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그간 한우주에게 받은 것이 많아, 쌓이고 쌓인 부채감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터져 버린 것이다. 그러니 한우주를 위한 일을 하나씩 하다 보면 이 불편함도 언젠가는 사라지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한우주를 위해 무얼 할 것인가? …한우주는 크게 바라는 것도, 부족한 것도 없어 보여서 이게 또 난제였다. 고민 끝에 겨우 찾아낸 것 하나가 요리였다. 솔직히 이것도 한우주에게 필요 없을 것 같긴 하다. 돈 많으니까 그냥 사 먹으면 될 거 아니야….
‘…괜한 생각 말자. 어차피 내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일인데.’
그냥 내가 한우주한테 요리를 해 주고 싶어서 하는 거라 생각하는 게 낫겠다. 실제로 나는 요리를 꽤 즐기는 편이었고, 집에서 식사 준비는 거의 다 내가 했다. 엄마도 누나도 직장 생활 때문에 바빴으니까. 내가 하지 뭐, 하고 어느 순간부터 시작한 것이 생각보다 손에 맞았다. 레시피와 재료만 있으면 웬만한 요리는 해낼 자신 있다. 맛도… 평타 이상은 칠 거다.
온갖 고급스러운 음식을 맛보며 살았을 한우주를 만족시킬 자신은 없지만…. 맛없다고 하면 순순히 손 떼고 다른 거 찾아보면 되겠지….
얼추 생각 정리를 마치고, 폰으로 레시피를 이것저것 검색해 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든다.
‘미친.’
나는 넋을 놓고 한우주를 볼 수밖에 없었다. 반듯한 흰 셔츠에 군청색 정장 재킷과 바지를 빼입고는, 머리까지 넘겨 세팅해 놓았다. 아니, 그런데… 잘생기긴 했는데….
“너 무슨… 데이트 가냐?”
“…아니.”
“우리 마트 가는 거 알지?”
“어.”
“그런데 왜….”
왜 저렇게 입은 거지?
아, 잠깐. 설마.
“너 내가 아까… 못생겼다고 놀려서 그래?”
“…….”
“…진짜야?”
어떡해. 진짠가 봐. 야, 내가 네 자존심 지키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노력이 전부 수포가 되었다. 나는 배꼽이 빠져라 웃다 못해 흐느끼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우주는 그런 날 가만히 노려보기만 했다.
“아니…, 흑… 아. 으흑, 너무… 한우주 미친, 개 웃겨. 으…흐흑.”
“…갈아입고 온다.”
아, 너무 웃었나? 그치만 웃긴 걸 어떡해. 차갑게 돌아서는 한우주의 옷자락을 붙잡으려다가, 옷이 비싸 보여서 실패했다. 급한 대로 손끝을 잡았다. 그냥 뿌리치고 갈 수 있을 텐데도 한우주는 순순히 내게 잡혀 주었다. 그리고… 달래 주려고 했는데 또 웃어 버렸다. 아, 힘 빠져. 툭, 고개를 떨구어 한우주의 등에 기댄다. 얘 때문에 힘 빠졌으니 등 정도는 빌려도 되겠지.
“한우주 너…, 흡.”
“언제까지 웃을 거야? 이거 좀 놓지?”
아, 제발. 그만 웃어 안태원. 한우주 삐졌잖아. 웃음을 꾸역꾸역 집어넣고 평소의 어조로 말하려 했다. 누가 들어도 웃음기 섞인 말투였지만… 이게 내 최선이니 이해해 주길 바란다.
“갈아입지 마. 아깝잖아.”
“뭐가.”
“너 지금 잘생겼어. 예뻐.”
“…못생겼다며?”
“그 말을 믿었어? 장난이었는데. 이렇게까지 신경 쓸 줄 몰랐지….”
“…….”
“아니, 근데 좀 억울하다? 나는 한우주 네가 한 말 똑같이 돌려줬을 뿐인데.”
한우주는 말없이 뒤돌아 나를 봤다.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치자 커다란 거즈를 붙인 뺨이 눈에 들어와 웃음기가 가셨다. 또다. 또 가슴이 갑갑하다. 그때 갑자기 한우주가 내 앞머리를 잡아 뒤로 훌렁 넘겨 버렸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눈으로 항변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의 얼굴을 멋대로 구경하더니, 다시 뒤돌아 현관으로 척척 걸어가 버린다.
