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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45화 (45/150)

45화

그러나 요즘 한우주의 태도를 보면 영 가능성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절대로. 아오, 어떻게 해야 저 둘 사이에 로맨스가 피어날까. 실수인 척 밀쳐서 뽀뽀라도 시켜야 하나? 일단 입술 박치기라도 하고 나면 마음이 조금은 생기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 할지도 모른다. 빙의한 지도 3주째인데 여태까지 공략캐랑 한우주 사이에 아무런 로맨스도 없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 내 생각에는 한우주의 연애 세포가 죽은 것 같다. 그러니 자극을 조금 주면 깨어날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해도 헛소리 같기는 한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나으니까….

방금 서연준에게 받은 클리어 파일을 꾹 쥐고는 죽어라 노려보며 고민하던 때였다. 서연준이 무언가 생각난 듯 “아.” 소리를 내고는 한우주를 향해 말했다.

“하긴, 생각해 보니 한우주 원래 머리 좋고 공부 잘하기는 했어. 좀 오래된 일이라 잊고 있었는데….”

“뭐야, 한우주 모범생이었어?”

파일을 내려놓고 서연준을 보며 가볍게 말했다. 농담이었는데 서연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곧 느릿하게 말을 꺼내는 것이 기억을 되짚는 것 같았다.

“음…, 맞아. 그랬지. 그땐 반이 자주 갈려서 가물가물했는데, 분명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서연준.”

여태 조용히 있던 한우주가 서연준의 말을 끊는다. 성가신 기색을 그대로 드러내고선 짜증스레 말한다.

“남의 이야기 좀 적당히 하지?”

“…….”

“…….”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아니…, 지금까지 별말 없었으면서 갑자기 이런다고? 꽤 일방적이기는 해도 오랜만에 서연준과 제대로 대화하는 것 같아 내심 기뻤단 말이다. 방금 한우주가 한 말로 나의 마음은 가라앉다 못해 푹 꺼져 버렸다.

저렇게 날카롭게 말할 건 또 뭐야. 계속 이런 식으로 군다면 한우주는 서연준 마음 한 조각도 홀리지 못할 거다. 아니, 있던 마음도 식겠다.

어떡하지, 침묵이 무겁다. 지금인가? 지금 밀쳐야 하나? 아니다.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실수로 뽀뽀 같은 거 하면 사랑이 아니라 트라우마가 생길 것이다.

환장하겠네. 무슨 말이라도 먼저 해야 하나? 아니,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해?! 속으로 난리를 피우는 중에 낯선 목소리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기…. 미안한데….”

서연준과 나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한다. 한우주는 그냥 창가나 보고 있다. 한두 번쯤 본 것 같은…, 아마도 우리 반일 애가 우물쭈물 말을 건넨다.

“한우주…. 담임 쌤이 지금 바로 교무실로 오라고 하셔서.”

뭐야, 또. 담임이 한우주를 왜 불러? 한우주 요즘 왜 이렇게 교무실 갈 일이 잦은 거냐…? 한우주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를 내려다보고 짧게 한마디 한다.

“갔다 온다.”

“어? 어, 응. 자, 잠깐만.”

“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한우주가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곤 바로 교실을 나가 버렸다. 담임의 말을 전한 애도 그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나와 서연준만 남아 버린다.

서연준은 멀거니 서 있다가 곧 평소와 다름없이 웃었다.

“곧 종 치겠다. 나도 가 볼게, 현우야.”

“아, 응.”

“또 보자.”

그대로 뒤돌아 자리를 떠나려 드는데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서연준 저러다 한우주랑 틀어지면 큰일인데.

“서연준!”

서연준이 몸을 살짝 틀어 나를 본다.

“응?”

“그…, 너무 신경 쓰지 마.”

“응…? 뭐를?”

“한우주 말이야.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 걸 거야.”

“아.”

서연준은 말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괜찮아. 고마워.”

그러고는 정말로 교실을 나가 버렸다.

“…….”

