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내, 내가 왜? 나 하는 거 없는데?”
“꼭 뭘 해야 하는 건 아니지. 옆에 있는 것만으로 도움이 되기도 하잖아.”
“나 도움 안 되는데???”
“응? 아니야. 안 그래.”
“도움 안 된다니까?”
“도움 돼. 내가 보장할게.”
그런 보장 필요 없어! 이게 무슨 대화냐? 그래서 서연준 쟤는 뭐야. 내가 한우주 옆에 있으니까 별걱정이 안 든다…. 나 때문에 둘이 연애 못 하는 거다 이거야?! 아, 골이야. 머리가 핑 돈다. 내 심정이 어떤지도 모르고 서연준은 계속해서 잘만 떠들었다. 나름 위로라고 하는 말 같은데 내게는 멘탈 폭격 그 이상이다.
“나는 뭘 못 해 줘서 안달이니까. 요즘 부쩍 느끼는데 난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걸 못 하더라.”
“뭘 해 주고 싶으면 그냥… 하면 되지.”
“지금 한우주에게 필요한 건 그게 아닌 것 같아서. 되레 귀찮아할걸.”
“…….”
맞는 이야기라 할 말이 없다. 서연준이 옆에서 힘껏 챙겨 줘 봤자 참견하지 말라고 성질낼 것 같은데. 한우주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아무튼, 필요성을 못 느껴서 그래. 요즘 한우주 기분 좋아 보이니까.”
“그, 그래?”
“응. 최근 몇 년 중에 요즘이 가장 좋아 보여.”
“하…, 미치겠네.”
“어?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서연준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다. 혼잣말인지 내게 하는 말인지 모를 것을 조용히 읊조린다.
“좋을 때 곁에 둘 사람은 못 되나 봐, 나는.”
“…….”
찰나의 순간 눈부신 빛이 창밖을 덮어 버린다. 그리고 얼마 뒤, 천둥이 세상을 무너트릴 듯 크게 울렸다. 쏴아아, 검은 먹구름이 기어코 비를 쏟아 내고 만다. 서연준은 창밖을 잠깐 바라보고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태연히 말했다.
“비 많이 온다. 우산 가져왔어?”
“…아니.”
“괜찮겠어? 집 어떻게 가려고?”
“하교할 때쯤엔 그치지 않을까?”
“음…, 그치려나. 그때 가서 곤란하면 말해. 우산 씌워 줄 수 있어.”
“어?! 아니, 아니야. 괜찮아!”
“아….”
서연준의 표정이고 목소리고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마음이야 고맙지만, 서연준이랑 우산 같이 쓰기도 좀 그렇고 무엇보다 난 한우주 집으로 귀가할 텐데…. 한우주 집 생각하니 또 머리가 아프다. 얼른 나오든가 해야지….
-좋을 때 곁에 둘 사람은 못 되나 봐, 나는.
조금 전 서연준이 했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돈다. 한우주의 꾸준한 거절과 신경질 때문일까? 서연준은 자신감이 부쩍 떨어진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다. 서연준은 누굴 돕고 챙기는 것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는 캐릭터니까.
“만약에 계속 비 오면…, 편의점까지만 부탁할게. 고마워.”
“응. 그러면 내가 수업 마치고 너희 반으로 갈게.”
나의 말이 효과가 꽤 있었나 보다. 서연준 표정이 전보다는 밝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더 착잡하고 피곤했다.
서연준이 시무룩해서 자신의 역할을 잊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그랬다간 자존감이 바닥을 치다 못해 땅굴을 파서 들어가 버릴 것이다. 자존감 낮은 서연준은 무슨 일을 벌일 것인가?
글쎄, 만약 사랑에 빠진 상태이고 대상이 분명하다면 상대방을 감금할 것이다. 그게 아닌 경우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한우주가 살려 달라고 바닥에서 굴러도 ‘내 도움은 필요 없을 거야.’ 하고 넘어갈지도 모른다.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될 일이다. 젠장, 나 뭐냐? 하다 하다 이제는 공략캐 멘탈 관리까지 해야 하는 거야?
‘고작 조력자가 하는 일이 이렇게 많아도 돼? 이 정도면 노동 아니냐? 시급 쳐서 월급 줘라, 진짜.’
