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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51화 (51/150)

51화

학교에서 걸어서 40분은 걸리는 곳, 낡고 허름한 빌라의 퀴퀴한 지하. 게임 시간상으로 내가 이곳에 온 게 4월 1일이고, 오늘은 5월 1일이니 딱 한 달 만에 찾아온 것이다. 분명 나는 조현우의 몸속에 들어와 지내고 있는데도 조현우의 집이 낯설기만 하다. 번쩍거리고 고급스러운 한우주의 오피스텔이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이니 말 다 했지.

현관문에 달린 도어 록을 향해 손을 뻗는다. 아, 손가락이 안 움직여. 안태원, 그냥 눈 딱 감고 저질러. 어차피 언젠가는 확인해야 할 거잖아. 깊게 심호흡을 한 뒤, 시스템이 알려 준 번호를 입력한다. 제발, 시스템이 날 엿 먹인 거였으면. 틀린 번호였으면.

[♪~]

…하. 쌰앙.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의 잠금이 풀린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 버린 것 같다. 우연인가? 우연이라 넘겨짚기에는 좀…, 많이 이상하잖아.

몇십 분 전, 한우주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한우주: 001017」

「한우주: 도어락 비밀번호」

001017….

도대체 뭐야?

왜 한우주 집 비밀번호랑 조현우 집 비밀번호가 같은 건데?

어딘가 익숙한 게 본 적 있는 숫자 같기도 하고…. 뭐였더라? 머리를 굴려도 떠오르는 것은 없다. 열린 문틈 사이로 기분 나쁜 습한 공기가 새어 나왔다. 문 너머에서 뭐든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조현우에 대한 것, 그 어떤 것이든.

핸드폰이 진동하며 메시지의 수신을 알린다. 나는 습관적으로 한 번 확인하고 넘겼다. 충분히 신경 쓰일 내용이었으나, 당장은 이 망할 집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오재영: ㅇㅑ」

「오재영: 야야야야 조현우」

「오재영: 너 허지훈 만낫음?」

「오재영: 얘 오늘 퇴원했다는데ㄷ?」

***

‘곰팡이 냄새….’

한 달을 방치한 반지하 방의 상태가 좋을 리 없다. 어디 벽지 사이에 곰팡이라도 핀 건가? 으…. 현관문과 창문을 전부 열어 놓으니 그나마 사람이 숨 쉴 만한 곳이 됐다.

방 가운데에 서서 주변을 둘러본다. 딱 한 사람이 생활할 정도의 비좁은 원룸…. 마땅한 수납공간이 없어 방 한구석에 모아 둔 잡동사니와 가스레인지가 하나 달린 주방. 벽장에는 이불과 옷가지를 가지런히 개어 놓았지만, 워낙에 공기가 칙칙해 깔끔한 인상은 못 주었다. 나머지는…, 접이식 책상과 화장실, 그리고 안에서 뭐가 썩어 가고 있을지 몰라 열기 두려운 작은 냉장고 정도. 이거 말곤 정말 뭐가 없다.

맥 빠진다. 고작 이 정도만 봐서 뭘 알 수 있겠어? 사정이 안 좋구나, 힘들게 사는구나. 그뿐이잖아. 그 정도는 자취방 문 따고 들어올 것 없이 진작 알고 있던 건데.

‘설마. 뭐라도 있겠지.’

방구석에 쌓인 잡동사니나 하나씩 집어 살피려 했다. 가장 부피가 큰 것은 검은색의 두꺼운 서류 가방이었다. 들어 보니 무게가 꽤 된다. 어, 이거 설마.

지익, 지퍼를 열고 안을 확인한다. 와, 무슨 벽돌이라도 든 줄 알았네. 서류 가방이 아니라 노트북 가방이었구나. 비록 겉보기에 상태가… 제대로 작동하긴 할지 의심스러울 정도지만, 노트북이면 살펴볼 가치는 충분하다. 그렇게 노트북을 펼쳐 보면….

‘이건 좀 심한데?’

무슨…, 노트북의 손상된 부분을 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여 놨다. 이거 켜지긴 하는 건가?

