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나 때문에 깼어?”
“어…. 무슨 한숨을 그렇게….”
내가 한숨을 쉬었던가? 한우주가 깰 정도면 얼마나 심하게 쉬어 댄 거야…?
“미안. 깬 김에 머리 말리고 방에 들어가서 자.”
“…….”
한우주 저것이 내 말은 무시하고 도로 눈을 감아 버렸다. 다가가 흔들어 깨우니 눈을 감은 채로 인상을 팍 쓴다.
“하지 마. 귀찮아. 그냥 잘 거야.”
…하여튼 고집은. 마지못해 타협점을 찾는다. 한우주의 방에서 이불을 가져와 덮어 주었다. 그리고 방에 돌아가려는데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우주, 자?”
“…….”
자는 사람 앞에서 뭐 하냐. 얼른 방에 가야지.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몸이 아예 따로 논다. 나는 소파 앞에 쪼그려 앉아 한우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왜?”
아 미친 깜짝이야. 넘어질 뻔했네. 한우주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대답한 거야, 아니면 잠꼬대한 거야?
“한우주?”
“…음.”
거의 반은…, 아니 80%는 자고 20%쯤 깨어 있는 것 같은데. 불현듯 비겁한 생각이 떠올랐다. 제정신인 한우주 상대로는 묻기 망설여지는 것이 있었다. 지금 질문하면 기억 못 하지 않을까? 물론 제대로 된 답변 역시 기대하기 힘들 테지만…. 짧은 고민 끝에 입을 연다.
“한우주. 너 왜 나한테 아무것도 안 물어봐?”
“…….”
별다른 질문 없이 평소와 같이 대하는 모습에 고맙기도, 안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의아했다. 적어도 허지훈에 대해서는 한마디 정도 할 줄 알았는데, 고깃집 앞에서 통화한 이후로 한우주의 입에서 허지훈의 이름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정적이 길게 이어진다. 나는 한우주의 고운 얼굴이나 마저 구경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라 아쉬움은 없었다.
“돌아왔으니까.”
몇 걸음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췄다. 몸을 돌리자 한우주와 시선이 마주쳤다. 졸음에 잠긴 검은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나른해 보였다. 한우주가 천천히 입을 떼어 말한다.
“결국에는 나한테 돌아왔잖아.”
“…….”
“다른 건 됐어. 굳이 캐묻지는 않을 테니….”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가 느리게 떠오르길 반복한다. 길고 가지런한 속눈썹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한우주는 금방이라도 다시 잠들 것만 같았다. 그러나 꾸역꾸역 잠을 밀어내며 기어코 나와 눈을 맞춘다. 곧이어 나직한 목소리로 작게 읊조렸다.
“그러니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에 있어.”
“…….”
왜?
또 다른 의문들이 줄줄이 들이닥쳤다. 이러는 이유가 뭐야? 왜 이렇게 잘해 줘? 왜 하필 조현우야? 만약 내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했어? 한우주의 의도를 내 머리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다. 본인에게 직접 들어야만 알 것들이었다.
그러나 한우주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기에, 나 또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작은 결심 끝에는 깨달음이 따랐다. 묻지 않는 것은, 믿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묻지 않아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때가 되면 네가 먼저 말하겠지. 혹 영원히 알지 못한다 한들 어떤가. 중요한 건 네가 한우주라는 것이다. 한우주는 내 마음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믿음이 내 안에 있었다.
나는 조용히 이불을 챙겨 와 한우주의 맞은편 소파에 누웠다. 멀쩡한 침대 두고 이게 무슨 짓이냐, 푸념보다는 농담에 가까운 생각이 머릿속에 스친다. 이 상황이 그저 우스웠다.
