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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57화 (57/150)

57화

한우주가 옆에 있든 없든 허지훈은 내게 있어 대하기 껄끄러운 상대였다. 만날 때마다 사건이 터지니…. 한우주 앞에선 나름 당당하게 말하고 나왔지만, 솔직히 교실에 가기 겁이 났다. 그냥 가방 두고 튈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따랐다.

걱정과는 다르게 교실에는 허지훈이 없었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가방도 없이 빈 책상과 의자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마지막에 본 표정이 떠올라 마음이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잖아. 그래도 걘 어디 맞지는 않았으니 괜찮겠지. 허지훈에 대한 생각을 애써 몰아낸다.

정작 귀찮은 상대는 따로 있었다. 싸움 소식을 들은 담임이 한우주와 허지훈을 찾아다닌 것이다. 덕분에 나만 붙잡혀 둘의 행방을 추궁당했다. 허지훈은… 나도 모를 일이고, 한우주는 어디 있는지 모른 척했다. 괜히 아픈 애 병원 못 가게 붙잡을 것 같아서.

대충 잡아떼고 담임이 한눈판 사이 한우주와 내 가방을 챙겨 도망갔다. 보건실에 뛰어 들어가 한우주를 끌어낸다. 누가 볼까 싶어 움직임이 급했다. 한우주는 그런 내가 이상해 보였나 보다.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묻지 말고 빨리 움직여!”

“왜 그러냐니까?”

“학교 쨀 거야.”

“왜?”

“병원 가야 하니까!”

왜 이럴 때까지 집요하고 난리야. 가방을 메고 학교를 빠져나간다. 얼핏 뒤통수에 “조현우, 한우주!” 하고 소리를 지르는 담임의 목소리가 따라붙는 듯했다. 환청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나는 혹여 한우주를 놓칠세라 손을 잡고 뛰었다.

택시를 붙잡아 타고 나서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학교를 빠진 것은 처음이다. 스스로가, 그리고 이 상황이 낯설어 바짝 긴장이 들었다. 한우주의 손이 무슨 동아줄처럼 느껴지기라도 했나? 나는 손을 놓는 것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힘을 주어 꼭 붙잡은 채로 병원까지 가고 말았다.

***

「임ㄴ안성처

입안 상처

입안 꿰맴

임깹ㅁ

입 안쪽 찢어졌을 때

구강 내 외상

입안 외상」

손가락을 쉴 새 없이… 아니, 조금 더디게 움직였다. 아직 왼손을 움직이는 게 어색해 빠르게 치려 할수록 괴상한 오타가 났다. 어쨌든 폰으로 열심히 검색해 본 결과….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이제 보니 나의 응급 처치는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아니, 처치라고 할 것도 못 되었다. 출혈이 정확히 어디서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도 안 했고, 압박 지혈도 안 했다. 피 뱉으라고 휴지나 건네줬지…. 바보인가? 보건실까지 가 놓고선 뭘 한 거야? 거즈라도 입 안에 물고 있으라고 할걸.

나 왜 이렇게 무능하냐. 한우주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괴감은 깊어져만 갔다.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마음껏 불안에 떨다가, 다시 핸드폰이나 들여다봤다. 뭐라도 찾아 읽지 않으면 초조함에 두통이 올 것만 같았다.

가까스로 집중에 성공해 읽기 시작한 것은 어떤 박사의 블로그 포스팅이었다. ‘어긋남의 이유: 청소년기의 폭력성 발달과 자아 정체감.’

…어째 읽을수록 허지훈이 떠오르는데. 한창 몰입해서 읽던 중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한우주 왜 안 나와? 생각보다 더 심하게 다친 건가? 대수술이라도 하는 거야? 애써 치워 둔 불안이 다시금 나를 덮쳐 왔다. …안 되겠다, 어떻게 되고 있는지 물어봐야겠어.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때였다.

“어디 가려고?”

“엥?”

바로 옆에서 한우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한우주가 언제부턴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뭐냐?

“너 왜 여깄…어??”

“다 꿰매고 나왔는데.”

“언제?!”

“좀 됐어.”

“나는 왜 몰랐지? 안 부르고 뭐 했어?”