…뭐야?
엉망으로 젖혀진 앞머리를 대충 털어 정리한다. 방금 그게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어 가만히 선 채로 고개만 까딱인다. 현관 쪽에서 한우주가 크게 말했다.
“빨리 안 오고 뭐 해?”
“…지금 가!”
먼저 영문 모를 짓을 한 게 누군데? 속으로만 구시렁거렸다. 아무래도 한우주를 외모로 놀려선 안 되는 모양이다. 참나, 그러면 본인이 먼저 잘해야지. 마음껏 먼저 놀려 놓고는 어이가 없어서…. 하여튼 가진 놈들이 더하다더니.
나무라는 속마음과 어울리지 않게 심장이 요란히도 뛰었다. 이건…, 그거다. 역시 사람은 건강하고 봐야 한다. 기가 허하니까 자꾸만 몸이 이상하게 반응하잖아. 나는 조현우의 허약한 몸을 실컷 탓하며 한우주를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
점심, 저녁, 퇴근 시간대도 아닌 애매한 평일 한낮. 다행히 지난번처럼 사람이 많지 않아 한우주가 탈출을 시도하는 일은 없었다. 오늘은 되레 내가 어색해 삐걱댔다. 한우주가 쇼핑 카트를 미는 모습이 미치도록 낯설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내게 꾸중하는 것만 같다.
야, 너는 평소에 마트 한 번 안 오는 애를 데려다가 카트까지 밀게 시켜? 쟨 너 아니었으면 집에서 푹 쉬다가 비싸고 좋은 음식 알아서 사 먹었을 거라고.
“하, 한우주. 역시 그냥 내가 밀래.”
“왜?”
“…그냥.”
“됐어. 장이나 봐.”
“내가 하고 싶어서, 카트 미는 거 좋아해서 그래. 재밌잖아.”
“나도 좋아하는데.”
“너 오늘 처음 밀어 보는 거 아니야?”
“어. 처음이라 그런가 새롭고 재밌어.”
“재밌는 거 나한테 좀 양보해 봐.”
“싫어.”
딱 잘라 거절하더니 카트를 끌고 저 앞으로 앞장서 가 버린다.
“한우주! 너 어디 가!”
쟤는 우리가 뭘 살 건지도 모르면서 어딜 멋대로 가는 거냐? 한우주가 막무가내로 굴 때 고집 꺾고 이겨 먹을 생각은 접는 게 낫겠다. 그 사실을 오늘 뼈저리게 깨달았다. 엉뚱한 곳을 빙빙 돌며 당최 목적을 알 수 없는 마트 추격전을 벌였다. 한우주 쟤는 걷는 것 같은데 왜 저렇게 빠른 거야? 다리 존나 길어 진짜.
“야… 이 자식아, 좀… 멈추라고….”
결국에는 이 망할 몸의 체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괴롭다. 안 되겠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숨을 고른다. 저 멀리 있던 한우주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중간중간 주춤거리는 것이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한우주가 얄밉고 짜증 나는데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힘들어서 미쳤나 보다.
“…너 괜찮아?”
“하… 괜찮아 보이냐?”
바로 곁에 선 한우주가 연신 나를 살펴 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달뜬 숨을 가라앉히느라 바빴다. 현타 온다. 어린애도 아니고 방금 한우주랑 내가 뭘 한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게 다 유치한 한우주 때문이다. 억지 부린 것도 한우주고 먼저 도망간 것도 한우주니까…. 속으로 실컷 욕을 해 대는데 뜬금없이 쑤욱, 몸이 들렸다.
‘???’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상황 파악이 더뎠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다. 왜? 한우주한테 들렸으니까. 이 망할 것이 나의 양팔 사이에 손을 넣어 안아 올렸다. 미취학 아동을 벗어난 이후로 누구에게도 이런 식으로 안긴 적이 없다. 그러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진짜 뭐냐? 곧 성인인 남성이 이렇게 거뜬히 들릴 수 있는 거냐? 내 몸은 아니지만, 자존심이 상한다. 아니, 다 됐고. 한우주 이 새끼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건데???
“야. 이거 안 놔? 너 왜 이래?!”
“정 힘들면 저기 타라고.”
“저기?”
“카트.”
