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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59화 (59/150)

59화

…나도 모르게 떡갈비를 두 팩이나 담아 버렸다. 형제가 사이가 좋네, 우리 자식들도 이러면 얼마나 좋아, 직원분의 말씀에 뭐라 대꾸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우주가 카트를 밀고 있었고 난 넋을 놓고 그 옆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또 곁이 허전해 퍼뜩 뒤를 돌아봤다.

허… 한우주 쟤 또 뭐 하는 거야?

“죄송해요. 저희가 시간이 없어서요. 한우주. 너 자꾸 말없이 사라질래?!”

이번엔 식초 음료 영업에 붙잡혀 있는 걸 겨우 데리고 나왔다. 얘는 냉동 떡갈비나 식초 음료가 진짜로 먹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아니면 영업에 약한 거야? 전자라면 마음껏 사라고 하겠는데… 마트 초밥에 불평하던 녀석이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나는 한우주를 똑바로 보고 당부했다.

“한우주. 너 이런 식이면 마트에 있는 음식 한 종류씩 다 사야 해. 먹고 싶은 거 아니면 적당히 지나쳐도 된다고.”

“음… 알았어.”

“그래서 뭐야. 떡갈비는 먹고 싶어서 산 거야?”

“아니.”

“…왜 그렇게 쩔쩔맨 건데?”

“그러게.”

대답이 영 시원찮다. 작게 한숨을 내쉬자 한우주가 내 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말했다.

“미안.”

“…응? 아니, 무슨. 사과할 것까지야.”

“피곤해 보여서.”

솔직히 살짝, 아니 체력적으로 꽤 지치긴 했지만, 사과까지 받으니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어색하게 할 말을 찾다가 겨우 한마디를 툭 뱉는다.

“됐으니까 한우주 너는… 내 옆에 잘 붙어 있기나 해.”

한우주는 고개를 끄덕이곤 내 옆에 얌전히 잘도 붙어 있었다. 기본적인 양념과 향신료를 둘러보고 하나씩 담고 있는데, 한우주가 카트 손잡이에 팔을 비스듬히 기댄 채로 말을 걸었다.

“그런데 있잖아.”

“응?”

“너 형이라고 불리는 거 좋아해?”

“…아?”

“아까 형이라고 불렀을 때 좋….”

“아니? 아, 안 좋아하는데?”

나는 한우주의 말을 끊고 카트에 양념을 던지듯이 담아 버렸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숙인 모양새가 우스워 보인 것인지, 한우주가 소리 내어 웃었다.

“아까는… 그… 아까는 그냥 아까의 일이었을 뿐이거든? 상황이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고.”

“…알았어.”

나도 내가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 누가 들어도 모를 것 같은데 한우주는 뭘 어떻게 알아듣고 알겠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오, 쪽팔려. 화제나 돌리자. 제발.

“하, 한우주 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글쎄?”

“대충 답하지 말고 좀 생각해 봐.”

“형이 해 주는 건 아무거나 좋은데.”

경악하며 고개를 든다. 한우주가 평소 같은 얼굴로 가만히 나를 보다가, 장난스레 미소 지었다. 한우주 저것이 또 나를 놀리고 있구나. 한 소리 해야겠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목소리가 안 나온다. 얼굴에 열만 잔뜩 오르고 말았다. 망할, 망할. 짜증 나. 안태원 너 입에 꿀이라도 들이부었어? 왜 아무 말도 못 해?

한우주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한우주 참 밉다. 그런 말을 속으로 백 번은 읊는 중이었다. 한우주가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린다. 웃으면 상처에 자극이 가는 모양이었다. 깜짝 놀라 가까이 다가가 팔을 잡아끌었다. 한우주가 몸을 살짝 숙이자, 얼굴이 가까워진다. 혹 상처가 터질까 싶어 걱정되었다. 주인 말 더럽게 안 듣고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이 드디어 움직였다.

“괜찮아? 야, 그러게 누가 계속 장난치래!”

“뭘… 아무렇지도 않은데.”

“조심 좀 하라고.”

“괜찮다니까. 형은 걱정이 너무 많아.”

“…….”

이, 미친.

