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으음…….
‘아닌데…. 내가 한우주를 싫어할 이유가 뭐 있다고?’
연애 안 해서 속 썩이고, 사람 자주 놀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들고, 씀씀이가 헤프고, 마트 초밥을 싫어한다. 쓴 걸 좋아하고 단 건 싫어하는 게 입맛까지 안 맞는다. 또…, 치킨 제대로 먹을 줄 모르지. 아침마다 늦잠을 자고도 수업 시간에는 잠만 자고…….
…어라, 싫어하는 거 맞나?
아니, 아니지.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생각해 봐. 한우주랑 안 맞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좋은 면이 더 많지 않아?
나는 한우주를 싫어할 수 없는 이유를 하나씩 늘어놓기 시작했다. 일단 먹여 주고 재워 주고 곤란할 때마다 가장 먼저 도움을 줬다. 가끔 약 올리는 거야 뭐, 악의적으로 그런 것도 아니잖아. 장난칠 때는 인간다운 면이 드러나는 게 나쁘지 않았다.
이유를 하나 떠올릴 때마다 잠이 쏟아졌다. 이거… 양 세는 것보다 효과가 좋은 것 같다.
어쨌든…, 한우주는 응징의 방식이 과격하긴 해도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이다. 대담하면서도 배려심이 깊다. 오늘만 해도 비 오는 날 밤에 학교까지 데리러 왔잖아. 게다가 키 크고 예쁘고 잘생겼다. 운동이 취미라더니 몸까지 좋다.
‘……?’
뭐…, 전부 차치하고 내가 한우주를 싫어하지 않는 건 확실하다. 그러면 뭐지? 왜 속이 안 좋지? 그냥 컨디션이 저조해서 그런가? 조현우의 나약한 몸이 구린 날씨에 영향을 받은 걸까? 아니면 조현우 몸에 탑재된 기능인가…. 한우주가 조현우랑 놀다가 연애 못 할 일 없도록 만든 보호 장치…….
졸려서 그런지 생각이 점점 기상천외해진다. 나중엔 한우주가 외계인이라 지구인인 내 몸이 반사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좀 미친 것 같다.
나는 그럴듯한 이유도 찾지 못하고 이상한 상상이나 하다가, 잠들 때까지 속만 잔뜩 울렁거리고 말았다.
***
학교가 야구부 일로 난리가 난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도서실에 갇힌 일 때문에 놀란 것도 있고, 한우주가 괜찮다고 말하기도 했고, 만나서 얼굴 보니 정말로 괜찮은 것 같아 머릿속에서 홀랑 지워 버린 것이다.
‘내가 야구부 누구한테 들었는데~’라는 식의 소문은 무성했지만,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운동부 애들 외에는 이번 일에 진심으로 관심 있는 사람도 없고, 시험이 정말로 머지않은 탓에 며칠 시끄럽고 말았다.
나 역시 인하성이고 야구부고 완전히 질려서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한우주에게 자초지종을 물은 이유는 이전과 다름없다. 그저 인하성이 여전히 한우주에게 위협 요소로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한우주는 나의 물음에 기꺼이 답하였다.
“인하성 짓은 아니야.”
“아니야? 걔가 그렇대?”
“본인도 그렇다고 하고, 알아보니 거짓말은 아니더라고.”
“…그럼 뭐야? 인하성 아니면 누가 이런 짓을 해?”
“음, 걔 가족이 벌인 일 같던데.”
가족…. 인하성 가족이면 부모 말인가? 바로 얼마 전에도 학교에 와서 소리를 지르긴 했다. 한우주는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애초에 폭력 건 조사하러 온 것도 아니야. 그건 부차적인 목적에 가깝고, 본 사건은 입학 비리랑 횡령 정도?”
“…응??”
“돈 받았다고. 야구부 감독이 학부모들한테.”
“…….”
“야구 위원회 지원금 빼돌린 것도 있고. 파니까 자꾸 뭐가 나오던데? 음…, 조만간 학교 사람 여럿 사라지지 않을까.”
진짜 이게 뭔 일이냐.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대답이라 뭐라 반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인하성은 알아서 잘 요양하고 있고, 앞으로 입 함부로 놀릴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알았어.”
