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나는 일부러 한우주와 서연준에게서 떨어져 걸었다. 둘은 몇 번인가 나를 기다려 주었지만, 혼자 천천히 걷고 싶다며 사양하고 말았다. 나란히 걸어가는 둘의 뒷모습, 정확히는 서연준을 보고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지 속이 안 좋다. 결국에는 시선을 떨구어 바닥만 내려다보고 말았다.
역시 우연일까?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아니, 언제까지 우연이라 여기며 넘어가야 하지? 솔직히 서연준이 불편하게 군 건 맞잖아. 본인은 친절이랍시고 하는 일들이 내게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겨우 시선을 들어 앞을 본다. 그리고 순간 서연준과 눈이 마주쳤다. 서연준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어 제자리에 굳고 말았다.
한우주가 그런 서연준의 등을 한 대 치더니 무어라 한다. 서연준이 웃으며 대꾸하고 둘은 다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한우주라면 앞이나 보고 걸으라든가, 그런 말을 했을 것 같다.
…사이좋아 보인다. 이렇게 떨어져서 둘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새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당연히 그렇겠지. 미연시 주인공이랑 공략캐인데.
아, 왜 또 속이 안 좋냐? 걸음도, 기분도, 점점 처지기만 한다. 두 사람과의 거리도 갈수록 멀어져 어느 순간엔 아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마 내가 정신 놓고 한눈팔다가 놓친 거겠지.
‘차라리 잘됐네….’
어차피 오늘 약속의 목적은 둘이 있을 기회를 마련하는 데 있었으니까. 나는 그냥 이 근처에서 쉬고 있든가, 조금 더 걸으며 아까부터 난리 난 속이나 달래면 된다.
터덜터덜, 속도만 따지면 거의 기는 수준이다. 나도 참 어지간히 할 일 없나 보다. 어릴 적에나 하던 장난을 치며 걸었다. 바닥 타일에 발을 맞추어 가며 걷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가려다가 갑자기 나타난 것에 가로막혀 선을 밟고 말았다. 아, 뭐야.
“그러다 넘어진다.”
퍼뜩 고개를 든다. 바로 앞에 한우주가 서 있었다. 그리고 정말, 정말로 이상하게도 그 순간이 되어서야 나는 주변에 핀 꽃을 인지했다. 화단에 만개한 이름 모를 꽃과 산책로를 늘어선 가로수에 핀 분홍색의 작은 꽃들을 말이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정신이 없어?”
어디선가 불어온 한 줄기 바람에 한우주의 앞머리가 흔들린다. 한우주는 성가신 듯 무신경한 손길로 제 앞머리를 넘겼다. 나는 어쩐지 아까부터 말문이 막혀 한우주를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야. 조현우?”
이상한 놈.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은 한우주의 눈길에 언뜻 걱정이 비쳐 보였다. 뿔뿔이 흩어진 정신을 그러모아 겨우 짧게 대답한다.
“응.”
“너 뭐야. 진짜 어디 아파?”
“아니? 전혀. 근데 연준이는?”
한우주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끌고자 했다. 그러고 보니 서연준이 안 보였다. 서연준은 어디에 두고 나한테 온 거야? 한우주는 불편한 티를 내며 미간을 좁혔다. 내가 뭐라 할 처지는 안 되지만, 한우주도 감정 기복 참 장난 없다.
“잠깐 뭐 사러 갔어. 금방 올걸.”
“아, 아하….”
한우주의 시선이 따갑다. 이러다 얼굴 뚫리겠다.
“너 오늘 이상해.”
“…내가?”
“어. 평소에도 이상했는데 오늘은 더 이상해.”
“뭐래. 나 완전 평소랑 똑같거든? 이상하지도 않거든?”
“원래 이상한 사람은 자기가 이상한 줄 모른다더라.”
“야!”
한우주는 얄밉게 어깨를 한 번 으쓱이더니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서둘러 따라붙을 필요도 없었다. 느긋하다 못해 아주아주 느린 걸음이었으니까.