남 놀릴 정신 있는 거 보면 멀쩡한가 보네. 그래, 몇 번이고 휘둘리는 내가 문제다. 체념 섞인 자조 겸 신세 한탄이었는데…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다. 형이라는 말이 뭐가 어때서 자꾸만 당황하는 거냐? 친구끼리 장난으로 형님, 형 거리는 게 드문 일도 아니잖아. 게다가 따지고 들면 내 쪽이 형 맞다. 한우주보다 한 살 많지. 그러면 도대체 뭐가 문제냐. 왜 이렇게 민망한 건데?

음…, 글쎄다…. 평소에 ‘조현우’라고 불릴 때는 심리적 방어막을 한 겹 두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한우주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 조현우를 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라도 명심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작스레 형이라고 불리니까… 뭐랄까…, 조현우가 아니라 정말로 나를 부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고…. 허…?

‘…안태원 미친놈. 진짜 미친 새끼.’

지랄 났구나. 나를 부르는 것 같아서, 그래서 뭐? 다 까고 한우주랑 진짜 형 동생, 친구라도 되고 싶은 거냐? 정신 차려. 네가 무슨 처지인지 좀 생각하란 말이야. 아, 머리 아파. 이거 한우주는 문제도 아니었네. 안태원 언제 이렇게 해이해졌냐?

“나 먹고 싶은 거 생각났어.”

툭툭, 오른편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겨우 정신을 차린다. 조금 전 떠올린 생각으로 괜히 혼자 어색해져 시선을 돌렸다.

“…뭔데?”

한우주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토마토.”

“뭐?”

나는 미간을 팍 좁히고 한우주를 쳐다봤다.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야, 내 얼굴을 한참 보다가 ‘토마토.’ 딱 한마디 하잖아. 안 그래도 머리에 열이 올라 슬슬 어지럽던 참이었다. 나더러 토마토라고 놀리는 건지 토마토가 먹고 싶다는 건지…. 만약 놀리는 것이라면 팔뚝이라도 한 대 때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우주는 눈만 끔뻑거릴 뿐 표정에서 나를 놀리려는 의도는 읽히지 않았다. 내 성정이 원래 이렇게 꼬였었나 반성하게 될 정도였다. 뻘쭘해 목을 가다듬으며 묻는다.

“토마토로 만든 요리면 되는 거야?”

“응.”

“토마토… 예를 들면 어떤 거?”

“글쎄, 아무거나 괜찮은데.”

“아무거나? 그거 요리하는 입장에서 제일 곤란한 대답이거든….”

“음… 그러면….”

…….

그러면? 그 뒤로 말이 없다. 정말로 떠오르는 게 없나 보다. 결국에는 내 쪽에서 최소한의 선택지를 제시했다. 한식, 양식, 중식, 일식, 기타…. 한우주는 고민 끝에 양식을 택했다. 메뉴가 정해지자 나머지 장 보는 것은 금방이었다. 한우주는 그 뒤로 장난 한번 안 치고 내 곁을 열심히 쫓아다니다가, 판촉에 몇 번 더 붙잡혔다.

처음에는 그저 마트에 익숙지 않아 저러나 보다, 의외로 이런 데서 거절을 못 하네, 싶었는데 가만 보니 조금 이상했다. 관찰하다 보니 어떤 특징이 보였다. 남성 직원분의 판촉은 잘만 무시했고, 젊은 직원분들의 권유도 참 능숙히 거절했다. 유독 중년 여성 직원분들의 영업에 삐걱대며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내가 너무 과하게 생각하는 건가?’

나는 그 모습에 한우주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이유는… 나 역시 우리 엄마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누나랑 같이 잘 지내고 있을까, 현실의 나는 어떻게 된 걸까, 혹시라도 혼수상태라거나… 하면 병원비는 어떻게 하나. 한번 떠올리기 시작하면 답이 없어 어딘가에 구겨 두었을 뿐이다.

고작 한 달을 못 본 내가 이런데 한우주는 오죽할까? 그러다 멋대로 짐작하고 혼자서 동정을 품거나, 공감하는 것도 참 꼴사납고 무례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고, 마트고, 뭐고 전부 다 우연이고, 나 혼자 상상을 부풀리는 걸 수도 있다.

