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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42화 (42/150)

42화

“……아?”

“우주랑만 통화한 것 같아서.”

서연준 이 가정적인 녀석. 남의 가족까지 챙길 시간 있으면 연애나 해라. 저번에도 가족이 어쩌고, 비슷한 거 물어봤다가 한우주가 까칠하게 굴지 않았던가.

저번처럼 얼버무릴까? 아니면 그냥 사실을 말할까…. 조현우에게는 미안하지만, 가족 얘기 나올 때마다 당황하며 거짓말하기도 지친다. 무엇보다도 저번 같은 일이 또 생기는 건 곤란하다. 서연준이 모르고 가족 이야기를 꺼내고, 한우주가 뭐라 하고, 둘이 멀어지고, 내 마음은 와장창….

그래, 말하자. 서연준 최대한 안 민망하게 에둘러 말하는 거야. 근데 가족 없다는 말은 어떻게 돌려 말해?

“어…, 서연준아.”

모르겠다. 일단 이름부터 부르고 본다. 서연준이 시선으로 답한다. 얼른 끝내 버리자. 서로 민망한 건 한순간이야.

그러나 뜻밖의 저항감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가족이 없다는 말. 조현우의 이야기고, 조현우의 입으로 말하는 것인데도 말하는 건 내 의지라는 사실이 꺼림칙하다. 내가 왜 가족이 없어? 엄마랑 누나 말짱히 있는데. 사이좋고, 서로 아끼고, 의지하고, 또….

“모든 사람이 너 같은 건 아니야.”

물론 내 진짜 가족은 서연준네 가족 못지않게 화목하지만.

‘보고 싶다.’

고작 한 번 떠올렸을 뿐인데 물밀듯 쏟아지는 가족 생각에 마음이 서럽다.

“나는 가족이…….”

울컥, 무언가 올라오는 느낌에 급하게 고개를 숙인다. 이 미친 안태원아.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아니라고. 진정하고 차분히 마저 말해, 인마.

“…현우야?”

“가족이 없, 으흑.”

썅.

손으로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이미 늦어 버렸다. 설움을 이기지 못한 나의 눈물샘도, 입을 떠억 벌리고 눈만 끔뻑거리는 서연준도, 이제 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

“…….”

꼴사납게 펑펑 울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 낸다. 하필 울어도 서연준 앞에서…. 아니, 근데 쟤가 자꾸 가족 얘기를 하잖아. 그간 정신 건강을 위해 일부러 생각 안 했을 뿐이지, 사실 스트레스 엄청 받고 있었나 보다.

“그, 크흠. 서, 서연준?”

“…….”

눈물이 멎자 정신이 확 들었다. 현실에 돌아가 가족을 다시 보기 위해서라도 눈앞의 서연준을 어떻게든 해야 한다.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저번엔 왜 그냥 넘어갔어?”

“어?”

“내가 네 가족 얘기한 적 있잖아. 그러니까…, 현우 너 감기 걸리고 나서 학교 왔을 때….”

이번 질문에는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었다. 나의 몸, 나의 현실에서도 몇 번 겪은 일이니까. 생각해 보면 그때 서연준 앞에서 대충 얼버무린 것도 나의 버릇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때는 그냥 피곤해서. 설명하는 것만으로 지치는 일도 있잖아.”

오랜만에 아버지를 떠올린다. 친구들 사이에서 어쩌다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친구들과 같은 척, 없는 아버지를 지어내 말하곤 했다. 처음에는 친구들과 다른 것이 창피했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크고 나선 어설픈 동정이 그 어떤 욕설보다도 내 가슴을 후벼 판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그냥…, 없는 가족에 대해 함구하는 것은 나의 버릇이고 보호 본능이다.

조현우라면 어떻게 말했을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나와 비슷할 거라 짐작한다. 방금 들은 서연준의 질문만 생각해도 그렇다.

-저번엔 왜 그냥 넘어갔어?

서연준은 자신이 방금 한 말이 어떤 폭력성을 지니고 있는지 알까? 아마 모를 거다. 굳이 알려 줄 생각도, 질책할 생각도 없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는데 맞은편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서연준이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자조한다.

“아, 진짜…. 나 진짜 바보다.”

“…….”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가만히 입 다물고 서연준이나 쳐다봤다. 서연준은 연신 마른세수를 해 대다가 물었다.

“한우주는 알고 있어?”

“뭘? 가족 얘기?”

“응.”

“…아마도. 얼추?”

안 그래도 어두컴컴한 주변이 더 어두워진 것만 같다. 내쉬는 한숨은 갈수록 무거워지기만 한다.

“그래서 한우주가….”

“저기, 연준아? 나 진짜 괜찮거든.”

삽질 좀 멈춰 봐. 슬슬 보는 사람이 괴롭다. 아오, 서연준은 내 말이 안 들리나 보다. 비껴간 시선이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하고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한다.

“미안해. 내가 배려가 없었어. 현우 너한테도, 한우주에게도 못 할 말 한 것 같아.”

아니, 그러니까 괜찮…. 잠깐, 한우주? 이게 한우주한테도 미안할 말인가?

“한우주는 왜?”

“아….”

서연준이 뜸을 들인다. 뭐가 고민인지 제 턱을 매만지다가 겨우 목소리를 낸다.

“예전에 한우주한테도 비슷한 말실수를 해서.”

완전히 처음 듣는 이야기다. 서연준 루트 그 어디서도 서연준과 한우주가 과거에 다퉜다거나, 누군가 실수를 했다거나 하는 일화는 나온 적 없다.

