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신발이 수분을 흡수하기라도 한 건가, 가볍기만 하던 발걸음이 점차 묵직해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보기만 해도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비 한번 징그럽게 온다. 어떻게 저걸 뚫고 집에 가냐.
서연준은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다. 벌써 저 앞에 가서는 우산을 펼치려다가 뒤를 돌아본다.
“너희 왜 그래? 집 안 가?”
“신경 쓰지 말고 먼저 가.”
바로 곁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한우주는 나를 따라 걸음을 멈춘 모양이다. 그러곤 서연준을 향해 한 손을 들어 보인다. 검지 끝에 걸린 열쇠고리가 허공에서 흔들렸다.
“경비실 들러야 해서. 이거 돌려드려야 해.”
“현우는?”
“우산 없는 거 같길래 씌워 주려고. 나랑 집 방향 같거든.”
“…….”
서연준은 말없이 한우주를 쳐다보다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눈이 마주쳐 깜짝 놀랐다. 나는 혹여 내가 우주 집에 얹혀사는 게 티가 날까 봐 아까부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런 처지에 서연준의 시선이 달가울 리가 없다. 할 말 있으면 빨리하든가, 왜 자꾸 쳐다보냐…? 입을 꾹 다물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그때 한우주가 말했다.
“먼저 가. 네 동생 잠도 안 자고 기다리고 있는 거 아냐?”
“…아, 그러게. 그럼 나 먼저 갈게.”
“어. 들어가라.”
드디어 가나, 싶었는데 서연준은 고작 두어 걸음 옮겼다가 다시 이쪽을 봤다. 또다시 시선이 마주쳐 몸에 바짝 긴장이 들었다.
“오늘 고마웠어. 내일 또 봐.”
“응? 그, 그래. 내일 보자. 빗길 조심하고….”
감사 인사는 한우주를 향한 것일 텐데 왜 나를 보고 말하는 건지. 얼결에 마주 인사하고 말았다. 서연준이 싱긋 웃으며 눈으로 인사하고는 다시 걸음을 서두른다. 서연준의 뒷모습이 작아져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이었다. 디링, 익숙한 알림음이 울린다. 나는 이윽고 떠오른 시스템 문구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System: 이벤트 목록이 갱신되었습니다. :: 서연준 :: 불가능한 우연」
‘……?’
방금 일을 이벤트로 쳐주나 보다. 이번 것 역시 원래의 게임에선 본 적 없는 완전히 처음 보는 이름의 이벤트였다. 그런데 이벤트 명이 뭐 이렇게 의미심장하냐?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우연이 뭐 어쨌다는 건데?
“어딜 보는 거야?”
“와악!”
한우주가 불쑥 내 앞에 나타났는데 홀로그램 알림 창이 한우주의 몸에 뚫린 채로 일그러졌다. 모양새가 기괴해서 배로 놀라 버렸다. 한우주가 눈썹을 까딱인다.
“조현우. 너 요즘 자주 놀라는 것 같다?”
“…안 놀랐어.”
“거짓말.”
“거짓말 안 했는데?”
“알았어. 그런 셈 쳐. 집이나 가자.”
“그런 셈 치는 건 뭐야? 야, 한우주!”
저게 지 말만 하고 먼저 가 버린다. 그리고 우산을 펼치는데…, 잠깐.
“우산을 하나만 들고 왔어?”
“그러게.”
“그러게?”
불만족스러운 대답에 인상을 구기며 나름 살벌한 인상을 자아냈다. 한우주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지만.
“하나 더 가지고 올 생각을 못 했어. 급하게 오느라.”
“어…, 그럼 어떻게 해?”
“뭐가?”
“집에 어떻게 가냐고. 비가 저렇게 많이 오는데.”
한우주가 펼친 우산을 보란 듯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같이 쓰면 되잖아.”
“…우산을?”
“어.”
“너랑 내가?”
“응.”
“왜???”
해 지고 비까지 쏟아지는데 데리러 와 준 사람에게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나의 황당함도 헤아려 주어야 한다. 방금 공략캐 한 명 떠나보내고 나랑 우산 같이 쓰는 게…, 이 상황이 미연시적으로 말이 되냐?