왜인지 아까보다 마음이 한결 편해 주변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가로수 가지 사이에 듬성듬성 매달린 꽃들은 약한 바람에도 힘을 잃고 낙하했다. 나무들이 조만간 꽃을 전부 떨구고 청록색 잎사귀를 틔울 참인가 보다.
강한 바람이 불자 꽃잎이 우수수 떨어져 이리저리 휘날렸다. 안타까운 마음을 한쪽에 치워 두고 허공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이러고 있으면 꽃잎 하나쯤은 손바닥에 내려앉지 않을까, 하는 있으나 마나 한 목적성이 있긴 하다.
그런데 이게 다 뭔지. 꽃잎이 날 싫어하나? 수십, 어쩌면 수백 개의 꽃잎 중 단 한 개도 잡지 못했다. 몇 개는 아슬아슬하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괜히 열만 더 받았다. 분명 처음에는 의미 없는 행동이었는데, 오기가 뻗쳐 나중에는 꽃잎이 날리는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팔을 뻗고 별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조현우 너 뭐 해?”
그러다 한우주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옆에 누가 있는지 잊을 정도로 열중하고 만 것이다. 와, 개 민망하네. 뒤늦게 점잖은 척 자세를 바로 했지만 나도 안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거. 더 민망해지기 전에 이실직고하는 게 낫겠다.
“그, 흠, 크흠. 꽃잎 좀 잡아 보려고.”
“꽃잎을 왜?”
“그냥 보면 잡고 싶지 않아? 앞에 막 휘날리면….”
“별로 안 그런데.”
“한우주 낭만 없네.”
“갑자기 웬 낭만.”
“다들 한 번쯤은 잡으려고 하거든?”
“음….”
영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우주 얘는 미연시 주인공치고 사랑과 낭만이 지나치게 없다. 내 것의 반이라도 떼어 주고 싶네. 사람이 이렇게까지 건조하면 연애 못 한다. 한우주에게 낭만 소생술이 시급하다.
“그런 말도 있잖아. 떨어지는 벚꽃 잎을 잡으면….”
“잡으면 뭐, 사랑이 이뤄진다고?”
웬일인지 한우주가 걸음을 멈춘다. 나는 그보다 두어 걸음 앞에 멈춰 서선 한우주를 돌아보았다.
“알고 있네?”
“들어 보긴 했지. 그걸 믿어?”
“진지하게 믿지는 않아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꽃잎 잡으면 적어도 기분은 좋을 거 아냐.”
“그런가?”
막상 한우주가 표정을 굳히고 진지하게 물어 오니 할 말이 사라졌다. 꽃잎 하나 잡으려 했을 뿐인데 어쩌다 대화가 이렇게 된 거지? 한우주의 시선이 아득한 위에서 아래쪽으로 옮겨 간다. 한우주는 꽃잎 하나가 떨어지는 모습을 눈에 담고 있었다. 그러곤 다시 내게 묻는다.
“이루고 싶은 사랑이라도 있나 봐?”
“뭐?”
야, 넌 무슨 그런 걸 진지하게 묻냐? 가볍게 대꾸하면 될 것을 바보같이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이게 다 한우주가 쓸데없이 진지한 탓이다. 이러다 진짜 좋아하는 사람 있는 줄 알겠네. 안태원 너 오해 사고 싶어서 안달 났지, 아주. 나도 이런 내가 답답해 죽겠다. 한우주는 내 수상쩍은 반응에도 별말이 없다가 갑자기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곧, 앙증맞은 분홍색 꽃잎 하나가 한우주의 손바닥 위에 안착한다. 어이가 없다. 꽃잎에 자아라도 있나? 내 손은 미친 듯이 피해 다니고 한우주 손에는 뭐 자석이라도 붙은 것처럼….
“손바닥 펼쳐 봐.”
갑작스러운 요구에 미간을 좁혔다. 왜? 하고 이유를 묻기도 전에 한우주가 멋대로 내 손을 가져가 펼친다. 그러곤 내 손바닥 바로 위에서 방금 잡은 꽃잎 하나를 떨구었다. 얇고 부드러운 것이 내 손바닥을 간지럽히며 자리를 잡았다.
“잡기 쉽네. 너 가져.”
“…….”
