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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46화 (46/150)

46화

의자에서 일어나 한두 걸음 내디뎠는데 갑자기 손이 붙잡혔다. 이제 막 자리에 앉은 한우주가 나를 올려다본다.

“어디 가?”

“나? 그냥…. 친구한테 볼일 있어서?”

“친구? 서연준?”

“뭐? 아니.”

한우주는 내 대답을 듣고는 손을 놓아주었다.

“갔다 와.”

“…? 그래.”

한우주는 또 왜 저러지. 서연준을 굳이 짚어 이야기할 건 뭐야? 예전처럼 ‘아, 한우주가 날 질투하나 보다!’ 하고 넘기기에는 영…, 아까 전만 해도 그렇고 요즘 한우주가 서연준을 대하는 태도가 시원찮다.

됐다. 한우주 속 짐작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도 아니고…. 가던 길이나 마저 향했다.

***

“헐, 조현우 네가 웬일이냐?”

“웬일이냐니? 왜 그렇게 놀라?”

“왜겠냐? 네가 우리 반을 다 찾아오고 새끼, 기특하네. 자주 좀 와라. 한 5년 만에 찾아온 듯?”

“무슨 5년이야….”

“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대충 넘겨, 짜식아. 뭐 암튼. 강준희는 체육 뒷정리하느라 지금 없어.”

“그렇구나.”

차라리 잘됐다. 강준희보다는 오재영이 대하기 더 편하니까. 나는 목을 몇 번 가다듬고는 용건을 꺼냈다.

“오, 오재영 너 시험공부는 하고 있어?”

“뭐?”

“시험 2주 남았잖아.”

“뭐냐…? 너 공부하게?”

오재영은 말하며 고개를 기웃거렸다. 얼떨떨한 눈치다.

“…왜?”

“아니, 뭐. 그냥? 네가 시험 얘길 다 꺼내니 좀 별일이다, 싶어서? 야, 기분 나쁘게 듣지 마라. 공부 안 한다고 뭐라 하는 거 아니다?!”

“어…, 음. 기분 안 나빠.”

“어엉. 그러면 뭐야, 뭐 물어볼 거 있어서 온 거냐?”

“비슷해. 그러니까….”

방금 급조한 말을 어설프게 늘어놓는다.

“오재영. 너 작년 내 수학 성적 기억해?”

“허?”

다소 억지스럽긴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무엇이다? 뻔뻔한 거. 이 험한 세상 살아남기 위해선 뻔뻔함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한다.

“아니, 목표 성적을 정해 두려는데 작년 성적표를 못 찾겠어. 대충 뭐, 몇 점이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네.”

“네가 수학 성적을 올리겠다고?”

“응.”

“야, 공부 안 해 본 티 낼래?!”

“…….”

“지금 시험이 거의 일주일 남았는데 뭔 수학이야! 점수 올리기 쉬운 과목부터 해, 인마.”

“수학은 별로인가?”

“당연…, 아니, 하, 그래. 모를 수도 있지. 내가 참아야지. 참을 수 있다악!”

참긴 뭘 참아. 아예 심호흡까지 하고 난리 났다. 질문한 장본인 앞에 두고 저러기도 쉽지 않을 거다. 웃긴 놈. 오재영은 나와 시선을 맞추고는 무슨 어린애 대하듯이 말했다.

“자, 들어 봐라. 조현우야. 수포자가 일주일간 수학 붙든다고 달라지는 거 없다. 당장 점수 올리고 싶은 거면 암기 과목을 먼저 하여라.”

“…….”

조현우 수포자구나….

그리고 오재영은 의외로 공부를 하나 보다….

“뭐 필요하면 교과서라도 빌려주랴?”

“아…, 괜찮아. 고마워.”

“새끼…. 공부하다 쓰러지지 말고 적당히 해라?”

“요즘 몸 상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럼 수학 말고 다른 거 공부할게. 고마워.”

“어? 뭐. 그래. 벌써 가냐?”

“돌아가서 공…부해야지.”

