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왜 아무 말이 없지? 전화가 끊긴 것도, 스피커를 꺼 둔 것도 아닌데. 한우주의 이름을 두세 번쯤 더 부르고 난 뒤에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뭐야, 끊어진 줄 알았잖아.”
[언제 와?]
“응?”
[얼마 안 걸린다 해 놓고 생각보다 늦어서.]
어라. 내가 한우주한테 연락을 따로 안 했던가? 아 망할. 생각해 보니 안 한 것 같다. 허지훈 때문에 정신이 없어 완전히 잊고 있었다. 한우주 설마 화난 건 아니겠지…?
“그, 그럴 예정이었는데 일정이 좀 꼬였어.”
[음, 언제 오려고?]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저녁 9시가 다 되어 갔다. 뭔 놈의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 허지훈 이야기 좀 듣다가 고기 먹은 게 다인데…. 얼른 식사 마치고 들어가야겠다. 여기서 한우주 집까지 얼마나 걸리지. 지도를 켜 거리를 대충 가늠해 본다.
“늦어도 10시쯤…?”
한우주가 기운이 잔뜩 빠진 숨을 내쉰다. 으악, 내가 잘못했다고. 허지훈한테 끌려다니기만 했으면 이렇게 미안하지는 않았을 텐데, 방금까지 고기를 너무 맛있게 먹어 버린 탓에 양심이 쿡 찔렸다. 고기 한 점 집어 먹을 시간에 메시지 보낼 수 있었잖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렇지만 허지훈이 고기를 너무 잘 구워서…. 참나, 안태원 이 자식 어째 남 탓하는 실력만 늘어난다.
“한우주 미안!”
[뭐가?]
“화, 화난 거 아니야?”
[아니, 그냥… 졸려서.]
“뭐? 지금?”
[어. 왜?]
“너 원래 새벽에나 자잖아.”
[요 며칠 시험 쳐서 피곤해.]
…농담인가? 아니면 장난치는 건가? 지금까지 서연준이 이야기해 준 걸 돌이켜 본다. 문제를 풀기는커녕 시험지 따위 읽어 보지도 않고 꿀잠 잤을 것 같은데. 곧 다시 들린 목소리에는 졸음이 한가득 묻어 있어서, 찰나의 의심이 죄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얼른 와…. 나 잠들면 너 문은 누가 열어 줘?]
그리고 다시 들리는 하품 소리에 죄책감이 극에 달했다. 웬일로 일찍 자겠다는 애한테 이게 무슨 짓이냐? 허지훈한테 인사만 하고 집까지 뛰어가야겠다.
딸랑—
그때 종소리가 요란히 울리며 식당의 문이 벌컥 열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허지훈이 나와 버렸다. 그리고 나를 향해 목청 한 번 크게 말한다.
“야, 조현우. 고기 다 식는다??”
“…….”
[…….]
“뭐야? 표정이 또 왜 그래?”
허지훈이 내가 한우주와 통화하는 걸 알면 난리가 나겠지. 불 보듯 뻔하다. 잠깐, 그럼 한우주는 어떻지? 한우주는 내가…, 조현우가 허지훈이랑 같이 있는 걸 알면 무슨 반응을….
[허지훈이야?]
…굳이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다. 1초도 지나지 않아 직접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약속이라는 게 허지훈이랑 있는 거였어?]
“아…, 음…, 어어음?”
환장하겠다. 양쪽에서 한우주와 허지훈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린다.
[너 어디야?]
“조현우? 너 무슨 문제 있냐?”
허지훈이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온다. 어떡하지, 전화를 끊어 버릴까? 아니지. 그랬다가 한우주랑 사이라도 틀어지면 어떡해? 허지훈이야 원작 게임에 등장도 안 하는 캐릭터지만, 한우주는 주인공이니까…. 게임 진행을 고려해서 중요도를 따져 선택하자면….
‘…허지훈을 내치고 얼른 한우주한테 가야겠다.’
결심하기 무섭게 몸을 돌려 허지훈을 바라보았다. 이내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너 진짜 왜 그래?”
