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말이 안 나온다. 진짜 나한테 왜 이래? 어, 미친. 머리 안 돌아가. 안 되겠다. 이 자식 더 억지 부리기 전에 눈앞에서 치우자.
“너, 너 빨리 가. 인하성 보러 간다며!”
“음….”
“걔가 입 잘못 놀려서 감옥 가면 어떡할래? 감옥으로 이사할 거야?!”
“알았어. 그럼 천천히 생각해 봐.”
“뭘 생각해!”
“내 집에서….”
“얼른 가기나 해!!”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감정을 듬뿍 싣고 한우주 등을 세게 밀었다. 꿈쩍도 안 한다. 아, 빡쳐. 한우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얕은 한숨을 쉰다.
“연락할게. 이따가 봐.”
“그래. 가라, 가!”
한우주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이 황당함을 진정시키기에 바빠 제자리에 서 있었다. 한우주는 계단을 다 내려가선 내 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장난스레 웃는다. 저 미친놈. 딱 욕하려는 때에 얼른 사라져 버린다.
한우주 진짜 싫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아주 사람 놀리는 데 재미 들렸지? 이런저런 감정…, 아마도 분노로 열이 올라 얼굴이 홧홧했다. 짜증이 나서, 마음이 어수선해서, 진짜 한 대만 세게 쥐어박고 싶은 생각에 좀처럼 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한우주 이 자식 때문에 한 교시를 통째로 날렸다. 자습 시간이라고는 해도 나는 인생 처음으로 자발적 땡땡이를 친 셈이라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다 다시 화가 나서 온갖 책임을 한우주에게 미루고 속으로 욕을 마구 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나 왜 이렇게 흥분했냐? 스트레스 때문인가? 요즘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낯설었고, 나의 감정이 성가셨다. 싫으면 적당히 무시하면 될 것을 왜 이렇게 난리를 치는지.
한우주도 한우주인데, 안태원 너도 참 이상한 놈이구나.
***
하늘이 잿빛이다.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듯 묵직한 구름에 뒤덮인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낮아 보여서, 옥상에서 손을 뻗으면 구름을 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어제 본 꽃나무가 생각났다. 만개한 벚꽃이 참 예뻤는데. 비 내리고 나면 꽃잎 다 떨어지겠다. 진작 꽃놀이 한번 갈 걸 그랬나? 그러다가 깨달았다. 내 처지에 뭐 이렇게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냐…? 꽃놀이는 현실에 돌아가서 하면 되잖아.
‘어, 그러고 보니 한우주 우산 가지고 있나?’
없을 것 같다. 우산 가지고 나온 기억이 없다. 애초에 비가 올 줄도 몰랐고…. 우산 살 돈은 있을 테니까 괜찮겠지? 괜히 비 맞았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고생할 텐데.
“조현우, 현우야. 교무실에서 너 불러.”
“아? 어, 응. 알았어.”
그새 또 태평한 생각을…. 한우주한테 옮았나? 교무실에서 부른 게 차라리 다행이다. 아니면 계속 비가 어쩌니, 한우주 우산이 어쩌니, 꽃잎이 떨어지니 마니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우주의 말대로 겁먹을 필요가 없었다.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다지 불쾌한 일도 없었고, 10분쯤 지나니 대화는 끝나 있었다.
곤란한 일은 그 뒤에 벌어졌다. 어느덧 다가온 점심시간에 반 애들 몇몇이 내 자리로 몰려와서는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아, 맞다. 조현우 인싸였지. 적당히 상대하고 있자니 대화가 점점 불편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조현우. 경찰 만나고 온 거? 그 사람들이 뭐래?”
“아니, 야. 뻔한 걸 왜 물어보냐. 그것보다 아까 한우주랑 나가서 도대체 뭐 한 거야?”
“아, 맞다. 그렇네. 근데 한….”
한 명이 말하다 말고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춘다.
“한우주 어디 갔지? 그거 진짠가. 조현우 넌 알아?”
“…뭘?”
“인하성 한우주한테 주먹질 한 번 했다고 퇴학당했다던데. 한우주가 개 빡쳐서 야구부도 조지고?”
“…….”
이건 또 무슨 개소리냐. 언제 전학에서 퇴학이 된 건데…? 한우주가 인하성을 조진 건 사실이지만 야구부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 아무래도 다들 한우주를 멋대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마음껏 불쾌해하자니 양심이 쿡 찔렸다. 나도 처음 소식 듣고 한우주가 한 짓인 줄 알았으니까.
“뭐 들은 거 없어? 존나 붙어 다니던데.”
“그런 거 없어.”
알아도 말해 주겠냐. 조현우가 입이 싼 이미지인가? 아니, 그보다 이 새끼들 내 팔 안 보이냐. 아직 깁스 중인데 인하성이 어쩌고 잘도 말한다?
…라고, 속으로만 따지고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놈들 지금까지 내 옆에 한우주 붙어 있어서 말 못 붙인 거지, 별것이 다 궁금했구나.
뭔 놈의 질문을 20개는 연달아 들은 것 같다. 그중에 반 이상이 한우주 관련한 거다. 물론 하나도 답하지 못했다. 정신없어 죽겠네. 이 성가신 것들 좀 떼어 내고 싶은데 방법이 생각 안 난다. 화장실 칸 안으로 뛰쳐 들어가서 문이라도 잠가 둬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현우야? 어, 한우주 없네. 얜 어디 갔어?”
몰려든 반 애들 사이로 불쑥 서연준이 나타났다. 세상에, 아는 얼굴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아니, 거의 외쳤다.
“아~! 맞다! 오늘 연준이랑 점심 먹기로 했지!”
“응?”