괜한 참견이었나? 기분 괜찮아 보이네. 아니, 오히려 좋아 보여서 껄끄러웠다. 서연준의 웃음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왜 저렇게 웃지? 웃을 만한 일이 뭐가 있었다고.

아무래도 이상하다. 곱씹을수록 더 그랬다. 왜 그렇게 행복한 듯이 웃었을까. 그리고 나는 왜 그 웃음이 기이하게 느껴지는 걸까. …예감이 좋지 않다.

***

이후로 머릿속이 내내 바빴다. 수업 종이 치고 나서도 한우주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일까. 온갖 괴상한 추측이 난무하는 걸 겨우 멈추고 진정하려 애썼다. 설마 또 무슨 일이야 있겠어. 수업 태도 뭐, 그런 거 때문에 부른 걸지도 모르겠다. 한우주가 학교에서 하는 일이라곤 자는 것뿐이니까. 잔소리가 좀 길어지나 보네…. 겨우 마음을 달래고 나면 불쑥, 차례를 기다렸다는 듯 서연준 생각이 났다.

‘서연준은 괜찮은 거겠지? 한우주한테 정떨어진 건…. 아니야. 서연준이 한우주를 몇 년 봤는데. 뭐 이 정도 일 가지고….’

사실은 정이 떨어지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다. 정말 신경 쓰이는 부분은 다른 데 있다.

‘서연준 벌써 미쳤나? 아직 사랑의 사, 자도 시작 안 했는데, 왜?’

한우주의 행동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살갑지 못하다. 오히려 서연준에게 철벽을 치는 것으로 보였다. 내가 현실에서 게임할 적에, 일부러 특정 캐릭터 루트 피하려고 괴상한 선택지만 눌러 댔을 때와 느낌이 비슷한 것 같다.

그런데도 서연준은 마냥 좋단다. 좋은 일이랄 것도 없는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숨겨진 변태성…, 뭐 그런 건가? 서연준 설마 욕먹는 걸 좋아하나?

‘미치겠다….’

지금 끙끙대며 생각해 봤자 답이 나올 리가 없다. 하지만 생각을 안 하자니 자꾸만 떠오른다. 수업이나 들을까, 싶었는데 하필 문학을, 그것도 고전 문학 수업을 하고 있다.

하…, 듣기 싫어. 현실에서도 겨우 들을까 말까 한 것을…. 나는 고전 문학에 흥미가 없고 특히 어려워했다. ‘고전 문학? 그거 고문을 풀어 말한 거잖아.’ 하고 괴상한 말로 줄여 부를 정도로 고전 문학이라면 치를 떨었다. 그러니 수업은 안 들으련다.

‘뭐라도 읽으면 좀 덜 심심하겠지.’

감흥 없이 교과서를 읽고 있는데, 바로 옆에 서연준이 시험공부에 참고하라며 두고 간 클리어 파일이 눈에 띄었다. 별생각 없이 집어 들고선 한 장씩 읽어 내린다.

‘이거 서연준이 직접 했다고 그랬나? 엄청 깔끔하게 정리 잘했네.’

이런 데서 또 섬세함이 드러나는구나. 중간중간 코멘트까지 달아 놨다. 이건 어떤 선생님이 시험에 나온다고 한 거다, 이건 어떤 식으로 생각하면 쉽다. 어쩌고저쩌고.

처음엔 그냥 본인이 공부하기 편하려고 적어 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읽을수록 무언가…, 어떤 대상을 상정하고 쓴 것만 같은….

‘잠깐만.’

「고전 문학은 어떻게든 달달 외워. 표시해 둔 부분만 잘 외우면 시험에는 무리 없을 거야.」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직전에 고전 문학이 어쩌고, 투덜거렸는데 이런 걸 보니 기분이 좀 이상하다. …예민하게 굴지 말자. 고전 문학은 흔히들 어려워하니까.

몇 장을 더 넘겨 본다.

