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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49화 (49/150)

49화

“그래서 이건 안 먹어도 돼?”

부스럭, 서연준이 약국 이름이 적힌 비닐봉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뭐 사러 갔다더니 약국에 다녀온 거였어?

“아, 그거. 좀 걷다 보니 괜찮아졌어.”

“그거? 뭐? 걷다 보니 괜찮아져? 쭉 걷기만 했으면서 뭐야? 아니, 괜찮다고 하니 다행이지만….”

“뭐야? 한우주 어디 아파?”

뭐가 괜찮다는 거지? 모르는 이야기에 답답해 물음을 던지자 서연준이 아예 봉투를 펼쳐 안에 든 것을 보여 줬다. 병에 든 물약이랑 알약이랑…, 상표가 안 보여서 뭔지 모르겠다.

“한우주가 갑자기 속 안 좋다면서 날 약국으로 쫓아냈어.”

쫓아냈다고?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서연준 쪽에서 전후 사정을 술술 불었다.

“10년 본 것 중에 제일 건강해 보이는 녀석이 잘만 걷다가 약국 좀 가라면서 사람을 밀치잖아. 아니, 내가 그냥…, 속 아프니 약 좀 사 오라고 하면 모르겠는데 왜 밀치냐고. 밀치는 힘이 또 아무리 봐도 아픈 사람은 아니고 그런데 박박 우기기나….”

“서연준 시끄러워. 너 때문에 속 다시 안 좋아졌어. 약 꺼내 봐. 먹어야겠다.”

“웃기지 마. 현우야, 이거 봐. 이게 아픈 사람 얼굴이야?”

“…건강해 보이기는 하네.”

“내 속 아픈 걸 얼굴만 보고 어떻게 알아?”

“아, 약 먹어. 네가 다 먹어. 자!”

이게 무슨 난리야. 서연준이 들고 있던 봉투를 한우주에게 떠넘겼다. 서연준이 저렇게 흥분해서 말 많이 하는 거 처음 본다. 어지간히도 억울한 모양이다.

…둘이 오늘 분위기 좋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착각한 건가? 서연준은 씩씩대고, 한우주는 아무렴 상관없다는 태도다. 한우주가 봉투를 뒤적거리더니 물약 소화제를 꺼내 내게 건넸다. 나는 어리둥절해 한우주의 얼굴이나 쳐다봤다. 이걸 왜 날 주냐?

“안 받고 뭐 해?”

“…나더러 마시라고?”

“필요 없어? 뭐, 이젠 괜찮은 것 같기도 하네.”

머릿속이 꼬여 버렸다. 그러니까 이거 한우주가 아프대서 서연준이 사 온 거 맞지? 미처 상황 파악을 마치기도 전에 한우주가 억지로 내 손에 소화제를 쥐여 줬다.

“필요하면 마시고, 아니면 말고. 병에 든 건 들고 다니기 무거워.”

“…….”

“어? 현우 몸이 안 좋은 거였어?”

한우주 빼고 전부 혼란한 와중에 나는 또 웃음이 비죽 새었다. 뭐, 병에 든 건 무거워?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뻔뻔하게 한다. 지금이야 좀 낫지만 분명 아까 속이 안 좋긴 했다. 한우주가 그걸 언제 어떻게 안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신경 써 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아니, 그보다….

“아, 한우주!”

“왜?”

“너도 속 안 좋았다며? 이제 진짜 괜찮아?”

“음, 잠깐 그랬지. 난 멀쩡하니까 너나 마셔.”

그렇다면 다행이고…. 기꺼이 소화제를 마시려니 이놈의 팔이 또 문제다. 뚜껑 하나 따기 힘들어 인상을 찌푸리니 서연준이 다가와 도와주었다. 그새 흥분이 가신 것인지 평소와 같이 멀쩡한 표정이다.

“고마워.”

“고맙긴, 뭘. 내가 누구 때문에 괜히 헛걸음한 게 아니라 다행이다.”

“…….”

아니, 아직 화난 걸지도 모르겠다. 어색한 웃음으로 답하고는 소화제나 홀짝였다. 약 덕분인지 돌아가는 길에는 몸도 마음도 편했다. 성난 서연준이 한우주에게 투덜대고, 별 시답잖은 말로 받아치는 한우주를 구경하니 심심할 틈도 없었다.

문득 손등이 간지러워 시선을 내리니 벚꽃 잎…, 아니다. 살구꽃 잎이랬지. 아무튼, 분홍색 꽃잎 하나가 손등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참나, 아까 잡으려고 용을 쓸 때는 잘만 피해 다니더니….

가만히 꽃잎을 바라보며 걷는데 툭, 무언가에 부딪혔다. 덕분에 꽃잎은 내 손을 떠나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퍼뜩 고개를 들어 앞을 확인한다. 한우주가 자리에 멈춰 선 채로 나를 내려다본다.