그걸 어떻게 장담하는지 궁금하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한우주가 알아서 잘하겠지, 하고 넘기는 게 속 편하다.
아무래도 인하성은 지난 일 이후로 기가 완전히 죽었나 보다. 상상이 안 가지만 한우주가 그렇다고 하니 뭐…. 그러나 인하성 부모로선 학교와 감독에게 돈을 준 것이 있으니 인하성이 처벌받은 것을 배신이라 여긴 모양이다. 그러니까…, 혼자 죽기 싫어서 발버둥 친 쪽은 인하성이 아니라 그 부모 쪽이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별짓을 다 하네.’
현실에서도 직접 본 적 없는 온갖 더러운 일들을 게임 속에서 경험하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그것도 연애하는 게임인데 학교 설정이 왜 이 꼴일까. 피폐물 주인공이 다니는 학교는 깨끗할 수 없는 건가?
다른 것도 아닌 학교 때문에 새삼 이 게임의 장르를 실감했다. 한우주와 지내는 일상이 쾌적해서 방심하고 있었나 봐. 한우주가 연애를 하지 않으니 공략캐와 피폐… 뭐… 생길 일도 없고…. 그러다가 서연준을 떠올렸다. 나의 1순위 목표이기도 하고, 엔딩의 기억이 가장 선명히 남아 있는 캐릭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다가 서연준이 어떤 놈인지도 잊게 생겼네. 연애 안 하니까 그냥 멀쩡한 고등학생이잖아….’
한우주와 서연준에겐 차라리 이 편이 나을 것이다. 둘이 사랑해서 함께할 미래는 범죄로 가득하니까. 그러나 내겐 아니다. 둘 사이에 무언가 있어야 내가 현실로 돌아갈 텐데.
…내 생각만 해서 벌을 받은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금 이 게임의 장르를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학교도 뭣도 아닌 공략캐를 통해서 말이다.
***
“현우야, 이거.”
요즘 서연준이 쉬는 시간에 우리 반에 찾아오는 일이 늘었다. 그런데 도저히 기뻐할 수가 없다. 한우주가 아닌, 나에게 용무가 있어 찾아오는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요즘엔 억지웃음을 짓는 일에도 능숙해졌다. 움직임을 거부하는 입꼬리를 어떻게든 끌어 올리며 서연준이 건넨 것을 받았다. 클리어 파일인데, 펼쳐 보니 무언가 빽빽이 적힌 종이가 잔뜩 꽂혀 있었다.
“이게 뭐야?”
“시험 범위 요약 정리한 거. 몇 번 읽어 보면 도움 될 거야.”
“…고, 고마워.”
“난 손으로 메모하면서 보는 게 편해서 종이에 복사해 왔는데 괜찮을지 모르겠다. 미리 물어볼 걸 그랬나? 현우 네가 필요하면 스캔본 파일로 줄게.”
“아니야! 나도 종이가 편해. 진짜 고마워. 잘 읽어 볼게.”
지난번에 시험이 어쩌니 난리를 피운 게 서연준의 무언가를 자극했나 보다. 올 때마다 뭘 못 챙겨서 안달이다. 아예 우리 반에 안 오는 것보다야 낫겠다마는….
“야, 한우주. 한우주! 일어나 봐. 넌 공부 안 하냐?!”
서연준이 백번 찾아온들 한우주랑 아무런 진전이 없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바로 뒷자리에서 쿨쿨 잘만 자는 한우주를 흔들어 깨웠다. 한우주가 눈가를 문지르며 푹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왜, 뭐….”
“어제 또 늦게 잤어?”
“그냥 보통 시간에….”
한우주의 보통은 새벽 3~4시쯤 되는 건가?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시험 2주도 안 남은 건 알고 있지?”
“아, 그래?”
“…….”
할 말을 잃은 채 시선을 흐리자 옆에 서 있던 서연준이 체념한 투로 말했다.
“난 벌써 몇 년째 실패하고 있어. 한우주 공부시키는 거. 아니, 정확히는 시험 제대로 치게 하는 거겠다.”
한우주는 영 졸음이 가시질 않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툭 떨군 채 내뱉는 말에 힘이 없다.
“그랬던가….”