오재영은 나의 변명에 제법 감동한 듯 내 등을 두드리고는 고이 보내 주었다. 터덜터덜, 힘 빠진 걸음으로 교실에 돌아와 앉는데 정신이 멍하다. 고전 문학이나 영문법이야 흔히들 어려워하니까 그러려니 하겠는데….

「수학은 문제 유형만 정리하고 넘어갈게. 알아서 잘할 테니까.」

…수학 이야기는 뭘까. 환장하겠다. 내게 전 과목 중에서 점수 가장 잘 나오는 과목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수학을 고를 것이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수학 머리는 꽤 좋은 편이다.

조현우가 수포자…. 그렇다면 이건 조현우 성적에 맞춰 적은 게 아니라, 진짜 나한테 맞춰서 적은 거야…?

도대체 왜? 어떻게? 이 많은 교과서랑 문제집 다 뒤져서 문제 몇 개 풀어 놓은 거로 유추했다는 것이 유일한 가정인 게 절망스럽다.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머리를 싸매며 고민해도 답은 안 나왔다. 금방 점심시간이 찾아오고, 평소처럼 한우주와 서연준,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밥을 먹었다. 걱정한 바와는 다르게 한우주와 서연준은 평소와 다름없이 그냥…, 친구 같았다. 오전 일 생각하면 껄끄러운 기색이 없는 것만으로 다행이다.

서연준은 정말 멀쩡하고 선량한 고등학생같이 굴어서, 혼자 고민하지 말고 대놓고 물어볼까…. 고민하다가 말았다. 솔직히 직접 묻고 답을 듣기 무서웠다.

그 뒤로 며칠을 서연준의 일로 골머리를 앓았지만,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다. 진짜 우연인가? 괜한 기우로 정신력만 소모시킨 건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뭐가 없었다.

솔직히 좀 방심한 게 맞다. 그야…, 서연준은 서연준이니까. 공략캐가 주인공 두고 조연 나부랭이한테 뭘 하겠나, 싶어서. 나는 조현우다. 좀 비중 있는 조연일 뿐이다. 며칠 내내 되뇌자 속이 조금 편해졌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더니, 내가 딱 그런 꼴이다. 지금껏 방심하고 안일하게 군 것을 알면서도 또다시 같은 짓을 되풀이한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분명 그랬는데… 외면하는 게 당장은 편하니까.

‘…한우주랑 서연준 연애 시작하면 사라질 고민이야. 그때 가면 와, 안태원 이딴 생각을 했었냐? 하고 말겠지. 뭐.’

내게는 주말이 남아 있다. 서연준, 한우주와 함께하기로 한 황금 같은 주말이. 어떻게든 서연준과 한우주가 가까워지도록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한다. 굳은 다짐 끝에 고대하던 일요일이 찾아왔고, 사랑이 피어나기는커녕 경악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

“번거롭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응. 꼭 해야 해. 우리 같이 산다고 광고할 일 있어?”

“딱히 숨길 필요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허, 내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거다.”

“…뭐, 편한 대로 해.”

일요일 아침 10시, 꿈속에서 헤매는 한우주를 깨우는 데 겨우 성공하고 빠르게 외출 준비를 했다. 가방에 공부할 것을 꾸역꾸역 쑤셔 넣고 등에 메니 무거워 몸이 다 휘청거렸다.

서연준과는 11시에 근처 공원에서 만나 한우주의 집까지 함께 오기로 했다. 현관에서 운동화를 대충 꾸겨 신고는 한우주에게 다시 한번 당부한다.

“내가 한 말 기억해?”

“아마도.”

“아마도? 내가 뭐라고 했는데?”

“글쎄?”

“한우주!”

한우주는 내 계획에 계속해서 딴지를 걸며 투덜거렸다. 벌써 스무 번은 읊은 것 같은데…. 그래,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백 번은 더 읊을 수 있다.

“나는 네 집에 처음 와 본 거고 당연히 같이 산 적은 없는 거야. 이런 고급 오피스텔에 익숙하지 않으니 모든 게 어색해서 공부에 집중이 안 되고 긴장도 되고 아무튼 그런 설정이야. 설정에 몰입하느라 화장실에 가서 오래 자리를 비울 수도 있….”

“알았으니까 이제 가.”