“아, 너 때문에….”

“나 때문에 뭐?”

불만스럽게 중얼거리자 한우주가 한쪽 눈썹을 치켜든다. 내가 들고 있던 빈 병을 거의 강탈하듯이 가져가고는 한마디 뱉는다.

“됐고, 앞에 좀 보고 걸어. 툭하면 넘어지면서.”

“…….”

걱정하는 말을 들어 버리니 티끌 같은 불만마저 모습을 감춰 버렸다. 게다가 꽃잎이야 뭐, 아까 한우주한테 받은 것도 있고…. 그 뒤로는 얌전히 주변 구경이나 하며 걸었다. 산책을 나온 사람들과 귀여운 강아지, 바람을 타고 흘러온 꽃 내음, 그리고 쉴 새 없이 꽃잎을 떨구는 살구나무까지.

주홍빛으로 물드는 오후의 나른한 봄볕 속에서 저물어 가는 4월을 마음껏 느꼈다. 그래, 이것도 게임 속이니 가능한 일이다. 내 시험 아니니까…. 현실로 돌아간 뒤의 4월은….

‘…….’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에게 4월이 행복한 달일 리가 있나. 아무튼, 이건… 일단 잊자. 조현우 시험 망쳐도 미안할 필요가 없는 게 다행이다. 원래 성적이 좋지는 않은 것 같으니….

***

한우주 집에 돌아와선 서연준이 가져온 시험지 몇 장을 풀었다. 공부할 때가 되니 다시 서연준이 신경 쓰였다. 적당히 집중하는 척하면서 수학 문제를 틀리고, 다른 것도 고루고루 틀려 줬다.

시험지를 푼 뒤에는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메뉴는 평범하게 치킨으로. 한우주는 이번엔 비닐장갑까지 준비해서 손에 껴 놓고는 치킨을 노려봤다. 서연준이 짐짓 놀란 투로 말한다.

“한우주 너…, 나이프는 어디 갔어?”

“나이프는 무슨 나이프?”

“아니, 너 원래 치킨….”

“치킨은 손으로 뜯어 먹는 거라던데? 비닐장갑 껴서.”

“아니, 아니…. 그러니까 그 말을 왜 이제 와서 듣냐고.”

둘이 떠드는 동안 난 열심히 치킨이나 뜯었다. 둘이 뭔 소릴 하는 거람. 한우주가 비장하게 치킨 한 조각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게 맞는 것 같아서. 스테이크 형식도 아니고, 다리 부위 같은 거 보면 대놓고 손으로 집기 편하게 되어 있잖아.”

“아…, 응. 그래. 알았어. 네 마음대로 먹어.”

치킨 가지고 왜들 이래. 예전에 한우주가 포크랑 나이프로 치킨 썰어 먹었던 이야기 하는 건가….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한우주가 닭 다리를 하나 집은 뒤 한 입 베어 먹는다. 그러곤 낯이 급격히 어두워져 닭 다리를 내려놓으며 말한다.

“사실 아직 이해 못 했어.”

서연준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는 치킨을 마저 뜯으며 물었다.

“뭘?”

“왜 손으로 들고 뜯어야 하는지.”

“…그게 편하니까?”

“안 편해. 뜨겁잖아. 기름에 튀긴 지 얼마 안 된 걸 왜 손으로 집어 먹어?”

“…….”

서연준은 뭘 하나 했더니 포크랑 나이프, 그리고 앞접시를 들고 왔다. 익숙하다는 듯이 한우주의 앞에 둔다. 그렇게 한우주는 나이프로 쪼개고, 포크로 찍어 가며 치킨을 먹었다.

아니…, 저번에 치킨을 깨작인 게 들고 먹기 불편해서 그런 거였나? 내가 비닐장갑과 손을 이용할 것을 그렇게 심하게 강요했던가? 아닌 밤중에 치킨을 먹는 방식의 다양성과 나의 화법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했다. 덕분에 입맛이 떨어져 소식할 수 있었다….

유독 길었던 일요일의 일과를 마치고, 나는 주섬주섬 짐을 쌌다. 한우주와 같이 사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는 일단 나가서 귀가하는 척을 해야 했다. 한우주는 얼굴에 대놓고 ‘못마땅함.’을 적어 놓은 것처럼 보였지만 나더러 어쩌라고? 나도 서연준이랑 둘이 있는 거 불편하거든.

“내일 보자, 한우주.”

“어.”

“…갈게! 잘 있어.”

“…….”