“예전에도, 얼마 전에도…. 한우주가 화낼 만해. 난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예전에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건데? 흥미와 기회를 동시에 발견한 나는 짧은 고민 끝에 기회를 택했다. 이거 잘만 하면 서연준과 한우주의 거리를 좁힐 수 있겠구나 싶어서.

“그러면 가서 말해.”

“…….”

“앞으로 조심하겠다고. 내가 미처 네 감정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하면 되잖아.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인 거 아니야?”

서연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일반 루트와 비교했을 때에 서연준 행동이 어쩐지 소극적이다, 싶었는데…. 기존에 없던 대화, 없던 일이 새로이 생기면서 의기소침해 있었나 보다. 이번에 서연준을 잘만 꼬드기면 서연준 루트의 가능성이 열릴지도 모른다.

“오래 안 사이인 만큼 더 어려울 거 알아. 별게 다 새삼스럽고 괜히 유난 떠는 것 같고…. 그래도 한번 이야기해 봐. 미안한 거, 서운한 거 전부 다.”

“…….”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요즘 연준이 네가 한우주한테 서운한 것도 있어 보이고 해서… 괜히 내가 마음이 좀 그래. 둘이 그래도 오랜 친군데 잘 풀었으면 좋겠다. 참견 같으면 미안해.”

서연준이 고개를 떨군다. 뭐, 뭐야. 화났나? 설마 우는 건가? 나는 누구 달래는 데 소질이 없나…? 이렇듯 걱정뿐인 나의 예상은 완벽히 빗나갔다. 서연준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한 얼굴은….

“…응. 고마워. 신경 써 줘서.”

어둑한 밤, 의지할 만한 광원이라곤 핸드폰에 달린 작은 조명이 유일했다. 오롯이 서로에게 집중해야만 표정을 읽을 수 있었고, 나는 그마저도 반쯤은 감에 맡기고 있었다. 대충 이런 표정이구나, 저런 표정이구나, 짐작만으로도 대화하는 데 큰 무리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굳이 집중해 살피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서연준은 어느 때보다 기쁘게 웃고 있었다.

나는 내가 좋을 대로 서연준을 해석하고 멋대로 희망을 품었다. 한우주랑 쌓인 오해가 풀렸나 봐. 앞으로는 상황이 좀 나아질까? 서연준이 한우주에게 애정을 품게 될까? 내가 한 게임에서 본 것처럼 한우주도 서연준의 마음에 응하고, 엔딩을 보고….

내내 바라던 일이다. 다시 생각해도 그때 내가 품은 감정은 희망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숨을 참고 머지않아 한우주가 좋아하게 될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저녁을 거른 탓일까? 속이 쓰리게 아파서,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문 너머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한우주와 연락한 지 20분 즈음이 지난 때였고, 이 밤에 복도를 거닐 사람은 달리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발소리의 주인을 짐작하지 못했다. 평소의 한우주와는 다르게 걸음에서 조급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집스레 제자리를 지키던 문이 열린다. 문턱에 선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느낌이 익숙해 바로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반 이상은 기럭지 보고 안 거기는 한데, 하여튼.

마음 같아선 반가움에 곧장 달려가 반겨 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한우주!”

한우주를 부르는 서연준의 목소리에 발목이 붙잡힌 것만 같다. 그저 멀거니 서서 서연준의 등을 바라보았다. 저 둘과 나의 사이에 유리 막이 하나 세워진 것만 같다.

‘사실 그게 맞긴 하지.’

둘은 정해진 정보 값에 따라 움직이고, 나는 그저 지켜보고. 현실의 내게는 그게 당연하다. 사실 조현우도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거리를 두고 지켜볼 뿐, 둘의 사이에 직접 개입하는 일은 없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둘이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관찰했다. 숨을 죽이고, 이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오늘 종일 안 보이더니 이 밤에 학교를 다 오네.”

“…어. 그러게.”

“밖에 비 많이 오는 거 같던데 안 젖었어?”

“우산 썼잖아.”

“좀 젖은 거 같은데?”

“바람 불어서.”

“고생했네.”

“별로…. 서연준 너는 왜 여기 있는데?”

“나?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바보 같아.”

“아하하…, 그러게.”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 한우주가 신경질을 부리는 일도, 서연준이 어색해하는 일도 없다. 이제야 안심이 된다. 기쁘기도 하고.

‘……이게 기쁜 건가?’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다. 불쾌함과 기쁨이 공존할 수 있었나…? 왜 이렇게 불편하지. 아니, 나는 갑자기 뭔 생각을 하는 거냐? 내가 로봇도 아니고. 내 감정 하나 파악 못 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을 거 아니야.

“거기 서서 뭐 해?”

끔뻑, 눈을 깜빡이자 내 앞을 가로막은 유리 막이 사라졌다. 한우주가 내게 말을 건 탓이다.

“뭐 하냐니까.”

한우주가 서연준을 두고 도서실 안쪽으로 들어왔다. 아까와는 다른, 내가 아는 원래의 차분한 발걸음으로. 바로 앞까지 다가와 마주 선 한우주가 내 팔을 잡는다.

“이제 나가야지.”

한우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팔을 잡아끄는 힘에 얌전히 따르며 걸음을 옮겼다. 내 팔을 쥔 크고 섬세한 손에 시선을 둔 채로 생각한다.

아까는 잠깐 피곤해서 헷갈렸나 봐. 나는 로봇도 아니고, 멍청한 것도 아니다. 슬며시 올라간 입꼬리와 들뜬 마음이 나의 감정, 의심할 여지도 없이 순수한 기쁨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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