니 연락하기 싫은가 보지. 그저 그렇게 넘겼다. 내게 중요한 건 허지훈이 아니니까.
나의 목표는 여전히 서연준이다. 저걸 어떻게 한우주랑 연애시키지? 시스템 문구를 보면 영 진전이 없는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지. 한우주는 연애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자꾸만 소란한 일을 벌이거나 휩쓸려 시간과 기력을 낭비한다.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부터 낌새가 좋지 않았다. 한우주가 또다시 연애와는 일절 관련 없는 일에 휘말리고 말았으니까.
***
나는 말없이 한우주를 쳐다봤다. 한우주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정말이야?”
“내가 안 했어.”
“음….”
그렇다면 이 소동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학교에 웬 경찰이 왔다.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경찰이 어딜 뒤지고 누구는 소리 지르고 야단법석인…,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학교 앞에 세워 둔 경찰차, 교무실을 기민하게 들락거리는 경찰들, 그리고 자습 처리된 몇몇 선생님들의 수업…. 이것만으로 학생들은 이야기를 잘도 꾸며 냈다.
얼핏 허무맹랑한 이야기뿐인 것 같으면서도 공통점은 존재했다. 야구부가 어쩌고, 감독이 어쩌고 하는 말이 빠지질 않았다. 이러니 내가 한우주를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다.
인하성이 전학 간 것으로 대충 종결된 사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징글징글하다. 공식적인 이야기는 나온 게 없으니 당장은 무시하려고 했다. 곧, 무시할 수 없게 되어 버렸지만.
“저…, 잠깐 교무실로 와 달라는데.”
“왜?”
“나야 모르지…? 그냥 전해 달래서.”
쉬는 시간에 한우주가 호출당했다. 말을 전한 애가 떠나자마자 나는 다시 한번 한우주를 쳐다봤다. 한우주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네가 아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안 했어.”
“…그럼 설마 들킨 건가?”
“아닐 텐데.”
“그럼 도대체 뭐야? 널 왜 찾아?”
한우주 저놈은 상황이 이런데도 표정 변화 하나 없다. 잔뜩 여유를 부리다가 겨우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한 마디 건네고 교실을 나갔다.
“뭐…, 가 보면 알겠지.”
“…….”
한우주는 멀쩡한데 또 나만 불안하지. 지난 경험을 되새길수록 한숨만 나왔다. 이번에도 밤까지 연락 안 받는 거 아니야? 그러나 걱정과는 다르게 한우주는 30분쯤 지나서 교실에 돌아왔다. 담임이 수업할 시간이지만 이 역시 뭔, 선생님의 사정으로 자습으로 대체되어 교실에는 학생들뿐이었다. 덕분에 대놓고 뒤돌아 한우주를 살필 수 있었다.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뭐야? 누가 부른 거야? 거기서 뭐래?”
“음.”
한우주가 조용히 교실을 훑어본다. 나는 그제야 수십 개의 미묘한 시선들을 눈치챘다. 아, 그렇지. 지난번 인하성이 교실에서 그 난리를 쳤으니…, 반 애들은 한우주가 이번 일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했으리라 짐작할 것이다. 아마 한우주가 아닌 다른 애였으면 단체로 몰려들어서 이거저거 캐물었을 것이 뻔하다.
한우주는 가방을 챙겨 들더니 교실 문 쪽으로 눈짓했다. 나가서 이야기하자는 건가?
“나도 가방 챙겨야 해…?”
“아니. 그냥 몸만 나와.”
한우주가 먼저 교실을 나가고, 나는 괜히 여기저기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따라 나갔다. 내게 딸려 오는 은근한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한우주를 따라 꼭대기 층 옥상 문 앞까지 갔다. 점심시간 때마다 와서 이제는 익숙한 장소이다. 평소, 특히 수업 시간에는 사람이 올 일이 없는 곳이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주변을 열심히 흘끔거리고 있는데 한우주가 대뜸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일단 받고 보니 오피스텔 출입 카드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썹을 찌푸리고 묻는다.
“이건 왜 주는 건데?”
“집 들어갈 때 쓰라고.”
“용도는 나도 알거든?”
“오늘 너보다 늦게 들어갈 수도 있어서. 또 어제처럼 밖에 헤매고 다니긴 싫을 거 아냐.”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눈썹 사이를 더더욱 좁히며 한우주를 쳐다봤다. 그러자 한우주가 엄지로 내 미간을 꾹 눌러 버렸다. 고개가 뒤로 젖혀진다.
“인상 펴.”
“아, 한우주!”
“지금 인하성 좀 보러 가려고.”
“엥, 에엑. 왜?!”
걜 또 왜 만나? 화들짝 놀라서 한우주의 손을 거의 뿌리치듯 치워 버렸다. 한우주는 여태 내 미간을 문지르던 손을 순순히 거두며 말했다. 잘 들어 보면 조금 삐진 말투다.
“별거 아니야. 그냥 확인차.”
“뭘 확인해?”
“…입단속 잘 하는지?”
“…….”
“…말로 물어볼 거야. 다른 짓 안 해.”
“어, 응….”
“멍청하게 또 엄한 생각 하고 있으면 모를까.”
“…….”
“농담이야.”
농담 맞나? 누가 농담을 저렇게 진지하게 하냐? 한우주니까 그러려니 해야 하나? 아, 모르겠다. 궁금한 거나 마저 물으련다.