“집중하는 것 같아서 기다렸지.”

아… 그랬구나. 긴장이 확 풀려 다시 자리에 주저앉는다. 뭔가 할 말이 많았는데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 버렸다. 힘없이 고개를 돌리자 나를 멀뚱히 쳐다보는 한우주가 보였다. 왼쪽 뺨에 커다란 거즈를 붙인 걸 보니 속이 울컥했다. 자세를 고쳐 앉아 한우주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의사가 뭐래? 지금은 좀 어때? 아픈 곳 있어?”

“음…. 별로?”

뭐가 별로라는 거야. 몸 상태가 별로라는 거야, 별로 안 아프다는 거야? 내 속이 이렇게 물렀던가? 건성인 대답에 괜히 더 속상해졌다. 그게 겉으로 티가 났나 보다. 한우주는 잠시 인상을 쓰더니 길게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턱이랑 치아는 멀쩡하고, 뺨은 멍 좀 들고 말걸? 별게 아니라 연고 바른 거 닦일까 봐 거즈 붙여 놓은 거야. 입 안에 상처는… 크진 않은데 꽤 벌어져 있어서 꿰맸어. 진통제랑 항생제 처방받았고, 일주일 뒤에 다시 내원하라던데. 불편할 뿐이지 크게 아프진 않아.”

나는 한우주가 말을 마칠 때까지 숨도 쉬지 않고 경청했다. 그러니까… 약 잘 먹고 푹 쉬면 일주일이면 나을 상처라는 건데, 분명 내가 예상한 것보단 덜한 부상이고, 한우주 본인 입으로 아프지 않다고 하는데….

…왜 자꾸만 더 화가 나고 속상한 거지? 한우주는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장난스레 말했다.

“완전 죽상이네. 못생겨졌어.”

미간을 찌푸리며 노려보자 한우주가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괴로운 듯 표정이 구겨졌다. 어, 어떡해. 아픈가 봐. 한우주는 걱정의 말을 건넬 틈도 주지 않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여기 있을 거야? 병원 너무 자주 와서 질려. 나가자.”

“…아, 응. 그래야지.”

우리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내겐 꽤 파격적인 일탈이었다. 그러나 다른 것으로 머리가 복잡해 양심의 가책은 조금도 없었다.

돌아가는 길은 조용했다. 한우주는 말이 없었고, 나는 말을 걸지 않으려 노력했다. 한우주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말을 많이 하면 상처에 안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건네고 싶은 말을 속으로만 읊으며 걷기를 몇십 분,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아려 눈가가 시큰했다. 주책맞게 눈물이라도 흘릴까 봐 고개를 들었다. 한낮의 해가 찬란했다. 그래서 눈이 아픈 모양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

“한우주. 나 냉장고 좀 봐도 돼?”

한우주는 거실 소파에 앉아 엄청나게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그 주변… 정확히는 주방 근처를 서성이다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한우주가 읽던 책을 덮고 내 쪽을 돌아본다.

“그런 거 굳이 안 물어봐도 괜찮아.”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냉장고를 열어 살폈다. 음… 자세히 봐도 뭐가 없다. 하긴, 한우주는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거나, 시간 맞으면 건물 식당에 가서 먹거나…. 가끔 어디선가 끝내주게 맛있고 비싸 보이는 음식을 가져오곤 했다. 직접 요리를 하는 모습은 본 적 없다. 아무래도 장 좀 봐야겠는데…. 냉장고를 닫고 한우주를 향해 다시 외쳤다.

“한우주! 나 주방 써도 돼?”

“주방?”

보란 듯 양손을 들어 보인다. 처음 한우주의 집에 왔을 때, 팔이 다 낫기 전까지는 주방을 쓰지 말라고 했었다. 칼이나, 뜨거운 물이나… 위험한 게 꽤 있으니까. 괜히 한쪽 팔로 설치다가 일낼까 봐 그런 거겠지. 그렇지만 이젠 깁스도 풀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아닌가? 한우주가 미간을 좁히며 말한다.

“팔 아직 아프잖아.”

“아냐. 안 아파.”

“거짓말.”