툭, 툭. 전원 버튼을 눌러도 반응이 없다. 미친, 고장 났냐? 진짜냐? 아니, 침착하자. 아직 모르는 거야. 가방 안에 있던 충전기를 꽂아 노트북에 연결한다. 다행히 충전 표시가 뜨는 게 아예 고장 난 건 아닌 모양이다. 배터리가 닳았을 뿐인가 봐.

나는 방구석에 쪼그려 앉아 노트북이 충전되기를 기다렸다. 한…, 15분에서 30분쯤 기다리면 켜서 확인할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할 게 없어 방을 다시 한번 눈으로 훑는데 한숨만 나왔다. 여기서 살았다간 건강한 사람도 금방 아플 것 같다. 깁스도 풀었으니 조만간 한우주 집을 나오긴 해야 할 텐데.

엔딩을 언제쯤 볼 수 있을까? 여기서 얼마나 생활해야 할까? 그런 걸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이렇게까지 막막할 일이냐….

푹, 깊은 한숨 소리 사이로 밖에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이웃인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한다. 환기 때문에 열어 둔 문을 닫을 생각이었다.

“으악?!”

분명 닫으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문이 벌컥 열렸다. 덕분에 손잡이를 잡고 있던 나까지 복도 쪽으로 끌려 나오고 말았다. 뭐야, 누가 남의 집 문을 이렇게….

“…….”

“…….”

응? 어라, 아니. 오, 아하. 아는 얼굴이다. 그러니까, 젠장.

“야. 조현우.”

“…….”

“아무리 훔쳐 갈 게 없대도 뭔 놈의 문을 이렇게 열어 두고 사냐?”

허지훈이 왜 여기 있지? 아, 맞아. 아까 오재영이 허지훈 퇴원했다고…. 아니, 퇴원한 건 알겠는데 왜 조현우 집에 온 거냐고?

“새끼 무슨 볼 때마다 정신이 빠져 있어? 좀 비켜 봐. 들어가게.”

나는 명령어를 입력한 로봇처럼 허지훈의 말에 따라 움직였다. 삐걱대며 방 안으로 들어가니, 허지훈이 따라 들어와 현관문을 닫았다.

미쳤나? 나 지금 허지훈이랑 둘이 있게 된 거? 그것도 조현우 집에서? 여긴 소리 지르면 말리러 올 의료진 같은 것도 없다고. 온몸에 힘을 주고 꼿꼿이 서 있자 크고 묵직한 손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깁스는 언제 풀었냐?”

“오, 오늘.”

“아, 그래. 너 그건 알아?”

“…뭐를?”

“나도 오늘 퇴원했다.”

“…….”

눈치 준다. 어딜 봐도 눈치 주는 거다. 무서워 죽겠으니 제발 노려보지 좀 말라고 빌고 싶다.

“야.”

“네?”

“이게 미쳤나. 웬 존댓말?”

일부러 하려던 건 아니고 몸이 살고 싶어서 멋대로 이러잖아. 허지훈이 한 손을 들어 내 쪽으로 뻗는다. 그 모습이 무슨,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데 느닷없이 마주친 곰이 나를 보고 두 발로 서서 공격하려 드는 것 같다.

따악-!

“으아악!”

미치도록 아파서 눈물이 핑 돈다. 허지훈 저 이, 미친. 나 이마에 구멍 뚫린 거 아니야? 양손으로 이마를 감싸는데 앓는 소리가 마구 나왔다. 인간 손가락 맞냐? 무쇠로 만들어진 거 아냐? 이게 딱밤으로 느낄 수 있는 고통인가? 통증에 공포를 잊고 원망스레 올려다보는데, 저 미친 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고 있다.

“아프냐?”

나쁜 놈아, 그걸 말이라고. 아파서 말도 안 나와.

“아프라고 때렸다, 새끼야. 못 돼먹은 놈.”

누가 누굴 보고 못됐다는 거야? 허지훈의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하나로 정립된다.

악마다.

덩치 크고 힘 무식하게 센 악마 자식.

어디서 난 용기인지 허지훈을 죽어라 노려보는데 저놈은 그걸 보고 헛웃음을 친다.

“어쭈, 멀쩡한데? 한 대 더 때려도 되겠다?”