뭐지?
기분이 또 안 좋다. 묵직한 것이 가슴께를 짓누르는 것만 같다. 고개가 무거워 들기 힘들다. 덕분에 나는 내 손바닥 위의 꽃잎만 실컷 노려봤다.
“조현우. 그거 알아?”
끔뻑, 눈을 한 번 느리게 감았다가 뜬 뒤에 겨우 고개를 들었다. 진지한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즐거운 듯 미소를 띤 한우주가 있다.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더욱 올리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벚꽃이 아니라 살구꽃이야.”
“응?”
“네 손 위에 그거, 살구꽃 잎이라고. 여기엔 벚나무가 없거든.”
“…허.”
벚나무고 살구나무고 다 모르겠고, 한우주 이상한 것만 알겠다. 내가 꽃 좀 착각한 게 그렇게 웃긴가? 저렇게 웃을 건 뭐야? 열받아서 얼굴이 뜨겁다. 한우주는 내 얼굴을 쳐다보고는 더 웃었다. 쟤 진짜 왜 저러냐. 미친 건가? 내 표정이 그렇게 웃겨? 나쁜 놈. 멍청이. 유치해. 어이가 없으니 화도 못 내겠다.
다시 한번 강한 바람이 불어오고, 나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한우주는 흩날리는 꽃잎 속에 있었다.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는 신경도 안 쓰고, 눈을 접으며 활짝 웃는다.
“얼른 가자. 서연준이 우리 찾겠다. 너 모르지? 걔 잔소리 한번 시작하면 장난 아니야.”
말하며 몸을 돌려 걸음을 재촉하기에 나 또한 무거운 발걸음을 겨우 떼어 뒤따랐다. 바람이 잦아들자 나는 주먹을 펴고 손바닥을 확인했다. 여린 꽃잎의 끝이 작게 찢어져 마음이 안타까웠다.
혹여 한우주가 내 쪽을 돌아보지는 않는지 눈치를 살피다가 꽃잎을 핸드폰 케이스 사이에 끼워 두었다. 투명한 케이스 너머로 납작하게 펼쳐진 작은 꽃잎이 훤히 보였다.
사람 마음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이게 뭐라고 보고 있으니 흡족하고 마음이 들뜨는지 모를 일이다. 바람에 꽃이 진다고 아쉬워한 마음도 잊고 되레 변덕을 부렸다. 꽃 지는 게 뭐? 어차피 언젠가는 질 건데 즐기는 게 낫지. 살랑살랑 떨어지는 게 예쁘잖아.
한껏 가벼운 걸음으로 한우주의 옆에 서자 곧장 시선이 느껴졌다. 한우주가 의아한 목소리로 묻는다.
“왜 웃어?”
“나 안 웃는데?”
“지금 웃고 있는데?”
그런가? 입꼬리가 조금 올라간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이 웃을 수도 있지 뭘. 한우주 너도 아까 웃었잖아.”
“그건 웃겨서 웃은 거고. 네가 웃긴 짓 해서.”
“내가 뭘 했다고….”
“꽃잎 잡겠다고 허우적거렸잖아.”
“…….”
한우주 얘는 대충 좀 넘어가면 될 것을 뭐 그리 궁금한 게 많냐. 기분 좋으니 이번만 넘어가 줄 생각으로 가볍게 대꾸한다.
“나도 웃겨서 웃었어.”
“뭐가 웃기는데?”
“한우주 너. 넌 그냥 보고 있으면 웃겨.”
한우주가 내 말에 인상을 찌푸린다. 그 모습이 웃겨서 또 웃었는데 그것마저 못마땅한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가던 길이나 향했다. 얼른 가자고 말한 건 자기면서 자꾸만 “내 어디가 웃기냐고.” 물으며 귀찮게 한다.
말씨름을 벌이며 가니 걸음은 더디기만 했고 결국에는 한우주의 말대로 됐다. 우리를 찾아다니며 근처를 서성이는 서연준과 마주치고 잔소리를 잔뜩 듣고 말았다. 아무렴 나는 상관없었다. 서연준은 한우주한테만 잔소리를 했으니까. 하하, 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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