“와 진짜 배고프다. 얼른 가자. 이러다 굶어 죽겠어. 하하.”
말하며 열심히 서연준에게 눈짓한다. 그런데 서연준이 영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기우뚱거린다. 이러다 반 애들이 뭐라 하겠다. 제발…! 서연준은 내가 헛기침을 하며 “아, 위장이 쪼그라든다!” 하고 외치는 걸 보고 나서야 무언가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어…, 응? 그, 그래. 죽으면 큰일 나지. 가자.”
다행히 서연준은 눈치껏 내게 맞춰 주었다. 반 애들이 뭐라고 할 수 없게 곧장 반을 나서 어디로든 가 버렸다. 그새 익숙해진 길을 따라 도달한 곳이 아까 한우주랑 왔던 옥상 앞 계단이다. 지쳐서 아무 데나 주저앉자 서연준이 바로 옆에 자리 잡고는 말을 건넨다.
“방금 뭐였어?”
“아…. 미안.”
“응? 사과할 건 아니고 궁금해서.”
“애들이 곤란한 걸 묻길래….”
“아, 그럼 배는 안 고픈 거야?”
“음. 지금은 별로.”
“난 진짜 배고파서 그런 줄 알았어.”
서연준이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며 시선을 맞춰 온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눈을 피하고 말았다. 솔직히 서연준이랑 단둘이 있기 조금 어색하다. 딱히 할 말이 없다.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생각나는 거라곤 전부 이런 식이다. 너 한우주랑 연애할 생각 없어? 한우주를 어떻게 생각해? 한우주를 보면 설렐 때가 있니?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안 될 일이니 참을 수밖에.
…잠깐, 고민할 거 없이 한우주 이야기나 하면 되겠네. 서연준이 한우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볼 좋은 기회 아닌가? 안 그래도 서연준과 한우주 사이에 뜬 이벤트들 때문에 내내 신경 쓰였다. 마지막에 본 이벤트가 뭐였더라.
슬그머니 ‘메뉴’의 ‘인물 수첩’을 열어 확인한다. 맞아, 「지독한 무지함」이었다. 그때 서연준이 나…, 그러니까 조현우더러 자주 아프니 가족이 걱정하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한우주가 괜히 끼어들어 까칠하게 굴었던 기억이 난다. 진짜… 이놈의 한우주….
‘어떻게 해야 서연준이 한우주한테 연애 감정을 느낄까?’
적어도 한우주가 자기를 싫어한다, 혹은 귀찮아한다고 생각하면 안 되겠지. 뭐라고 이야기를 꺼내면 좋을지 고민하며 서연준을 흘끔거렸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서연준은 평소처럼 온화하게 웃고서는 내게 물었다.
“왜 그래? 나한테 할 말 있어?”
“어…? 아, 음. 그러니까.”
“편하게 말해.”
아직 뭐라고 말할지 정리 못 했는데. 아오, 어떻게 물어야 자연스러울까?
“하안…….”
“응. 한?”
“한우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어.”
“…….”
“…….”
서연준은 퍽 당황한 눈치다. 다짜고짜 한다는 말이 저 꼴이니 이상할 만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더 나은 말이 생각나는 것도 아니라 말재주 더럽게 없는 내 처지를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아….
말재주가 없을 거면 눈치도 같이 없던가. 서연준의 혼란함과 애써 침착하려는 노력이 고스란히 읽혀서 괴롭다.
“…그러고 보니 아까 자리에 한우주가 없더라. 아예 안 온 건가? 현우 넌 어떻게 된 건지 알아?”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얘 지금 말 돌린 건가? 그래, 뭐. 질문 꼬라지가 저래서 대답하기 싫은 거면 어쩔 수 없다.
“한우주 걔 집에 갔어.”
“어디 아프대?”
“그건 아닐걸….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지만 건강해 보였어.”
“그렇다면 다행이네.”
그래도 한우주 걱정하는 거 보면 역시 가능성 있는 거겠지. 한우주만 잘하면 되겠다. 한우주만….
“아까 뭐라고 했더라. 한우주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랬나?”
“아, 응.”
답하기 싫어서 넘긴 게 아니었구나. 서연준은 진중히 답하려는 것처럼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안 지 오래된 친한 친구지. …으음, 아닌가? 한우주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꽤 친하다고 생각해.”
“…….”
몇 번을 생각해도 한우주 탓이다. 요즘 한우주가 서연준 대하는 게 영 시원찮았잖아. 어떡하지. 나라도 어르고 달래면 마음이 좀 풀릴까? 그때 서연준이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여러모로 걱정스러운 면도 있고.”
“…!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서연준 루트는 서연준이 한우주를 걱정하고 챙겨 주다가 사랑으로 발전하는 게 포인트니까.
“그런데 요즘엔 좀 덜해.”
“아니, 왜?!”
“…….”
서연준이 가만히 나를 응시한다. 내 얼굴에 묻었나? 뺨을 더듬으니 서연준이 웃는다. 저건 또 왜 웃어. 그리고 곧 경악스러운 말을 듣고 말았다.
“현우 네가 있어서?”
“…뭐?”
“요즘엔 우주 옆에 네가 있으니까 덜 걱정돼.”
“…….”
아니, 안 되지.
서연준 너는 한우주가 1초에 숨을 몇 번 쉬는지도 신경 쓰고 걱정해야지.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내가…, 조현우가 도대체 뭐라고 저런 말을 해? 가진 거 하나 없이 한우주 옆에 빌붙어 있는 거 제외하면 하는 게 뭐가 있냐?
조현우를 아예 조연으로 개명해 버릴까? 제발 너희 관계에서만큼은 날 투명 인간 취급해 달라고. 한우주는 서연준이 필요하다. 아니, 서연준은 한우주에게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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