“시, 싫어!!!”

“조현우 존나 건강하네. 목청까지 좋아?”

“개, 개새끼….”

“뭐, 개새끼? 다시 한번 말해 봐.”

“…….”

이놈의 입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일을 치는구나.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 않자 허지훈이 혀를 차며 바닥에 털썩 앉았다. 허지훈은 굳이 고개 숙인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시선이 다시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획,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울린다.

“야.”

“…….”

“그거 하지 마.”

“…….”

“대답 안 해?”

“뭘… 하지 말라고….”

“존나 쫄아서 눈 피하지 말라고. 기분 개 같으니까.”

그게 내 마음대로 되냐? 너야말로 얼굴이랑 입 좀 곱게 쓰라고 말하고 싶다. 말 못 하겠지만. 주춤대며 겨우 시선을 맞추자 허지훈의 성난 도깨비 같은 표정이 그냥 도깨비 같을 정도로 풀렸다.

“앉아.”

내가 개냐? 어디서 앉으라 마라야…. 라고, 속으로만 반박하며 허지훈과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그래 봤자 방이 좁아서 두세 걸음 거리밖에 안 되는데도 허지훈은 나의 모든 행동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지금 장난하냐? 가까이 안 와?”

“…충분히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오라고.”

반항하며 도망가고 싶었지만, 허지훈의 화만 돋우고 아무런 소득이 없을 게 뻔했다. 주섬주섬, 참 멋없게 허지훈 쪽으로 다가가 자리 잡았다. 그 상태로 한동안 마주 보고 있기만 했다. 허지훈은 말없이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고 부담스러워 시선이라도 피하려 하면 곧장 불편한 티를 내었다. 강제로 시선이 묶인 탓에 나 또한 허지훈을 볼 수밖에 없었다.

‘입원했던 줄도 모르겠네.’

환자복 아닌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데다가, 길었던 머리는 그새 이발한 건지 짧게 친 상태였다. 어쩐지 전보다 인상이 험악하다 싶더라니, 눈썹의 흉터가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허지훈이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에 불만을 고스란히 담고선 눈썹을 연신 꿈틀대다가 마침내 입을 연다.

“야. 너 핸드폰 또 잃어버렸냐?”

“…아니?”

“그런데 왜 연락을 안 해?”

“너, 너도 안 했잖아.”

“조현우 개념 말아 먹었나. 기껏 인내심 발휘해서 시간 줬더니 뭐가 어째?”

“무슨 시간….”

“먼저 연락하고 사과할 시간, 기회, 나 퇴원할 때까지. 이거 진짜 안 되겠네?”

“…….”

연락 안 하면 미안해야 할 사이인가? 조현우랑 허지훈이 친한 건 알겠는데 저번에 병원에서는 그냥… 서로 왁왁 소리 지르며 다툰 기억밖에 안 난다. 이쪽에서 먼저 나서서 사과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아닌가? 많이 친하니까…, 퇴원 날까지 연락 안 한 건 서운할 만할지도?

“…미안?”

“…….”

“내, 내가 잘못했…다. 응. 내가 너무했네.”

“야.”

“응…”

“하나도 안 미안해 보여.”

“…….”

“내가 이딴 구질구질한 질문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러면 그냥 안 하면 안 될까? 질문이 뭐든 간에 난 만족스러운 답 못 해 준다고.

“네가 나한테 미안한 마음이 한 톨이라도 있다고 쳐. 그래서 사과했다고 치자고. 거기까진 봐준다.”

허지훈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를 훑으며 관찰하는 날카로운 시선이 내 머릿속을 관통하는 것만 같다. 무슨 말을 하든 뻔뻔하게 잡아뗄 각오는 되어 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열 번, 스무 번 반복하면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허지훈은 나의 거짓말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집요하게 파고들 것만 같아서….

“도대체 뭐가 미안한 건지 이유나 들어 보자.”

“…….”

“지금 네가 하는 거 봐서는 하나도 모르겠거든? 그러니까 조현우 네가 진짜 나한테 미안한 게 맞다면….”

꾸욱, 허지훈이 검지로 내 가슴께를 누른다.

“설명해 봐.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내 돌대가리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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