내 인사에는 대답도 안 한다. 미리 이야기 다 해 놓고 삐진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집을 나섰다. 서연준과는 처음 만난 공원까지만 함께 가고 갈라설 생각이었다. 다행히 공원에 가는 길까지 불편한 대화는 없었다. 마침내 공원에 도착해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려던 때였다. 겨우 긴장을 놓은 순간에 서연준이 말했다.

“현우야.”

“응?”

“아까 시험지 푼 거 말이야.”

다시금 몸이 바짝 긴장한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일부러 틀린 것 같던데.”

“…….”

“음…, 굳이 그럴 이유가 있나 궁금해서. 왜 그런 거야?”

‘일부러 틀렸어?’도 아니고 아예 확신하는 투다. 도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걸까. 고개를 저으며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푼 건데? 내가 좀 많이 틀리긴 했지…?”

“응?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저거 당황했다. 지금 어떻게든 잡아떼야 한다. 기억하자. 뻔뻔한 게 답이다.

“내가 공부할 시간이 많이 없어서. 성적이 썩 좋지는 않아. 아, 그러고 보니….”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어 간다.

“저번에 연준이 네가 준 파일 있잖아. 그거 혹시 잘못 준 거야?”

“아니? 현우 너 주려고 한 거 맞아.”

“아…, 거기 적힌 글 보고 내 거 아닌 줄 알았어.”

“글? 어떤 거?”

“이건 잘할 거다, 이건 어려워할 것 같다…. 이런 것들? 내 얘기 아닌 것 같아서 다른 사람한테 쓴 거 잘못 받은 줄 알았지.”

“…그래? 이상하네.”

이,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네가 제일 이상해. 서연준이 생각할 틈을 주면 안 될 것만 같아 재빨리 되묻는다.

“뭘 보고 그렇게 적은 건데?”

“응?”

“내가 뭘 잘하고 뭘 못하는지…. 뭘 봤길래 그렇게 착각했나, 싶어서. 너랑 나랑 같은 반이었던 적도 없는데….”

“…….”

서연준이 대답 없이 웃는 얼굴을 거둔다. 아, 망할. 너무 무리해서 물어봤나? 침묵이 꽤 길게 이어진다. 많이 늦은 시간도 아니고, 가로등이 환한데도 괜히 주변이 음산하게 느껴졌다. 하필 이럴 때 게임에서 서연준이 한우주에게 한 짓이 떠오른다. 물론 서연준이 내게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렇지만…, 어쩐지 느낌이….

“착각했나 봐.”

서연준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얼핏 주워들은 거로 적은 거야. 작년에 현우 너랑 같은 반이었던 애들한테….”

“…….”

“틀렸다니 민망하네. 아무튼, 나 때문에 당황했겠다. 미안.”

“…아니, 괜찮아.”

“응. 그럼 난 가 볼게. 내일 보자, 현우야.”

“…잘 가.”

나는 서연준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심장이 세차게 뛴다.

…서연준이 거짓말을 했다.

요약 파일에 적힌 건 조현우의 성적 따위를 염두에 둔 게 아니었다. 아마 조금도 비슷하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왜, 언제 나를 관찰한 거야?

발걸음이 무거운 탓에 돌아가는 길이 그 어느 때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불안하게 술렁이는 마음은 의외로 아주 작은 것에서 안정을 찾았다. 중간에 온 메시지를 확인하려 폰을 꺼내 들었다가 케이스 안쪽에 자리 잡은 귀여운 살구꽃 잎을 발견한 것이다. 꽃잎 하나에 안정을 찾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지금 서연준의 일로 불안해 봤자 해결될 일 하나 없다. 일단 집에 돌아가서 한숨 푹 자고 다시 생각하자.

불안함은 잠시 치워 두고 걸음을 서두른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너무 늦으면 안 될 것이다. 웃음이 또 비죽 나오는 게 기분이 또 제멋대로 오르락내리락한다.

설렘도, 불안과 걱정도, 명확한 원인은 모른 채로 의식 아래 깊다란 곳에 잠겨 자리를 잡아 간다. 그보다 한참 전에 생겨나 같은 방식으로 자리 잡은 감정이 더는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그 증거로, 그날 밤 꿈에는 한우주가 나왔다. 당시의 나는 몰랐지만 한우주는 꽤 자주, 어쩌면 매일 나의 꿈에 나타났다.

나는 내가 어떤 꿈을 꾸는지도 잘 모르는 채로 생각했다. 꿈을 꾸는 것이 참 즐겁고 행복하다고.

디링-

「System: 이벤트 목록이 갱신되었습니다. :: 서연준 :: 어차피 안 될 것을」

「System: 3주 차의 플레이를 평가합니다.」

「랭크: E, 엔딩은 볼 수 있을지 우려됩니다.」

「경고 1회 부여합니다. 3회 누적 시 난이도가 하향 조정됩니다.」

「경고: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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