“진짜 안 거지?”

“어. 빨리 다녀오기나 해.”

나는 방심하지 말고 제대로 준비하라는 의미에서 한우주를 힘껏 노려봤다. 한우주는 마저 하품하더니 거실 소파 쪽으로 가 버렸지만….

‘하…, 내 어깨가 무겁다.’

할 일과 부담감이 크기도 하고 실제로 가방이 아주 무겁기도 하다. 거실 테이블 밑에 교재 몇 개 숨겨 놓을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에 떠밀려 약속한 공원으로 향했다.

10시 50분.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는데도 서연준보다 늦었다. 서연준은 날 발견하자마자 웃으며 손을 흔들어 맞이해 주었다. 나는 인사하기도 전에 서연준을 먼저 스캔했다. 인상, 전날 푹 잤는지 아주 좋아 보인다. 머리 스타일, 얼핏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저건 분명 스타일을 의도해 세팅한 것이다. 의상, 연청색 데님 셔츠를 풀어 입었고, 안에는 깔끔한 흰색 티. 그리고 검은색 슬랙스에 튀는 것 없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검은 구두….

‘친구랑 시험공부 하러 온 것치고는 꽤 멀끔히 차려입었는데?’

아무래도 외양이 영향을 끼치기는 하니까.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 적어도 로맨틱한 분위기가 다 늘어난 잠옷 셔츠 때문에 깬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행이긴 한데 왜 이렇게 꾸미고 나왔지. 서연준도 오늘 마음먹고 왔나?’

만약 그렇다면 한우주만 잘하면 된다. 그쪽이 제일 문제이지만.

“현우 너 가방 무거워 보인다.”

서연준은 나의 가방을 가장 먼저 살폈다. 무거워 보이겠지. 진짜 무거워 죽겠으니까.

“가방 이리 줄래?”

“어…? 왜?”

“무거워 보여서.”

“아니, 아니야. 충분해! 한우주 집 별로 안 멀다며!”

“그렇긴 한데….”

서연준이 내 가방을 한 번, 내 얼굴을 한 번, 가방, 얼굴…. 몇 번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 어깨 쪽 팔 다친 거 아니었어? 조심해야지. 무거운 거 메고 있으면 안 좋아. 이리 줘.”

“어차피 곧 깁스 풀어. 다음 주면 푼댔나? 거의 다 나아서 괜찮아.”

“그때쯤이 제일 위험해. 방심해서 다치기 쉽거든.”

확신에 차다 못해 단호한 목소리다.

“…경험담이야?”

“반쯤은? 우리 동생들 얘기야. 자, 가방 줘.”

거절하면 서연준이 여기서 적어도 20분은 시간을 끌 기세다. 그리고 솔직히 어깨가 좀 불편하긴 하다. 미련하게 굴어서 뭐 하나, 싶어 서연준에게 가방을 맡겼다. 얘도 힘 엄청 센가 봐. 한 손으로 막 드네….

“음, 한우주 집 어디인지 모른댔지?”

“응?! 어, 응. 당연하지!”

“그러면 내가 앞장설게. 천천히 가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연준을 뒤쫓아 걸었다. 내내 등과 어깨를 짓누르던 가방을 내려놓아서 그런가, 몸이 개운하다. 바로 얼마 전에 굵은 빗줄기를 쏟아 낸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

공원에는 벚나무가 몇 그루 심겨 있었다. 가만 보니 아, 비가 오긴 했구나, 싶도록 꽃잎이 절반이 넘게 떨어져 중간중간 가지가 드러나 보였다.

‘올해 벚꽃 놀이는 글렀네.’

아쉽긴 한데 어차피 같이 갈 사람도 없고, 여유 부릴 처지도 안 되고…. 차라리 잘되었다.

꽃잎이 떨어진 것 말고는 전부 괜찮았다. 느낌이 꽤 좋다. 어쩌면, 잘만 하면 오늘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르겠다. 현실로 돌아가서 봄을 맞이하고, 꽃놀이는 그때 가면 된다. 따사로운 봄의 기운을 따라 부푼 기대와 희망을 품고, 익숙한 곳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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