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50화 (50/150)

50화

7. 파란

일주일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내일은 4월 28일 월요일, 중간고사 첫날이다. 일요일인 오늘은 저번 주와 마찬가지로 한우주의 집에서 서연준과 함께 시험공부를 하기로 했다.

나는 서연준이 신경 쓰여 공부를 아예 안 하고 말았다. 내 공부 머리 굳으면 다 서연준 때문이다. 이렇게 핑곗거리 하나 생긴 게 유일한 소득 되시겠다.

한우주와 서연준 사이는 물구나무서서 봐도 썸의 쌍시옷 자 하나 찾아보기 힘들다. 불편한 일도, 진전도 없이 현상 유지만 겨우 하고 있으니, ‘둘의 사이를 어떻게 하느냐.’가 나의 인생이 걸린 중간고사이고 최대의 고난인 셈이다.

이게 보통 골머리를 앓는 일이 아니라, 기출문제를 푸는 중에 고뇌하는 연기 하나만큼은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한우주랑 서연준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거든. 대충 문제를 다 틀리게 풀어 놓고 나면 서연준이 채점을 했다. 좍, 좍, 좍. 시험지 위로 빨간 비가 시원하게 내린다.

서연준이 꽤 심각한 얼굴을 하고선 나의 시험지를 들여다봤다. 응, 그야 심각하겠지. 전략적으로 망쳐 놨으니까. 점수 그냥 주는 쉬운 문제는 맞히고, 다른 건 거의 틀려 놓고, 그중 몇 개는 찍어서 운 좋게 맞힌 것처럼 위장해 놨다. 혼자 뿌듯해하고 있는데 서연준이 말을 건넸다. 시선은 여전히 시험지에 둔 채였다.

“현우야. 당장 내일이 시험인데 이런 거 물어보기 미안하지만…, 혹시 목표 점수 같은 거 있어?”

그런 게 있을 리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대답한다.

“그, 글쎄.”

“그럼 중간고사 말고 장기적인 목표는? 대학교 진학이라든가….”

“응? 대학은 가야….”

아, 잠깐. 실수다. 반사적으로 대답해 버렸다. 급하게 말을 고친다.

“가야 할까? 잘 모르겠네.”

서연준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곤 말이 없었다. 내 시험지를 죽어라 노려보며 머리를 굴리는 것이 무슨, 내 진로 설계라도 하는 것 같다.

한편, 한우주는 시험지를 반만 풀고 말았다. 머리 좋다는 게 사실이긴 한가 보다. 푼 문제는 전부 맞았더라. 서연준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종이 하나를 돌돌 말아 한우주의 정수리를 통, 하고 쳤다.

“풀 거면 다 풀던가. 종이 아깝게.”

“귀찮은 걸 어쩌라고.”

“귀찮아도 해야지. 한우주 너 정도면 뭐든 할 수 있을 텐데. 좋은 머리 썩혀 둘 거야?”

“잔소리.”

뭐, 얼추 이런 식으로 하루가 지나갔다. 한 명은 일부러 문제 다 틀리고, 한 명은 귀찮아서 풀다가 말고. 오늘만큼은 서연준이 안되어 보이긴 하네….

어김없이 해가 저물고 저녁이 찾아온다. 귀찮음을 이겨 내고 서연준과 공원까지 나와서 작별 인사를 했다. 한우주와 내가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온 천하가 다 알아도 서연준만은 알아선 안 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서연준은 헤어지기 직전, 내게 ‘시험 10분 전에 보면 좋은 초 요약 노트’를 건네줬다. 다행히 이번 노트에는 이상한 코멘트 같은 건 없었다.

지난 주말 이후로 나는 교과서에 필기 하나 하지 않았고, 쪽지 시험이라도 보는 날에는 일부러 전부 틀리며 최대한 조현우의 기존 성적에 맞추어 행동했다. 그게 통한 것일까? 이번 주에는 서연준의 의미심장한 행동으로 불편을 겪는 일은 없었다.

반갑지 못한 일이다. 이전에 서연준이 조현우가 아닌 ‘내가’ 한 것들을 어떻게든 관찰하고 캐냈다는 추측에 개연성이 생겨 버렸으니까.

‘개 피곤해….’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날이 없다. 서연준과 함께 있을 때가 특히 불편한데 요즘엔 쉬는 시간마다 찾아오고, 2주 연속 일요일을 함께 보내니 미칠 노릇이다.

