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한우주는 먹는 속도가 느리고 입이 짧았다. 식사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영양 섭취라고 부르는 게 맞겠다 생각할 만큼 당최 뭘 맛있게 먹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오물오물 부지런히 잘도 먹는다. 함께 지내면서 저렇게 잘 먹는 모습은 처음 본다. 흡족하기도 하고, 내가 만든 걸 열심히 먹는 모습을 보니… 뭐라고 해야 할까… 엄청… 아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좀 귀여운가?’
한우주만큼 먹이는 보람이 큰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잘 먹는 것만으로 예쁜데 그냥… 원래 생긴 것도 예쁘다. 이거 엄청난 밸런스 붕괴 아니냐고.
한우주의 스푼이 공중에서 멈춘다. 단정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가 나의 스튜로, 그리고 또다시 내게로 돌아와 안착한다. 나는 당황해 시선을 피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내가 줄곧 한우주를 지켜보느라 스튜에는 입도 안 댔다는, 다소 괴상한 사실을 감출 생각도 못 했다는 말이다.
“…안 먹고 뭐 해?”
“어?! 시, 식히는 중이야.”
“그러다 너무 식겠는데?”
“안 그래도 슬슬 먹으려고 했어.”
나는 얼른 대꾸하고 고개를 떨군 채로 식사에 집중했다. …아니, 사실 집중하지 못했다. 음식 맛이 하나도 기억나질 않는다. 기계적으로 음식을 입 안에 넣고 또 넣다가, 매시트포테이토 사이에 숨어 있는 감자 껍질을 발견하고 정신을 차렸다. 잘 살펴보니 하나뿐이 아니라 꽤 여럿 있었다. 어떤 건 크기까지 꽤 컸다. 미간을 살포시 찌푸리자 맞은편에서 한우주가 말했다.
“껍질에 영양소가 많대.”
“…뭐?”
그래서 일부러 넣었다는 거야? 어이가 없어 쳐다보자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뻔뻔한 말을 해 놓고는 눈치를 보는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무어라 꿍얼대는 한우주를 두고 매시트포테이토나 마저 먹었다. 껍질이 씹힐 때마다 쌉싸름한 맛이 혀에 맴돌았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 사이로 툭 튀는 아린 맛의 존재감이 꽤 컸다. 분명 조화롭지 않은데도 맛이 나쁘지 않았다. 사실, 꽤 괜찮았다.
토마토 스튜 맛은 영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오늘 먹은 껍질 섞인 매시트포테이토의 맛은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어쩌면 나는… 감자 껍질 맛을 꽤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또 웃고 말았다.
***
“…조현우 뭐 해?”
“어? 아니 그냥. 뭐 도울 거 없나 싶어서.”
“없어.”
한우주가 젖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이렇게 불편할 줄이야. 설거지하는 한우주의 곁을 벌써 몇 분째 서성이고 있다. 한우주는 나를 슬쩍 흘겨보더니 성가신 티를 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네 방에 가서 좀 쉬든가.”
“쉴 기분이 아니야.”
“기분 좀 잘 조절해 봐.”
“그게 되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어?”
“…신경 쓰인다고.”
대놓고 한숨을 쉬는 모습에 기분이 조금 상했다. 나는 바삐 움직이는 한우주의 손을 구경하며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마구 중얼거렸다.
“지도 나랑 다를 거 없으면서.”
“뭘.”
“그래도 나는 너 심심할까 봐 감자 정도는 기꺼이 양보했는데….”
“…….”
“그런데 껍질이 막, 이렇게 덕지덕지….”
“…야.”
“응? 불렀어?”
시침 뚝 떼며 대답하자 한우주가 미간을 구겼다. 지그시 노려보는 시선을 당당히 받아쳤다. 한우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내게 마른행주를 하나 건네며 말했다.
“그럼 식기 물기나 좀 닦아 줘.”
“그래!”
달그락, 달그락. 물속에 잠긴 식기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 싱크대의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소리와 뽀득뽀득 접시를 닦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나는 열심히 행주질하다가 문득 한우주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황당해 헛웃음이 나왔다.
“한우주 너….”
“왜?”
“설거지하는 거야, 샤워하는 거야?”