한우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대뜸 우산을 내 쪽으로 내민다.
“같이 쓰기 싫으면 네가 써.”
“너는?”
“난 맞고 가지 뭐.”
“야, 그게 무슨….”
“그럼 어떻게 해? 우산은 하나뿐인데. 나랑 같이 쓰기는 싫으면서 내가 비 맞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그냥 한우주 너 혼자 써.”
“깁스나 풀고 말해라. 또 붕대 적시려고? 어차피 혼자 못 갈 거 아니야. 집 가서 내가 갈아 줘야겠지. 너 비 맞으면 나만 고생해.”
“…….”
하나같이 맞는 말이다. 그치만 넌 미연시 주인공이잖아! 하고 외칠 수도 없다. 괜히 이상하게 보이기 싫으면 그냥 얌전히 같이 쓰는 게 답이다. 머리로는 완벽히 이해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자꾸만 가슴 한구석이 뭉근하고 거부감이 들어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한우주는 재촉하는 말 한 번 않고 묵묵히 나를 기다려 주었다. 그 모습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또 바보같이 유난 떠나 봐. 친구끼리 우산 좀 같이 쓸 수 있지, 뭐가 그렇게 찝찝하다고….’
동시에 한우주에 대한 미안함까지 커져서, 결국 나는 한우주와 같은 우산 안에 나란히 설 수밖에 없었다.
경비실에 열쇠를 반납한 후 곧장 집으로 향했다. 나는 어쩐지 긴장이 되어 말 한마디 없이 바닥만 보고 걸었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 봤자 빗소리에 묻혀 잘 안 들릴 것이 뻔하다.
그래, 빗소리 한번 더럽게 시끄러웠다. 그러니까…, 한우주의 행동도 아예 이해 못 할 것은 아니다.
“조현우.”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기절하는 줄 알았다. 한우주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나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 혹 숨결이 닿을까, 싶어서.
조금 떨어져 달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인간은 숨 참는 것과 말하는 걸 동시에 할 수가 없더라. 망할,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나려 했을 뿐인데 당황한 몸이 멋대로 허둥지둥한다.
‘아, 미친.’
발이 꼬였다. 몸이 기우는 순간 반사적으로 눈을 꾹 감아 버린다. 나는 내가 그대로 넘어질 줄 알았다.
“…너 뭐 해? 정신 좀 차리고 다녀.”
눈을 뜬다. 분명 멀어지려 했는데 왜 한우주 얼굴이 아직도 코앞에 있는 거냐. 게다가 몸이 안 움직인다. 무언가가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
…감싸 안았다?
뭐가?
한우주의 팔이….
‘…….’
미쳤냐? 미친 듯. 미쳤다. 응, 다 미쳤다. 망했다. 나 무슨 생각 하는 거지? 모른다. 내가 모르면 누가 알아? 그것도 모른다.
“안 놀란다면서.”
한우주. 제발 이렇게 가까이서 한숨 쉬지 말아 줄래. 닿는다고. 간지럽다고. 아, 진짜. 목소리가 안 나온다.
“순 거짓말쟁이네.”
나를 감싼 팔을 거두며 한 마디 덧붙인다.
“좀 더 붙어서 걸으라고. 젖을 거 같으니까.”
“…….”
입술에 접착제라도 발랐나? 아까부터 입이 안 떨어져 뭔 말을 못 하겠다. 그저 얌전히 한우주의 말이나 따랐다. 아, 좀 큰 우산을 들고 오지. 배은망덕한 생각을 하며 발 맞추어 걷는다.
돌아가는 길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집까지 걸어갈 동안 왜 간단한 생각 하나를 못 떠올렸을까? 오는 길에 편의점이 몇 개인데. 우산 하나 더 샀으면 됐잖아. 아니면 택시를 타든가….
“아니, 야. 한우주. 이게 다 뭐야?!”
“뭐가?”