“교무실에는 왜 간 거야? 갔더니 누가 뭐래?”
“그냥 확인차. 이거저거 조사하고 있던데? 인하성한테 맞은 거 맞는지 묻더라.”
“헐. 경찰이?”
“어. 나만 특별히 부른 것도 아니야. 운동부랑 트러블 있던 애들 몇 명 더 와서 얘기하고 있던데.”
“…나는 왜 안 불렀지?”
“학교에 인하성 얘기하면서 네 이름 꺼낸 적은 없어서 뭐…. 그래도 부를 수는 있겠다. 인하성이 난리 친 거 본 사람이 많다 보니.”
“나, 나도 그러면 경찰이랑 얘기해야 해?”
“어쩌면? 긴장하지 마. 확인 정도만 하고 마니까. 애초에 당한 입장인데 뭘 걱정해?”
맞는 말이긴 한데 보통 긴장하지 않나…. 한우주는 안 그런가 보다. 그럼 알아서 추슬러야지 뭐 어쩔 수 있나. 아니, 그보다…
“학교에서 알아서 인하성 처벌하고 마무리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갑자기 웬 경찰이야…?”
“그걸 지금부터 알아보려고. 다시 말하지만 나 이번에는 아무것도 안 했어.”
“알았어, 알았어.”
“대충 예상은 가.”
“뭘?”
“왜 이렇게 일이 커진 건지. 인하성이 혼자 죽기 싫었나 보지, 아마.”
“…….”
“뭐…, 선생 몇 명이랑 야구부 끌고 가는 건 상관없지만 혹시 모르니까.”
“인하성 어디 있는지는 알고?”
“그럴걸.”
“또 모호하게 말한다.”
“몰라도 알아보면 되니까 괜찮아.”
그러니까 지금은 모른다는 거네…. 한우주가 알아서 잘하겠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다.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카드나 잃어버리지 마.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나야 학교 끝나면 얌전히 집에나 갈 텐데 자기 생각이나 하지. 한우주는 오히려 날 걱정하는 눈치다. 나는 핸드폰 케이스에 출입 카드를 끼워 놓고는 보란 듯 한우주 쪽으로 내밀었다.
“됐지? 나 말고 네 걱정이나 해.”
나는 이 더럽게 비싼 핸드폰을 목숨만큼 중요히 여기기로 했다. 그러니 과장 조금 보태서 내가 죽지 않는 한 핸드폰과 출입 카드 잃어버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우주는 여전히 뭐가 마음에 안 드나 보다. 표정이 안 좋다. 뭐야…,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가?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한우주가 먼저 말한다.
“내 말대로만 했어도 걱정 안 했을 텐데.”
“뭐가?”
“출입 카드.”
“……?”
“입주민 등록하면 잃어버려도 로비에서 다시 발급받을 수 있으니까.”
“뭐?”
어이가 없다. 어제 얘기 끝난 거 아니었어? 아직도 그걸 신경 쓰고 있는 거야?
“원래 출입 카드 외부인한테 빌려주면 안 되거든.”
“아니, 이…이거 다시 가져가!”
“됐어. 너 집 들어가야지.”
“외부인한테 빌려주면 안 된다며!”
“그러니까 외부인 안 하면 되잖아.”
“내가 왜? 나도 집 있거든?”
“월세 내 놓고 3주는 못 들어가고 있는 거기 말하는 거야?”
“…곧 들어갈 거야.”
“곧? 언제?”
“어, 음…. 팔 나으면…?”
“왜?”
왜냐니, 나야말로 왜 이러냐고 묻고 싶다. 아니, 그냥 물어야겠다.
“사정이 있어서 신세 지고 있을 뿐이잖아. 얼른 해결하고 나가는 게 맞는 거지. 내가 뭐…, 네 집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내는 것도 아니잖아.”
“필요 없으니까 안 받는 건데.”
말이 안 통한다. 내가 이상한 거야? 이런 식으로 계속 같이 생활했다간 분명 한우주 연애에 지장이 갈 것이고…, 그러면 나는 현실로 돌아갈 수가…, 이런 거 다 집어치우고 생각해도 한우주를 이해할 수 없다. 답답함에 다시 한번 묻는다.
“야, 한우주. 너한테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자꾸 이래?”
“좋아서 그런가 보지.”
미친, 이게 뭐라는 거야.
“뭐???”
“왜?”
“뭐, 이, 어, 야, 뭔, 야!”
“몇 번을 부르는 거야.”
“아니, 하, 무슨. 좋긴 뭐가 좋아?!”
“좋은 게 왜? 뭐가 어때서?”
그냥 한우주 무시하고 교실로 뛰어가도 되나? 그만 대화하고 싶다. 뭘 더 묻기가 무섭다. 말문이 막혀 입만 벙긋거리는데 나를 두고 한우주가 멋대로 제 할 말을 한다.
“너도 알잖아. 나 혼자 있기 싫어하는 거.”
“…….”
“같이 있으면 좋던데, 나는.”
“나, 나 말고 다른 사람 찾아. 돈 받고 룸메이트 들여. 아니, 정 필요하면 돈 주고 데려와!”
“돈 주면 계속 내 집에서 살게?”
“뭐? 누가?”
“너.”
“미….”
미친….
이 미친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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