허지훈은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고선 나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허지훈의 두 눈에 담긴 유대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아무리 무감한 사람이라도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크고 깊은 것이. 덕분에 나는 말문이 아주 막혀 버렸다. 그 모습이 허지훈에게는 겁에 질린 것으로 보인 모양이다.
“누구 전화야? 어떤 새끼인데 그래. 뭐, 야구한다던가 하는 그 새끼야?”
“…그런 거 아니야. 난 괜찮으니까 들어가 있어.”
“존나 안 괜찮아 보이거든. 야, 그거 이리 줘 봐.”
“아, 아니. 야. 잠깐!”
최악이다. 상황 한번 개 같다. 허지훈이 내 핸드폰을 순식간에 가져가 버렸다.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하곤 표정이 굳는다. 어둡게 가라앉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러고는 망할,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
“도대체 지금 뭐 하자는 거냐?”
한우주에게 하는 말일 텐데도 기분이 이상했다. 무거운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어서, 꼭 내게 건네는 말 같기도 했다.
“뭐? 이 개새끼가….”
둘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사이좋게 안부나 묻고 있을 리는 없고, 이대로 가만뒀다간 사달이 날 것이 뻔했다. 손을 뻗어 어떻게든 핸드폰을 다시 가져오려 했다. 키도 힘도 허지훈에게 한참 밀려 역부족이었지만.
다행히 기회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한순간, 힘줄이 불거지도록 핸드폰을 세게 쥐고 있던 허지훈의 손에 힘이 풀린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 겨우 핸드폰을 낚아챘다. 일단 끊어. 핸드폰에 작게 속삭이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다.
“야, 조현우.”
혹여 허지훈이 또 핸드폰을 앗아 갈까 싶어 등 뒤로 감추어 버린다. 아, 느낌이 안 좋다. 불행히도 나의 고난은 이제부터 시작될 모양이었다.
“너 한우주랑 연락하고 있었냐?”
“…….”
“누가 강제해서, 싫어서 억지로 한 거 아니고, 네가 원해서 쭉 연락하고 있었냐고.”
“…뭐?”
“대답해.”
울분에 찬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허지훈의 입가가 괴로운 듯 비틀린다. 나는 허지훈이 이전까지 그랬듯 금방 알아서 화를 풀기를 은근히 기대했으나 헛된 바람이었다.
“내가 이딴 걸 한우주한테 듣고 알아야 하냐?”
두 가지 생각이 맞부딪혔다. 첫째는, 어차피 허지훈은 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존재가 아니니 무어라 생각하고 떠들어 대든 무시하자는 것. 둘째는 잘 안 되는 조현우 흉내를 내서라도 허지훈을 최대한 달래 보자는 것. 여유롭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 따위 없었다. 머릿속이 한껏 어질러진 상태로 더듬더듬 말을 꺼낸다.
“그동안 힘든 일이 너무 많았어. 그때마다 한우주가 도와줘서, 나는 그냥….”
“허.”
허지훈은 내 말을 끝까지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헛웃음을 치고는 묻는다.
“조현우. 너 아직도 한우주 좋아하냐?”
“…….”
내가 방금 뭘… 잘못 들었나? 조현우가 한우주를… 뭐?
“여태 정신 못 차리고 그 정신 나간 새끼가 좋다고 쫓아다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조현우가. 썅, 조현우가 알겠지. 답답함에 욕을 내지르고 싶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 했다. 허지훈과 시선을 맞추고 한 글자마다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한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니면 뭐야? 그게 아니면…, 야. 지금 이 상황 존나 어이없고 이해 안 가는 거 알지? 어?”
“허지훈. 내 말 좀….”
“야. 둘이 사귀냐?”
“그럴 리 없잖아. 나 진짜 네가 왜 그딴 생각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가거든.”
“좆같이 잡아떼지 말고 솔직히 말해. 한우주랑 뭐 있잖아. 뭐든 있을 거 아니야.”
“아…, 진짜. 사람 말 못 알아처먹냐?”