함부로 깊어지지 말자. 그거 되게 나쁜 습관이거든. 요즘 들어 나의 머릿속이 이렇게 한 번씩 날뛰어서, 스스로를 어르고 진정시켜야만 했다. 사춘기가 한 번 더 온 건지…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 자주 답답한 요즘이다.

***

탕. 탕. 탕.

불길한 소리가 주방을 가득 메웠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만 같다. 맹세코 한우주의 손을 빌릴 생각은 없었다. 한우주가 고집을 부리기에 아, 요리 좀 하나 보다. 믿고 칼을 넘겨준 것인데 이대론 안 되겠다.

“한우주. 그냥 내가 할게.”

“왜?”

“너 그러다가 손가락까지 잘라먹을 것 같아….”

“…….”

한우주 얘 정말… 요리해 본 적 없나 보다. 채소들이 생전 처음 보는 모양으로 처참하게 썰려 있는 걸 보니 정신이 아득했다. 게다가 채소를 참… 크게 썰어서 채소와 함께 나의 의도도 무참히 썰리는 중이었다.

지금 하는 요리의 과정은 채소 손질이 약 80%를 차지한다고 봐야 했다. 한우주가 입 안을 다친 걸 생각해 먹기 불편하지 않도록 아주 작게 썰 계획이었는데…. 저건 도대체 뭐냐… 당근이 운석처럼 잘렸잖아.

“칼 이리 줘 봐. 얼른.”

“팔 불편하지 않겠어?”

“왼손에 큰 힘 들일 일은 없으니까 괜찮아. 정 안 되면 그냥 채칼에 갈아 버리지 뭐.”

한우주도 자기 실력에 당황한 모양이다. 칼을 내게 넘기고는 불안한 눈길로 나를 훑는다. 앞으로 한우주한테는 절대 요리시키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재료를 하나하나 손질해 나갔다. 팔을 크게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왼손으로는 채소를 받칠 뿐이라 요리하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모든 채소를 잘게 썰고, 닭고기는 살만 발라 얇게 찢었다. 토마토는 칼집을 내어 끓는 물에 살짝 데쳐 껍질을 제거한다. 닭고기와 양파를 볶으며 간하고, 다른 채소와 토마토를 넣고… 토마토소스도 한 스푼 넣은 뒤에 푹 끓이면 얼추 끝난다.

한우주가 영 심심한 눈치라 삶은 감자의 껍질을 벗기고 으깨게 시켰다. 으깬 감자에 버터와 우유를 넣고 소금으로 살짝 간을 하면 간단 매시트포테이토가 된다.

그러니 오늘의 밥은… 크게 씹을 것 없이 후루룩 넘길 수 있는 닭고기 토마토 스튜와 부드러운 매시트포테이토 되시겠다. 한우주 집에 있는 고급 식기에 담은 뒤 파슬리까지 솔솔 뿌리고 보니 제법 그럴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안 그래도 입을 다친 애가 뜨거운 음식에 데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스튜를 적당히 먹기 편하게 따뜻할 정도로 식힌다. 그동안 오늘 산 떡갈비를 구워 한 입 크기로 작게 썬 뒤에 반찬으로 내놓았다.

‘크게 호불호 타지 않을 메뉴로 고르긴 했는데….’

한우주의 입맛에 맞을지는 모를 일이다.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나는 온 신경을 한우주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우주가 말을 걸었을 땐 놀라서 무릎으로 식탁을 찍어 올릴 뻔했다.

“조현우 진짜… 요리 잘하네.”

“그럼 가짜인 줄 알았어? 아니, 아직 한 입도 안 먹어 놓고선 잘하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아?”

“냄새가 좋잖아.”

“…얼른 맛이나 봐.”

한우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곤 이번에야말로 스튜를 입에 넣었다. 긴장돼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한 입, 두 입, 세 입… 몇 번을 떠먹고도 맛있다, 맛없다, 뭐가 어떻다는 감상은 없었다. 그저 식사에 집중할 뿐이었다.

…자꾸만 웃음이 비죽 튀어나왔다. 혹 웃는 것을 들킬까 싶어 소리를 죽이고 턱을 괴는 척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웃고 싶지 않은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된다. 평소 한우주의 식사를 지켜본 입장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의 주책을 어떻게든 변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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