티셔츠의 아랫부분이 아예 푹 젖어 있었다. 쥐어짜면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설거지하다가 옷 젖는 일이 다반사라고는 해도 저 정도로 심각한 건 처음 본다. 저러다 아주 바지까지 젖겠네. 한우주는 자기 옷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설거지나 계속하며 말했다.
“설거지 겸…, 샤워 겸…, 빨래 겸… 하는 거지.”
“뭔, 지금 그걸 말이라고….”
“왜. 나는 시원하고 좋은데?”
하여간에 이상한 데서 유치하게 억지 부리는 건 알아줘야 한다.
“너는 샤워랑 빨래를 옷 입은 채로 하냐?”
“이상해?”
“이상하지.”
“그러면 벗을까?”
…내가 방금 잘못 들었나?
버… 벗, 벗어? 뭐를?
뚝. 물소리가 멈춘다. 한우주가 수도꼭지를 잠갔다. 안 좋은 예감이 든다.
“와아악!”
한우주 저것이 티셔츠 끝자락을 잡아 올렸다. 다른 곳보다 유독 하얀 피부가 드러나 보이자 나는 경악했다. 행주를 집어 던지고 한우주의 티셔츠를 필사적으로 잡아 내렸다. 그러다 망할, 손끝에 한우주의 맨살이 닿아 급히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이게 다 무슨 난리야? 아니, 난리가 난 건 나뿐이다. 한우주는 평온한 얼굴로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너… 너 인마, 한우주.”
“응.”
“나 놀리는 게 그렇게 재밌어?!”
“내가 널 놀렸어?”
“그래!”
“언제?”
“…….”
한우주는 얼굴을 더럽게 잘 써먹는다. 그렇게 눈 휘둥그레 뜨고 예쁜 얼굴로 사람 쳐다보면 누가 아무 말 못 할 줄 알아?
“…….”
썅. 그래, 아무 말도 못 하는 사람 여기 있네. 이런 내가 싫다. 수치스럽다. 어디 숨을 곳 없나?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갑자기 얼굴에 차가운 물방울이 달라붙었다. 한우주가 내 쪽으로 물을 튕긴 것이다. 그리고 딱 두 마디를 건넸다.
“토마토.”
잠깐, 토마토?
“찬물로 세수라도 하고 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토마토. …토마토?
…야, 이 한우주 나쁜 자식. 아까 마트에서도 나 놀린 거 맞잖아! 열받아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도 어떻게든 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한우주가 던진 말에 노력이고 뭐고, 아주 와르르 무너져 내렸지만.
“어, 익었다.”
팰 거다. 아주 그냥 등짝에 새빨갛게 손자국이 남도록 때릴 거다. 오늘은… 다친 거 생각해서 넘어갈 거지만 다음에는 진짜 가만 안 둘 거라고.
“나머진 네가 다 해! 설거지하면서 샤워랑 빨래랑 아주, 네 마음대로 다 해 봐!”
분에 차서 소리를 왁왁 지르며 몸을 돌렸다. 그대로 주방을 빠져나가려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머지않아 내가 한 말이 얼마나 구질구질하고 멋없었는지 깨닫고 후회하고 말았지만….
“한우주 너, 너는 앞으로 토마토 섭취 금지야!!”
진심인가? 나는 이걸 협박이라고 한 걸까?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아무튼, 중요한 건 한우주가 내 말을 듣고 웃었다는 것이다. 협박은 개뿔…. 세상 창피해서 그대로 주방을 빠져나가 방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 뒤로 몇 번인가 한우주가 찾아와 방문을 두드렸지만, 나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남은 시간에는 머리를 비울 겸 고물… 그러니까, 조현우의 노트북을 붙잡고 있었다. 이 망할 것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나사 하나 푸는 게 쉽지 않았다. 낡아 빠진 고무 패킹을 떼어 내고, 끙끙대며 한참 동안 나사를 풀어냈다. 부품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하판을 뜯어낸다.
그리고 구석에 자리한 하드 디스크를 분해해 꺼냈다. 겉보기로는 멀쩡해 보이는데…. 멀쩡한 컴퓨터에 연결해서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모를 일이다. 마음 같아선 당장 확인하고 싶지만 한우주 집에는 마땅한 장비가 없다. 아쉬운 대로 하드는 잘 챙겨 두고, 고물 노트북은 원래 있던 노트북 가방에 넣어 구석에 박아 놨다.