…와, 이게 장난하나. 진심이면 더 짜증 난다. 내가 넙죽 좋다고 할 리 없잖아. 날 뭐로 보는 거야?
“당장 이거 놔라.”
“힘들다며?”
“놓으라고 말했다.”
“…….”
나의 발과 바닥이 드디어 재회했다. 한우주 저건 내 눈치를 보는 것이 아무래도 진심으로 날 카트에 태우려 한 모양이다. 돌아 버리겠네. 다음부턴 그냥 떼어 놓고 와야지, 안 되겠다. 장 보기도 전에 기운 다 빠졌잖아. 나는 옆에서 주뼛대는 한우주를 무시하고 카트를 끌어 식품 코너로 향했다. 한우주가 바로 옆에 따라붙어 말을 건다.
“조현우.”
“…….”
“화났어?”
“…….”
“화 많이 났어?”
“…너 때문에 자존심이 아예 조각나서 먼지가 돼 버린 참이니까 말 걸지 마.”
“…….”
한우주는 조용히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무표정한 얼굴이 시무룩해 보이는 건 나의 기분 탓일까? 신경 쓰이게…. 하여튼 한우주 때문에 하루에 기분이 몇 번을 오락가락하는지 모르겠다. 아까는 분명 자존심 상하고 화가 났는데 지금은 또 안쓰럽다. 장난 좀 칠 수 있지, 괜히 화냈나 싶고….
‘그러고 보니 뭐 먹고 싶은지 아직 안 물어봤네.’
한우주 밥해 주려고 장 보러 온 거면서 성질을 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오늘 다쳐서 아프기까지 한 애를 데리고 뭘 한 거냐? 안태원 이 멍청한 자식. 이마라도 치고 싶다. 더 늦기 전에 예민하게 굴어서 미안하다고 해야겠다.
“야, 한…우주?”
바짝 뒤쫓아 오던 한우주가 안 보인다. 얘 어디 갔어? 마트에서 길이라도 잃은 거야? 다급히 왔던 길을 되돌아가 본다. 정말 다행히도, 금방 한우주를 찾을 수 있었다.
한우주는 떡갈비 시식 코너 앞에 멀뚱히 서 있었다. 떡갈비 먹고 싶나…? 그런 것치고는 꽤 곤란한 표정이다. 나는 곧 어렵지 않게 상황을 읽을 수 있었다.
“따뜻할 때 한 입 들어 봐요. 맛있다니까?”
“…음.”
“한우주! 찾아다녔잖아.”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자 한우주의 표정이 단번에 밝아진다. 영업을 뿌리치지 못해 붙잡혀 있던 모양새다. 평소에는 잘만 단호하게 굴면서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지…. 우리 어머니 연령대 정도 되어 보이는 직원분께서 잘게 썰린 떡갈비를 이쑤시개에 꽂아 한우주에게 권하다가, 내 쪽을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응? 형제끼리 온 거야? 동생도 인물이 훤하네!”
“제가 형이에요.”
반사적으로 대답해 버렸다. 아까 상한 자존심이 멋대로 입을 움직인 것이다. 한우주의 눈이 가늘어지는 걸 애써 무시한다.
“아! 형이구나. 동생 쪽이 워낙 키가 커서 착각했네. 자, 여기. 형도 하나 가져가서 먹어 봐요.”
“감사합니다.”
나는 떡갈비를 흔쾌히 받아 들고 다른 손 검지로 내 뺨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저, 동생이 안쪽도 좀 다쳐서요. 지금 뜨거운 걸 잘 못 먹어요.”
“아이고, 어쩌다가 그랬어…. 부모님 속상하시겠네.”
“아하하…, 그러게요. 얘가 조심성이 좀 없어요.”
떡갈비를 먹으며 간단한 대화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그대로 자연스레 떠나려는데 한우주가 자리에서 움직이질 않는다. 손을 잡아당기자 그제야 날 보고 말한다.
“형. 한 팩 사 갈까?”
“…응? 어? 으응? 뭐, 뭐라고??”
방금 한우주가 뭐라고 한 거냐? 내가 잘못 들었나? 미쳐서 환청을 듣나?
“한 팩 사 가자고 말했어.”
적어도 한 문장은 제대로 들었구나, 생각하기 무섭게 한우주의 목소리가 다시금 귀에 꽂혀 온다.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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