한우주는 참 웃기고 이상한 놈이다. 나의 곤혹은 대부분 한우주가 게임 시나리오대로 행동하지 않아서, 연애를 하지 않아 생긴 것이다. 얄밉지 않을 수 없지. 그러나 이 망할 게임 세상에서 엔딩을 볼 때까지 내가 미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한우주 덕분일 것이다. 병 주고 약 주고 혼자 다 하는구나. 본인은 내게 병을 준다는 자각도 없겠지만….
‘하여튼 상냥한 녀석.’
한우주의 태도를 생각하면 ‘조현우가 한우주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마저 그럴듯하게 들렸다. 뭐…, 그래. 어쩌면 좋아했을 수도 있겠네. 이렇게나 잘해 주니까.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먹먹했다.
애써 머리를 비우고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고른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눈을 붙인다. 또 한 번의 고단한 하루가 저물어 갔다.
***
한우주는 아침에 약한 게 아니었다. 권장 수면 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충성스러운 몸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새벽 3시에 자서 아침 10시 넘어 일어나고…. 하여튼 오늘은 늦지 않게 잘만 일어나더라. 등굣길이 느긋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평소에도 좀 일찍 자. 뭐 한다고 매일 새벽까지 깨 있어?”
내가 나의 몸, 나의 세상에서 지낼 때 지긋지긋하게 들은 말을 내 입으로 누군가에게 하게 될 줄이야. 물론 나는 이유가 명확했다. 건전하게 게임하느라 늦게 잤지…. 한우주는 말을 고르듯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별거 안 하는데.”
도대체 뭘 생각한 건지 모를 답이다. 미간을 찌푸리자 한우주도 따라서 미간을 좁힌다.
“넌 왜 인상 써?”
“생각하느라.”
“무슨 생각?”
“내가 새벽에 뭐 하는지….”
“…그래서 생각났어?”
“음….”
이게 무슨 시답잖은 대화냐.
“책 읽거나 가만히 있어.”
“가만히…?”
“응. 불 끄고 침대에 누워서.”
“얼마나 그러고 있는데?”
“글쎄…. 안 재 봤는데. 한 시간? 두 시간?”
“…너 그거 불면증 아니야?”
“그런가?”
아니, 반응이 무슨 남의 얘기 하는 것처럼…. 나 혼자 심각해져선 한우주를 취조하기 시작했다.
“책 읽으면 잠 좀 와?”
“아니. 오히려 깨지.”
“…굳이 새벽에 읽는 이유라도 있어? 책 읽는 게 좋아서?”
“별로? 싫진 않지만 좋아하지도 않아. 집에 있는 건 진작 다 읽기도 했고. 할 일 없어서 읽는 거지.”
“…….”
한우주는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급하게 덧붙였다.
“그래도 해 뜨기 전에는 자.”
“야, 인마. 그걸 말이라고….”
어이가 없어 째려보자 저것이 슬쩍 시선을 피한다. 나는 학교를 향해 걷는 동안 진지하게 고민했다. 한우주 수면 클리닉 같은 데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니야? 있는 돈 이런 데 안 쓰고 뭐 하냐…? 한우주의 수면 패턴에 대해 고찰하다 보니 시간이 다 갔다. 어느새 교실 문 앞까지 다다른다. 앞장선 한우주가 교실 문을 열려다 말고는 내 쪽을 돌아봤다.
“그래도 어제는 꽤 일찍 잤잖아.”
…뜬금없다. 그래서 뭐? 칭찬이라도 해 주길 바라는 건가? 대답 없이 멀뚱히 있자 한우주가 다시 말했다.
“그냥 네가 옆에 있어 주면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응? 미친. 뭐?”
“너랑 같이 있으니까 잠 잘 오더라.”
“아니, 네가 무슨 애야? 혼자서는 잠도 못 자?”
한우주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문을 열어 교실에 들어섰다. 나는 그 뒤를 쫓으며 막, 계속 뭐라고 떠들었는데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민망해서 아무 말이나 뱉은 것 같다. 한우주는 내 말을 잘만 씹더니 겨우 한마디 대꾸했다.