“진짜야. 갑자기 크게 움직이는 것만 아니면….”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바로 허락하지는 않는구나. 예상했던 일이다. 미리 준비해 둔 어설픈 변명을 늘어놓는다.

“요리하고 싶어서.”

“굳이?”

“나 요리하는 거 좋아해. 취미가 요리였어. 어릴 적엔 요리사가 꿈이었다고.”

“…처음 듣는데.”

“말한 적 없으니까.”

“좀 더 기다리지? 재활 끝나면 해.”

“진짜 간단한 것만 할게. 조심해서 할게. 그래도 안 돼?”

“…….”

한우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선 한참 동안 나를 쳐다봤다. 나는… 조금이라도 열정을 어필하고자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한우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파에서 일어난다.

“알았어. 대신 재활 끝나기 전까지는 내가 볼 때만 해. 혼자서는 하지 마.”

…조금 부담스럽지만 어쩔 수 없지. 따라서 고개를 끄덕이자 한우주가 나를 향해 걸어와 곁에 우뚝 선다. 뭐지? 설마 지금 바로 요리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재료가 있어야 요리를 하지.

“당장 할 거 아니야. 장 먼저 보고 올 거니까 가서 앉아 있어.”

“혼자 다녀오려고?”

“넌 좀 쉬어. 다쳤잖아.”

“그냥 같이 가. 팔다리는 멀쩡하잖아.”

“아니, 쉬라니까?”

“너 깁스 풀자마자 무리했다가 재활 기간 늘릴래?”

“그….”

그건 싫은데….

“그, 그치만 네가 싫어하는 곳 갈 건데.”

“…어디?”

“마트.”

“…….”

“…거봐. 싫지? 미리 말해 두는데 마트 구석구석 꼼꼼히 보고 다닐 거야.”

한우주의 낯이 점점 어두워진다. 그 모습이 재밌기도 하고, 아까 한우주가 내게 한 말이 생각나서 히죽 웃으며 말했다.

“한우주 완전 죽상이네? 못생겨졌어.”

물론 한우주는 못생길 수가 없는 얼굴이지만. 복수 겸 농담이었는데 한우주의 얼굴이 아예 굳어 버렸다. 뭐야, 화났나? 자기도 같은 말로 놀려 댔으면서? 설마 못생겼다는 말을 들어 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 충격 먹은 건가? 지금이라도 사과해야 하나? 눈치를 살피며 고민하고 있던 때였다. 한우주가 비장한 표정을 하고선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옷 갈아입고 올게.”

돌아서 제 방으로 향하는 걸음마저 비장하다.

미친…. 쟤 뭐냐? 뭐가 저렇게 진지해?

한우주 개 웃겨.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나름의 의리를 발휘해 한우주의 자존심을 지켜 주려 애썼다. 웃음소리가 너무 클까 봐 소파에 고개를 처박기까지 했다.

마트가 그렇게 싫은가? 그러게 같이 갈 필요 없다니까. 저 이상한 고집 때문에 나의 계획은 단단히 어그러지고 말았지만, 기분은 하루 중 가장 유쾌했다.

‘뭐… 그렇게 틀어진 것도 아닌가? 한우주가 같이 가겠다는데 굳이 말리는 게 더 이상할지도.’

병원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 그리고 집에 온 뒤로도 쭉 고민한 것이 있다. 내가 나를, 나의 생각과 기분을 알 수가 없어서…. 아니, 무슨 기분인지는 알겠는데 원인을 찾을 수 없어 답답했다.

나는 한우주를 친구로 여기고 있으니 다친 것에 분노하고 연민하는 것은 당연하다. 의문은 그 정도와 지속성에 있었다.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받았고 본인 입으로 괜찮다고 한다. 그러면 나도 마음을 좀 놓는 게 맞지 않나?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마음은 점점 수렁 속을 파고들기만 했다. 가슴 한구석이 아린 생경한 감각이 가시지 않았다.

도대체 왜? 원인이 무엇일까? 나는 죽 그것을 고민했다. 그리고 몇십 분 전, 썩 만족스럽진 않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무언가를 떠올린 참이었다.

‘내가 하는 일이 없어서 그래. 이건 양심 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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