결국에는 생각한 것을 그대로 말해 버렸다. 허지훈은 콧잔등을 찡그릴 뿐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그저 이 상황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나 갈 거야.”
너무나 많은 것들이 나의 신경을 거슬렀다. 당장은 나도 허지훈도 제정신이 못 되었다. 이 상태로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이니 오늘은 이만 헤어지는 게 낫겠다. 그대로 허지훈을 지나쳐 가려는데 손목이 붙잡혔다.
“가긴 어딜 가?”
“집. 이거 놔.”
슬슬 한계였다. 이성을 붙들고 있기 힘들었다. 허지훈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날 붙잡은 힘만 우악스러워졌다. 아, 좆같다. 좆같은 허지훈이 말한다.
“이대로 간다고? 지금 장난해?”
“내가 장난하는 것 같냐? 이거 놓으라고.”
“지랄 좀 작작해, 새끼야. 제대로 말은 하고 가야 할 거 아니야.”
지랄? 내가 무슨 지랄을 했는데. 뚝, 실낱같은 이성이 끊기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분노와 억울함, 답답함 따위가 한데 섞여 속을 뒤집어 놓는다.
“말? 무슨 말. 지금껏 내가 한 건 말 같지도 않아? 아니라고. 네가 물은 거 다 아니라고.”
“씹, 그렇다 쳐. 그럼 도대체 왜….”
“왜는 나야말로 묻고 싶다. 너 왜 이러는데? 한우주가 너 존나 패 놔서 그래? 내가 네 복수라도 해 놔야 했냐?”
“…….”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눈가가 뜨거웠다. 지금 이 순간을 포함해서, 싫은 일을 너무나 많이 겪었다.
“내가 지랄한다고…. 그래, 네 말이 맞겠지. 야, 그냥 한 대 쳐.”
“뭐?”
“한 대로 모자라? 그냥 존나 패. 네 감정 풀릴 때까지 패라고. 어디 신고 안 할 테니까.”
“야, 조현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허지훈이 조현우 타령하는 것에 응하고 싶지 않았다. 말없이 허지훈을 노려본다. 언제 시작된 것인지 모를 울음으로 뺨이 축축했다. 허지훈은 입만 몇 번 벙긋거리다가 허탈한 듯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나는 붉게 자국이 남은 손목을 매만지며 말했다. 지칠 대로 지친 나를 위한, 동시에 조현우를 끔찍이 아끼는 허지훈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내가 이상해?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돼?”
“…….”
“그거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그냥 받아들여.”
그 말을 끝으로 나는 허지훈을 지나쳐 그 자리를 벗어났다. 허지훈은 이번엔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대로 정신없이 걸어 조현우의 집까지 왔다. 일 돌아가는 꼴이 개 같아서라도 조현우가 뭐 하는 놈인지 알아야겠다. 온 집 안을 헤집어 놓았지만 그럴듯한 소득은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방의 구석으로 향한다. 낡아 빠진 노트북의 작은 조명에 초록 불이 들어와 있었다. 충전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결국에는 이거뿐이구나.
툭, 전원 버튼을 누른다. 액정 위로 부팅 화면이 떠올랐다. 진짜 다행이다. 켜지기는 하나 봐. 희망을 품기 무섭게 화면이 꺼졌다.
‘썅, 이거 왜 이래?’
툭, 툭툭. 다시 전원 버튼을 눌러 본다. 마찬가지다. 부팅 화면까지는 작동하다가 이후에는 픽, 꺼져 버렸다. 나는 완전히 열이 올라 노트북을 던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사실 못 던진 것에 가깝다. 이 고물 노트북은 더럽게 무거웠고 이제 막 재활을 시작한 조현우의 팔은 나약하기 짝이 없었다.
원수 같은 노트북은 닫아 버리고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려 했다. 아까 허지훈이랑 다툴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뭘 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흐릿했다. 벽에 기대어 눈을 감은 채로 심호흡을 하자 조금씩 현실감이 돌아왔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이 바쁘게 진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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