서연준과 헤어진 후 집에 돌아온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려서,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소파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외출복으로 바로 눕는 거…,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짓인데…. 일어나서 씻고 옷 갈아입어야 하는데…. 진짜 힘들다….

“조현우 죽었어?”

“아니…, 살았어….”

잠깐 눈 감고 쉬고 있으니 한우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괜히 혼자 찔려선 변명을 마구 늘어놓았다.

“1분만 이러고 있다가 일어날 거야. 일어나서 씻고 제대로 옷 갈아입고 잘 거니까….”

“알았어.”

맞은편에서 가죽이 눌리는 소리가 났다. 한우주가 소파에 앉았나 보다. 그러고 한참을 조용히 있었다. 아, 이러다 자겠는데. 슬슬 일어나야겠다, 하고 생각할 즈음 한우주가 뜬금없는 물음을 던졌다.

“조현우 너 대학 갈 거야?”

…갑자기 뭘 묻는 거야? 감은 눈이 절로 떠졌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겨우 소파에 기대어 앉은 뒤 크게 하품을 했다. 어떻게든 정신을 붙들고 그나마 조현우 같은 대답을 찾아낸다.

“못 가지 않을까?”

“왜?”

“대학을 아무나 가나…. 돈 있고 성적 돼야 가지.”

“그러니까, 갈 수 있으면 가고 싶다?”

“그럴걸…?”

한우주야 언제나 뜬금없지만, 이번 건 꽤 당황스럽다. 저거 하다 하다 이제는 대학 보내 주겠다고 하는 거 아니야? 한우주라면 그럴지도 몰라. 와, 제발. 이제는 생각에 잠긴 모습이 두렵기까지 하다.

“가면 뭐 할 건데?”

“…공부하겠지?”

“무슨 공부?”

“과에 맞는 공부 하겠지?”

“무슨 과 가려고?”

한우주가 이제는 질문 세례로 날 죽일 셈인가?

“성적 맞는 과 가겠지.”

“예를 들면?”

“아니, 미래의 내 성적을 내가 어떻게 알아?”

“뭐, 희망하는 것도 없어?”

“몰라. 취업률 괜찮은 곳 중에서 골라 가겠지.”

“취업하려고 대학 가?”

“그렇지? 아무래도 4년 학사가 있으면….”

아, 잠깐. 쏟아지는 물음에 정신 못 차리고 곧이곧대로 대답해 버렸다. 대답 바꿔. 안태원 치우고 조현우 이리 와.

“…있으면 좋겠지만 그림의 떡 아닐까?”

“음….”

뭘 또 고민하고 앉았어? 제발 이쯤 해라. 덕분에 잠은 달아났네.

“알았어. 쉬어.”

“엥?”

“왜?”

“아니, 아니야. 너도 쉬어. 잘 자.”

진짜로 그만할 줄은 몰랐다. 졸업하면 뭐 할 거냐, 어디 취업 하고 싶냐, 희망 연봉은 어떻게 되냐, 결혼은 몇 살쯤 할 거냐, 애는 몇 명 낳고 싶냐, 뭐 인생 계획 다 털려는 줄 알았지.

안도하는 마음 반, 그래서 왜 물어본 건데? 하는 찝찝한 마음 반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줄 알았다.

오늘 도대체 무슨 날이라도 되나? 아니, 항상 이랬던가. 아주 온종일 시달리는구나. 서연준, 한우주, 그리고 그다음에는….

「…」

「……」

「랭크가 C 이하로, 난이도가 하향 조정됩니다.」

「매우 어려움 → 어려움」

「난이도 하향으로 인해 ‘1’회, 게임 진행에 도움이 될 정보 혹은 물건을 제공합니다. 원하시는 것을 음성으로 입력해 주세요.」

다름 아닌 시스템 문구가 나를 괴롭혔다. 딱 보면 내게 좋은 일 아니냐고?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마시면 무조건 사랑에 빠지는 사랑의 묘약.”

「제공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이름을 적으면 사랑에 빠지는 러브 노트.”

「제공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엔딩으로 직행하는 티켓.”

「제공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한우주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안경.”

「제공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공략캐 물음표가 누구인지?”

「제공할 수 없는 정보입니다.」

“아!!! 되는 게 뭔데?!”