“기억 안 나? 너 중학생 때였나…? 한 반년쯤 옆에서 잔소리하니까 짜증 내면서 공부했잖아. 어떻게 하긴 하더라.”
“뭐, 반년?”
뭔 놈의 잔소리를 반년 동안 하는데? 놀라서 되묻자 서연준이 멋쩍게 웃었다. 한우주도 한우주지만 서연준 쟤도 참…. 옛날부터 집요했구나…. 조용히 서연준의 이야기를 마저 듣는다.
“음. 공부하기는 했는데….”
“나는 왜 기억이 없지.”
서연준이 쓰게 웃는다. 나 같아도 반년 붙잡고 공부시킨 애가 그때 일을 기억조차 못 하면 서운하겠다. 일단 한 대 때리고 볼지도 모른다. 서연준은 그런 한우주가 익숙하다는 듯 능숙히 넘기며 말을 이어 갔다.
“글쎄, 결과로 남은 게 없어서 더 그런가.”
“결과?”
무슨 결과? 시험 성적 같은 거 말하는 건가. 서연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응. 시험을 안 쳤거든.”
“…….”
“그때 어땠더라, 안 풀고 그냥 잤던가? 일자로 밀고 잤던가. 이건 나도 정확히 기억 안 나는데…. 아무튼 안 풀었어.”
“음, 그건 기억나.”
“그거야 당연히 기억나겠지. 항상 그랬으니까…. 중학생 되고부터 시험지 한 쪽이라도 읽은 적 있어?”
“아니.”
한우주의 대답이 지나치게 당당하다. 나도 모르게 서연준에게 감정 이입해서 등짝 한 대 칠 뻔했다. 서연준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야. 너 읽은 적 있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시험 결과 나오고 내가…, 내가 어이가 없어서 너 붙잡아 놓고 풀게 시켰으니까.”
“기억 안 나.”
“그래…? 난 똑똑히 기억나. 그때 너 한 개 빼고 다 맞았어.”
서연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근데 잠깐, 뭐야. 겨우 하나 틀렸다고?
“무슨 과목 풀었는데?”
“다….”
“…….”
“그냥 다. 그때 내가 좀 열이 받았거든…. 다 풀게 했어. 전 과목 중에 하나 틀린 거야. 무슨 과목에서 틀렸는지도 기억해. 도덕이었어. 단순 암기 문제였을 거야.”
할 말이 없다. 뭐에 반응해야 하지. 무엇에 더 놀라야 할까.
소꿉친구의 잔소리에 못 이겨 공부해 놓고 시험 안 친 한우주? 제대로 치렀으면 전 과목 만점일 수 있었던 거? 아니면…, 저 한우주에게 잔소리를 반년간 퍼부어 공부시킨 데다가, 실제 시험조차 안 본 애를 데려다 놓고 전 과목 시험지 풀게 한 서연준…?
솔직히 난 서연준이 제일 놀랍고 무섭다. 한우주는 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안 할 뿐이지 뭐든 제대로 하면 평균 이상으로 해낼 느낌이다.
그런데 서연준의 집념은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보통 친구 데리고 저렇게까지 하나? 아, 맞아. 서연준이 지금은 괜찮아 보여도 보통 사람은 아니지. 미친 집착 사랑꾼이잖아. 사람 감금할 정도의 집착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건 아니구나. 서연준은 떡잎부터 달랐던 거야….
“어쨌든, 그날 이후로 몇 번 더 시도했지만, 시험을 제대로 치른 적은 없었어.”
“그랬구나.”
한우주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건 무슨 남의 이야기 듣는 것처럼 군다. 서연준은 그마저도 익숙한가 보다.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응. 그랬어.” 하고 말한다.
“그냥. 본인이 마음먹으면 언제든 잘할 수 있을 테니까…. 요즘엔 신경 안 쓰고 있어. 내 공부나 열심히 하는 게 낫겠더라고.”
“그, 그래.”
정정한다. 한우주도 역시 무서울 정도로 대단한 놈이다. 저 서연준이 집착을 내려놓고 체념하게 했으니. 이야기를 듣고 나니 한 가지 불안감이 생겨났다.
‘서연준이 한우주 성적 포기한 거야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사랑 포기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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