얜 뭐가 이렇게 태연해? 한우주나 나나 참 미련하고 바보 같다. 불도 안 끄고 나온 건지 온통 환한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한우주의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우산을 썼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어깨부터 소매까지 아예 푹 젖어 버린 것을 보자 정신이 번뜩했다. 이러면 됐을 텐데, 저러면 됐을 텐데, 왜 그냥 걸어왔을까. 뒤늦은 후회가 속에서 마구 빗발친다.
“아니, 너 진짜. 하….”
나는 젖은 곳 없이 말짱해서 더 어이가 없어 죽겠다. 한우주 쟤 진짜 뭐 하자는 거야? 그새 내 시선을 읽었나 보다. 젖은 팔을 한 번 흘끔거리곤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시원해서 그냥 둔 거야.”
이게 뭔, 말 같지도 않은 말이냐?
“한우주 또 억지 부린다.”
“억지? 내가?”
한우주가 제 팔을 들어 살피며 되묻는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천이 살갗에 들러붙은 게 보는 것만으로 나까지 눅눅해지는 것 같다. 나는 젖은 부위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팔, 어깨, 그리고 죽 이어지는 가슴께까지. 하필 교복 차림이라 셔츠가 하얘서…….
“내가 억지 부리는 것 같아?”
방황하는 시선을 갈무리하지 못해 아예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아까부터 속이 자꾸 울렁거린다. 먹은 것도 없는데 체한 건가? 이 망할 몸의 온갖 곳이 요란을 떠는 와중에 한우주가 집요하게 물음을 던진다.
“그러면 내가 왜 그런 것 같은데?”
“…뭐?”
“내가 뭐 때문에 내 우산 쓰고 내 집 오는데 팔 한쪽을 다 젖게 두겠냐고.”
“…….”
내가 어떻게 알아.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한우주 속마음 같은 거 이해하려 들면 피곤할 뿐이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한 1초 생각하려 들었을 뿐인데 머리가 어지럽다. 덕분에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막 나왔다.
“시, 시원한 게 좋아서 그랬나 보지.”
“그거 내가 처음 한 말인데, 네가 억지랬잖아.”
“…억지 아닌가 봐.”
“그새 생각이 바뀌었어?”
“어, 시원하게 비 좀 맞고 싶을 수도 있지. 내가 괜히 꼬아서 생각했네. 미안하다. 오해 끝이야.”
나 지금 뭐라고 하고 있냐? 아무 말이나 우다다 내뱉는데 웃음소리가 들렸다. 뭐야? 나는 안 웃었다. 아, 한우주가 웃었구나. 쟤는 왜 허구한 날 이상한 타이밍에 웃어?
“그래. 이번에도 그런 셈 쳐.”
뭐를? 되물으려다 말았다. 아니, 물을 수가 없었다. 한우주가 젖은 곳 없이 멀쩡한 쪽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려서 안 그래도 없는 정신이 죄다 증발해 버렸다.
“난 씻으러 간다. 너도 씻고 쉬어.”
뭐라 대답했는지도 모르겠다. 대충 잘 자라, 그런 말 했겠지. 한우주가 멀어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집 나간 정신이 돌아왔다. 그 뒤로는 그냥… 씻고 잘 준비나 했다. 침대에 가지런히 누워 이불을 덮고 눈을 감는다. 이상할 정도로 심신이 피곤했다.
‘왜 아직도 속이 울렁거리냐.’
언제부터 이랬더라? 시작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한우주랑 집에 걸어오면서 더 심해진 것 같다. …왜지? 원인을 파고들어 보아도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어 답답하다.
아무래도 오늘의 나는 이상하다. 자꾸 머릿속이 하얘지고, 긴장하고, 머리에 피가 몰릴 때도 있고, 속까지 울렁거리니….
사람 속이 언제 울렁거리더라. 뭐 잘못 먹었거나, 긴장했거나, 너무 화나거나, 역겨울 때? 한우주랑 있을 때 자주 그런 것 같은데…, 잠깐만.
설마 나…,
한우주를…….
…엄청나게 싫어하나?
속이 안 좋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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