「다음에 해당하는 것은 제공할 수 없습니다: 인물의 심리에 직접 관여하는 물건 / 게임의 엔딩과 직결된 것 / 숨겨진 데이터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 / 우주선, 광선 검, 법적으로 문제없는 세후 100억의 현금 등 게임 진행에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판단한 것 등….」

망할. 우주선이랑 광선 검 말할 건 어떻게 알았지? 그보다 100억은 게임 진행에 꽤 도움 되지 않나? 뭐가 이렇게 까다로워?? 그럼 도대체 뭘 달라고 해야 해?

“1억?”

「…….」

뭐냐. 이젠 반응도 안 하냐? 이럴 거면 되는 거 리스트를 주고 그중에서 고르라고 해라. 이놈의 시스템 마음에 안 들어 죽겠다.

공략캐 중에 가장 호감도가 높은 캐릭터를 물어볼까? 애초에 연애할 생각이 있는지는? 이런저런 물음을 떠올려 보았지만, 굳이 시스템에게 물을 필요도 없이 답이 예상되었다. 게다가 뭣하면 한우주한테 직접 떠볼 수도 있는 거고….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후보를 몇 개 추렸다. 그중 첫 번째 것을 읊어 본다. 곧, 시스템 문구가 눈앞에 떠올랐다.

「승인되었습니다.」

「요청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

‘…….’

…이건 또 뭐야?

***

중간고사는 사흘간 치러졌다. 시험을 잘 보는 것 따위 나의 안중에도 없었다. 오히려 대차게 망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 그렇다고 괜히 이 문제, 저 문제 풀고 일부러 틀리는 식으로 공들여 조현우인 척했다가는 어딘가에선 반드시 티가 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찍었다. 1에서 5까지 참 다양하게 찍었다. 천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 점수는 바닥을 길 것이다.

시험 기간은 빠르게 지나가 드디어 내가 손꼽아 기다린 목요일이 되었다. 거의 한 달을 매일 들락거린 곳. 다신 오고 싶지 않은데 좀처럼 뜻대로 되질 않는다.

“당분간 큰 움직임은 자제하시고요. 주에 2, 3회씩 나오셔서 물리 치료 받으셔야 해요. 물리 치료사님 동반해서 재활 운동을 진행할 거예요. 간단한 건 집에서도 꾸준히 해 주시는 게 좋은데, 이 부분은 재활 차도 보고 다시 안내해 드릴 거니 당장은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깁스 풀면 끝인 줄 알았더니 이젠 재활이냐. 다신 다치지 말아야겠다고 몇 번을 다짐하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깁스를 푸니 팔이 시원하고 날아갈 것 같고 개운하고…, 조심해야 한다지만 양쪽 팔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한 2주 전부터 진료를 마친 뒤에 꼭 거치는 과정이 있다. 접수대에 가자마자 눈에 익은 선생님이 고개를 젓는다.

“아….”

“찾으면 꼭 연락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놈의 핸드폰. 이쯤 되면 병원엔 없다고 봐야겠지. 누가 훔쳐 갔다고 생각하는 게 낫겠다. 그 고물 팔아 봤자 얼마 안 될 텐데.

대기실에 앉아 기다리는 한우주와 합류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게 평소 방과 후의 일과이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한우주, 너 먼저 집에 가. 난 어디 좀 들를 데가 있어서.”

“어디?”

“뭐…, 그냥. 별거 아니야. 약속이 좀 있어서. 얼마 안 걸려.”

“배터리는?”

“80프로 넘게 충전돼 있어.”

“음…, 그래. 늦을 거 같으면 연락하고.”

말하고는 자리에 꿈쩍 않고 서 있는 한우주의 등을 열심히 떠밀었다. 그래 봤자 조현우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한우주가 마지못해 걸음을 뗀다.

“아, 잠깐. 한우주.”

…그냥 보내려 했는데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확인해야겠다. 한우주가 뒤돌아 나를 본다.

“그, 너희 집 도어 록 번호가 뭐였더라?”

“뭐 얼마나 늦으려고 그래?”

“아니! 그냥 혹시 몰라서.”

“…문자로 보내 둘게.”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한우주를 어떻게든 달래 보냈다. 헤어진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한우주에게서 문자가 왔다. 매번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알려 주는 한우주도 참….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지도를 켜고, 기억에 의지해 걸음을 옮긴다. 오늘의 가장 큰일이 남아 있다. 그 망할 자취방, 게임에 들어온 지 한 달째 문턱도 못 밟아 본 곳. 조현우의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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