“애 맞지. 아직 어른은 아니니까.”
태연히 말하고는 제 자리에 털썩 앉아 버린다. 나는 어이가 없어 한우주를 지그시 노려봤다. 딴청을 피우며 창문 밖을 구경하는 모습이 애 같기는 하다. 그러고 보면 은근히 어리광을 부리는 타입 같기도 하고…. 그게 싫은 건 아닌데 왜 하필 나를 대상으로 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캐릭터성이 조금 바뀐 것 같기도…? 한우주가 원래 이랬던가?
혼란 섞인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디선가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선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딸꾹질이 나올 뻔했다. 그러고 보니 허지훈… 우리 반이라고 했지…. 허지훈은 나를, 아니 한우주를, 아닌가? 어쨌든 이쪽을 집요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허지훈이 인상을 잔뜩 쓰고는 위협하듯 말한다.
“새끼야, 뭘 봐?”
“…….”
아침부터 기운 좋게 날뛰는 애들과 지난 시험 이야기로 바쁜 애들이 뒤섞여 소란스럽기 짝이 없던 교실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수십 개의 눈이 허지훈을 향했으나 허지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 어떻게 하지? 뭐라고 대답하지? 그냥 인사할까? 그럼 미친놈 취급하려나? 그래도 허지훈이니까 좀… 봐주지 않으려나. 입 안을 맴도는 인사를 미처 내뱉기도 전에 바로 곁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인데 좀 보는 것도 안 돼?”
한우주는 턱을 괴고 허지훈과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어쩐지 허지훈의 시선이 나와는 묘하게 빗나간 것 같더라니…, 한우주를 보고 있었나 보다.
“오랜만? 그래. 학교 존나 오랜만이지. 어떤 미친 새끼 덕분에.”
“아, 그거 안됐네.”
쿵, 허지훈의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아니 한우주 얘는 왜 쓸데없이 도발을 해서. 아악, 이쪽으로 오잖아! 저거 사람 하나 패 죽일 기세다. 내가 환장하겠다. 교실 뒤로 빠질까?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 앉을까? 분명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망할….
“…조현우, 비켜.”
내가 왜 허지훈을 막아선 걸까. 모르겠다. 울고 싶다. 팔 나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싸움을 말리려 들어? 그렇지만 허지훈은… 아무리 열받아도 조현우는 안 때리겠지 싶어서…. 나는 허지훈의 어깨를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자리에…. 일단 진정하고 자리에 돌아가자. 응?”
허지훈이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어떻게든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짧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앓는 소리를 내다가, 나와 시선을 맞춘다.
“알았으니까 조현우 넌 나 좀 보자.”
“…나? 왜, 왜?”
“왜겠냐?”
“모…르겠는데?”
“아오, 할 말 있으니까 따라오라고.”
할 말? 따로 불러서 욕이라도 한 바가지 쏟을 셈인가? 치, 침착하자. 욕은 먹어도 맞지는 않을 거야. 허지훈이잖아.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허지훈은 한우주를 한 번 쏘아보고는 몸을 돌렸다. 그 뒤를 따라가려던 때였다.
“현우야. 어디 가?”
아, 이 미친 한우주야. 내 노력과 정성에 기름 콸콸 붓고 230도 오븐에 한 시간 구워 버릴 녀석아. 가만히 좀 있으라고 고갯짓해도 말을 안 듣는다.
“네 자리 여기잖아. 이제 앉아야지. 허지훈 따라서 수업이라도 빠지려고?”
저거 허지훈 열받으라고 일부러 저러는 게 틀림없다. 평소보다 상냥한 어조로 제 앞자리를 가리키며 말한다. 아니나 다를까 겨우 진정시켜 놓은 허지훈이 다시 한우주에게 다가간다.
“야, 한우주. 역시 너부터 좀 봐야겠다. 잠깐 따라 나와.”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선호작품 등록/취소알림 등록/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