허공을 노려보며 속으로 마구 욕했다. 이 망겜아. 내가 어떻게든 여기 탈출해서 개발자 고소하고 만다. 뭐든 할 거라고. 알았어?!
“그러고 보니….”
아직 욕 덜 했는데 갑자기 서연준이 말을 거는 바람에 흐름이 끊겼다.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 괜찮아?”
“일요일…?”
“응. 같이 공부하기로 했잖아.”
아, 맞다. 분명 그런 약속을 했다. 시험공부는 핑계고 한우주랑 서연준 붙여 놓고 연애시켜야 한다.
“괜찮지. 일요일 일정 텅텅 비었어!”
“한우주한테도 물어봐야겠다. 현우 너 우주 집 어딘지 알아?”
“…아, 아마도?”
“시간만 정하면 되겠네. 내가 이따가 한우주 껴서 단톡방 만들게. 그때 셋이서 정하자.”
서연준이 말을 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을 향해 손을 내민다.
“슬슬 일어나자. 점심시간 끝나기 전에 뭐라도 먹어야지.”
기시감이 든다 싶었는데 저번에 한우주도 이랬었다. 혼자 일어날 수 있는데 굳이 이런다.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짧은 망설임 끝에 손을 잡고 일어난다. 거절했다간 은근히 상처받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 쪽에서 서연준 자존감 깎는 일은 없어야 했다.
***
빗줄기는 점점 거세지기만 했다. 수업을 전부 마칠 즈음엔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졌다. 우산을 혼자 써도 젖을 기세라 교실에 찾아온 서연준에게 사양의 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현우 넌 집에 어떻게 가려고?”
“나? 나는…, 음…. 일단 학교에 좀 있어 보고. 도서실이라도 가 있지, 뭐.”
“금방 그칠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떻게든 되겠지. 걱정하지 마.”
내가 서연준을 간과하고 실언했다. 서연준 앞에서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하다니, 예상컨대 서연준의 자체 필터링을 거치면 대충 이런 말이 될 것이다. ‘연준아. 나, 이대로 비에 잠겨 죽을지도 몰라. 살려 줘.’
서연준이 창밖을 응시하며 말했다.
“비 엄청 오네.”
“그러게.”
“나도 오늘은 학교에 좀 남아 있어야겠다.”
“어?”
“야자 하려고. 어차피 시간 채워야 해서.”
“너…, 아니. 그, 집에 안 가 봐도 돼?”
“응? 응. 괜찮아.”
이 자식이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겨우 삼켰다. 하마터면 서연준 스케줄 줄줄 읊으면서 따질 뻔했다.
서연준은 주 4일 월, 수, 금, 토 학원에 가고 화, 목에 야자를 한다. 학교 끝나고 학원 수업까지 조금 비는 시간이 있는데 그땐 집에서 막냇동생을 본다. 집에 조부모님이 계시긴 하지만 동생이 워낙에 서연준을 좋아하는 바람에 오후쯤 얼굴 한번 비춰야 한다. 안 그러면 아주 난리가 난다.
그러니까 오늘, 월요일의 서연준은 학교에 남을 스케줄이 못 된다. 동생 보고 학원 가야지 뭔 놈의 야자야, 야자는. 학교에 한우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이 중 서연준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도 없다. 답답해 죽겠네.
“…그래. 그럼 공부 열심히 해.”
“현우 너도. 혹시라도 밖에 나갈 일 생기면 연락해. 우산 빌려줄게.”
차마 대답은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도서실까지 쫓아오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야자실은 신청한 학생들만 사용할 수 있고, 그나마도 성적순으로 잘렸다. 조현우가 야자실을 신청했을 리는 없으니…, 학교에서 시간 때울 곳은 정말 도서실뿐이다.
서연준과 헤어지고 도서실로 향하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오재영과 강준희는 날씨 욕하느라 바빴다. 허지훈은 여전히 연락이 없고, 한우주한테서 메시지가 몇 개 와 있었다. 전부 온 지 얼마 안 된 것들이다.