「수학은 문제 유형만 정리하고 넘어갈게. 알아서 잘할 테니까.」

「영문법이 정 어려우면 기본만 숙지하고 잘 끊어 읽는 걸 연습해 봐.」

…그리고 마지막 장.

「이해 안 가거나 부족한 부분 있으면 표시해 둬. 만나서 자세히 알려 줄게. 그럼 일요일에 보자:)」

이, 미친.

너무 놀라서 던질 뻔했다. 진정하고 요약본을 처음부터 다시 살펴본다. 마지막 장은 빼고. 그건 아예 파일에서 빼서 마구 구긴 뒤에 책상 서랍 구석에 처박아 놨다.

‘서연준 진짜 뭐야?’

분명 복사본이라고 했지. 그래, 본문들은 복사한 게 맞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옆에 정성스레 달린 코멘트들은 전부 볼펜으로 직접 쓴 것 같았다. 이건 대놓고 나 읽으라고 적은 거 아니야?

유독 마음에 걸리는 코멘트들을 모아서 생각해 본다.

「고전 문학은 어떻게든……」

「수학은…… 알아서 잘할 테니까.」

「영문법이 정 어려우면……」

‘미친 새끼.’

…진정하자. 우연이겠지. 아니, 우연일 수가 있나?

나는 조현우의 성적을 모른다. 게임에는 언급조차 없었고, 여기 와서 조현우 성적표를 확인해 본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 어떤 과목에 강하고 약한지 알 리가 없다.

내가 지금 이렇게 당황한 이유는 서연준이 적은 메모들이 마치 나를 고려한 것처럼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조현우 말고, 안태원의 성적 말이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인 거 나도 안다. 아직 서연준이랑 같이 공부한 적도 없고, 여기서 시험을 쳐서 성적표를 받아 본 것도 아닌데 이런 걸 어떻게 알아내겠어? 애초에 방법이 없다.

뭐…, 수업 시간에 할 거 없으면 있는 교재를 끄적이며 문제를 풀긴 했다. 책상 서랍 뒤져서 교과서랑 문제집 하나하나 살펴보면 추측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

‘…….’

야, 안태원. 그럴 리가 있냐? 망상도 적당히 해. 정말로 어쩌면, 우연히 조현우랑 내가 잘하고 못하는 과목이 겹친 걸 수도 있잖아. 그냥 교과서 맨 앞부분들 살펴보면 대충 각 나오지 않나?

…하고, 이것저것 살펴봤는데 뭐 알 수 있는 게 없다. 줄 치다가 지렁이가 탈주하듯이 이리저리 튄 것 말고는 필기한 것도, 문제를 푼 것도 없다. 그러다 드디어 뭐가 적혀 있길래 확인하니 저번에 내가 도서실에서 푼 것이었다.

조현우 얘도 공부 안 하나 보다. 하긴, 밤늦은 시간까지 알바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나 같아도 학교에선 기절 잠 하겠다.

‘진짜 찝찝하네….’

서연준이 준 요약본 파일을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죽어라 노려본다. 그러다 시간이 다 갔다. 한우주는 이번 수업이 끝나기 직전에 들어왔고, 금방 종이 쳤다.

일단 뒤돌아 한우주의 상태를 확인한다. 아주 멀쩡해 보인다. 그래도 예의상 한 번 물어봤다.

“한우주. 가서 뭐 했어?”

“뭐가?”

“교무실 다녀왔잖아. 담임이 뭐 잔소리해?”

“아, 뭐. 비슷한 거.”

“…….”

잔소리도 아니고 잔소리 비슷한 건 뭐야. 눈을 가늘게 뜨자 한우주가 팔짱을 끼고는 당당히 말했다.

“나 이번에도 아무 짓 안 했어.”

“…응? 아, 아니 뭐. 누가 뭐랬나.”

“어.”

“알았어.”

한우주 쪽은 정말 별일 아닌가 보다. 신경 쓸 일 하나는 줄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지금은 서연준이 적은 메모…, 이게 도대체 뭔지부터 알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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