그러고 나니 벌써 저녁 시간이 다 되었더라. 평소보다 일찍 피곤한 게 몸이 나른하다. 침대에 몸을 뉘고 폰을 확인한다. 담임에게서 연락이 올 것은 당연히 예상했다. 그럴 줄 알고 종일 폰을 무음으로 해 둔 것이다. 담임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와 문자를 뒤로하고 다른 연락이나 살펴봤다. 오재영과 강준희의 걱정과 욕이 섞인 메시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오재영: 조현우어디감???」
「오재영: 3반ㅈㄹ난거 무ㅓ임?ㄷ」
「오재영: ㅅㅂ허지훈이랑 ㅎㅇㅈ 싸웠냐???」
「강준희: 조현우 보면 답장좀 해라」
「오재영: 한우주이빨세개나갓다는거 진짜임??」
「강준희: 오재 넌 이상한 말좀 막 주워듣지마;」
「오재영: ㅡㅡ; 아니 싸운 건 허지훈이랑 한우주인데 조현우는 어디 간 거냐고」
「강준희: 내말이.」
「강준희: 연락좀 받아 새끼야」
대충 이런 식의 대화가 여럿 반복되었다. 무서워서 도망간 거다, 아니다. 허지훈이 빡쳐서 끌고 간 거다, 실종 신고할 거다… 갈수록 기상천외해지는 내용에 다급히 자판을 두들겨 답장했다.
「조현우: 아니; 나 멀쩡ㅎㅐ」
거의 동시에 메시지가 또 왔다.
「오재영: ㅁㅊ럼」
「오재영: 답장 존나 빨리하네」
「조현우: ㅠ미안」
「강준희: 허지훈이랑 같이 있어?」
「조현우: 아냐. 나 혼자있어」
「오재영: 너 대체 어디간거임???」
…뭐라고 말하지. 한우주 데리고 학교 쨌다고 솔직히 말할 수는 없잖아. 오재영과 강준희의 참을성이 바닥을 드러낸 것인지, 둘은 나의 느려 빠진 답장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강준희: 야 그냥 얼굴 보고 얘기해」
「강준희: 속 터진다 진짜」
「오재영: ㅇㅈ」
「오재영: 지금 ㄱ??」
「조현우: 자잠ㄱ깐」
「강준희: 어 오재 너는 학원에 마저 계시고요」
「오재영: ㅅㅂㅠ」
「강준희: 월요일에 봐」
「오재영: 걍 내일 보면 안 됨?」
「강준희: ㄴㄴ선약있음」
「오재영: ???」
「강준희: 자야함」
「오재영: ㅅㅂ」
「강준희: 조현우 월요일 점심시간 비워놔라 난 잔다」
「오재영: ㅈㄴ일찍자 새끼」
「조현우: 잘자ㅠㅜ」
오재영과 강준희에겐 걱정을 자주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있긴 하지만…. 분명 조금만 신경 쓰면 친구답게 연락을 주고받는 것쯤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텐데. 그 ‘조금만’이 쉽지 않다. 어쨌든, 오재영과 강준희는 이곳에서 마음 놓고 대할 만한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일단 공략캐가 아니고, 허지훈같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조현우와 깊은 것도 아니다.
적당히 친근하고 호의적인 인물들. 차분히 생각해 보면 관계를 유지해 나쁠 게 없을 것이다. 언젠가 둘에게 도움을 구할 수도 있겠지. …사실 부탁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긴 하다. 월요일에 학교에서 이야기해 보면 되겠네.
순수한 호의에 지나치게 계산적으로 구는 건가 싶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매몰찬 게 아니라 내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뿐인 것을. 변명 같은 말로 아픈 양심을 달래며 다른 연락을 확인했다. 그리고 간신히 중간을 유지하던 기분이 바닥을 쳐 버리고 말았다.
「현우야. 어디 있니?」
이건 또 누구냐. 모르는 번호인데…. 어, 잠깐만.
‘미친. 개 미친.’
「윤태현 선생님이야. 확인하면 연락 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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