「한우주: 인하성 만났어.」
「한우주: 저녁쯤에나 들어갈 것 같아.」
「한우주: 비 엄청 오는데….」
「한우주: 조현우 너 우산 없지?」
「한우주: 잠깐 학교에 있어 봐. 또 비 맞지 말고.」
인하성 만났다고…. 한우주 괜찮은 거 맞겠지? 걸음을 서둘러 도서실에 들어선다.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곧장 답장을 보냈다.
「조현우: 응. 안 그래도 지금 학교에서 버티는 중. 비 장난 아니야;;」
「조현우: 너도 우산 없지 않나?」
「조현우: 인하성은 뭐래? 별일 없는 거지?」
신경이 쓰여 핸드폰을 붙들고 있는데 다행히 금방 답이 왔다.
「한우주: 우산은 샀지.」
「한우주: 별일 없어. 앞으로도 없을 거고.」
「한우주: 이따가 만나서 자세히 얘기해 줄게.」
「한우주: 비 그치면 먼저 집 들어가고」
「한우주: 아니면 학교에 있어. 데리러 갈 테니까.」
알겠다고 답장하려니 그새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한우주: 아 맞다.」
「한우주: 병원.」
나도 잊고 있던 걸 용케 기억하냐. 웃음이 흘러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조현우: 됐어. 하루 빠질 수도 있지.」
「조현우: 거의 다 나아 가는데 뭐」
「한우주: 오늘은 어쩔 수 없는데」
「한우주: 방심하지 말고 좀 조심해서 다녀」
「조현우: 으 잔소리」
「한우주: 내가 틀린 말 했어?」
「조현우: 아뇨 조심할게요 우주 쌤」
「한우주: ???」
「조현우: ㅋㅋ일이나 마저 봐」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핸드폰을 가방 깊숙한 곳에 소중히 넣어 두었다. 이 비싼 거 누가 훔쳐 가거나 액정이라도 깨트릴까 봐 매번 다루기 조심스러워 죽겠다.
쿵, 천둥소리가 요란스럽다. 아무래도 비는 한참을 더 내릴 모양이었다.
‘한우주 올 때까지 뭐 하냐.’
가방에 수업 교재랑 이거저거 챙겨 오긴 했다. 중간고사가 딱 2주 남았으니까. 물론 여기서 시험 성적 챙길 필요는 없지만, 내 신분을 상기해 보면 공부를 안 할 수가 없다.
현실에 돌아가면 나는 고3이고 수능을 치러야 한다. 그 전에 1학기 내신부터 챙겨야 하고…. 아무튼 대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인 이상 공부를 해야 한다. BL 미연시 게임에 갇힌 뭣 같은 상황이어도 말이다.
교재를 하나씩 펼쳐 본다. 와, 새것처럼 깨끗하다. 나는 그간 정신이 없어 수업을 안 듣다시피 했고, 조현우 얘도 수업 안 들었나 보다. 덕분에 필기할 곳이 많아 쾌적하다.
도서실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그나마 들리던 빗소리도 집중하기 시작하니 의식 너머에 파묻혔다. 오랜만에 제대로 공부하니 기분이 좋았다. 내가 공부를 특별히 좋아하는 건 절대 아니다. 그저 BL 게임이니 엔딩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잊을 수 있어 마음이 편안할 뿐이다.
과목별로 하나하나 목표량을 해치우고 고전 문학 교재를 이제 막 펼쳤을 때였다. 눈꼬리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큰 하품이 나왔다. 그 뒤로도 계속, 계속…. 긴장이 풀린 탓인지, 날씨 탓인지, 아니면 내가 고전 문학을 안 좋아해서 그런가? 졸음이 마구 쏟아졌다.
‘…조금만 쉴까?’
연신 마른세수를 해 대다가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그대로 자리에 엎어졌다. 10분, 아니 20분, 길어도 30분이다. 조금만 눈 붙여야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고요함이 나를 깨웠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주변이 온통 캄캄했다. 불 꺼진 도서실 안에 남은 사람이라곤 나뿐인 것 같았다. 미친, 뭐야?
잠이 확 깬다. 급하게 일어나 도서실 문을 열어…, 여, 열려야 하는데?
덜컹, 덜컹.
무언가에 걸리는 소리만 날 뿐 문은 굳게 닫힌 채로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뭐지? 이게 무슨 상황이지? 뭔, 미친.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아니, 하? 어?? 나, 나 지금 도서실에 갇힌 거야?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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