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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61화 (61/150)

61화

하마터면 목숨만큼 귀한 핸드폰을 집어 던질 뻔했다. 이 미친놈이 왜 나한테 연락을 해? 담임도 아니고 그냥 수학 선생이잖아. 굳이 이렇게 연락할 이유가 있어? 불쑥 치미는 혐오감에 메시지를 바로 삭제하려 들었다. 그러나 곧 생각을 고치고 천천히 액정을 두드렸다.

「조현우: 전 괜찮아요. 걱정하실 만한 일은 없어요.」

답장을 안 했다간 정말로 무슨 일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윤태현이 내게 또 연락할 빌미를 남겨 두기 싫어 마지못해 답장했다. 그리고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보나 마나 윤태현이겠지.

몸을 일으켜 침대맡에 등을 기대어 앉는다. 어쩐지 몸에 한기가 들어 이불까지 뒤집어썼다. 망설임 끝에, 통화 버튼을 누른다.

…정신 차리고 뭐든 알아낼 생각이었다. 윤태현 성격에 순수하게 날 걱정해서 연락한 것은 아닐 테고, 분명 목적이 있을 것이다.

[현우야?]

그런데 막상 윤태현의 목소리를 듣자 입술이 달라붙은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짜로 아무 일 없어요.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멋대로 학교를 빠진 것도요.’

…하고, 태연히 말하는 게 최선인 것을 아는데도 몸이 멋대로 얼어 버렸다. 하필 지금 윤태현이 원작 게임 시나리오에서 한 짓들이 떠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윤태현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귀신같이 알아보고 다가가선 약한 구석을 파고드는 데 도가 튼 놈이다. 거기에 선생님이라는 지위를 이용하기까지 했다. 누군가 내게 이 게임의 공략캐 중에 가장 질이 낮은 놈을 꼽아 보라고 한다면, 단연코 윤태현을 고를 것이다. 내가 어쩌다 이딴 놈이랑 통화하게 된 거냐….

[현우야. 현우야, 괜찮니?]

숨을 크게 들이쉰다. 제발, 안태원. 지금 제대로 말 안 하면 일이 더 복잡해질 거라고. 목소리를 쥐어짜 내어 겨우 대답했다.

“괜찮아요.”

[갑자기 사라졌다고 해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죄송합니다.”

[사과를 들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아무튼, 괜찮다고 하니 다행이다.]

“…….”

[현우야. 지금은 어디니?]

“네? 그, 그건 왜요?”

[안전한 곳에서 잘 지내는 거 맞지?]

“어…, 네. 저번에도 같은 거 묻지 않으셨어요?”

[아, 그랬지. 영 신경이 쓰여서 그래. 현우 너는 괜찮다고 했지만, 혹시라도 혼자 버텨 내려 얼버무리는 건 아닌지….]

지나치게 상냥한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미처 대답할 말을 찾기도 전에 윤태현이 말을 이어 갔다.

[현우야, 이건 어디까지나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18살은 참 모호한 경계에 있는 나이잖아. 그때엔 유독 주변에 도움을 청하는 게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고. 가령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이 정도는 나 혼자서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애도 아닌데 이걸 하나 못 해낼까?]

갑자기 이게 다 뭔 소리야.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래?

[혹은, 도움을 청한다 한들 누가 날 도울 수 있을까. 그런 마음에 힘든 걸 꾸역꾸역 참아 내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그런데 현우야.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이야기해 주고 싶었어. 넌 아직 보호받아야 할 나이고, 도움을 구하는 걸 당연하게 여겨도 괜찮아. 그러니 만약….]

“윤태현 선생님.”

[그래, 현우야.]

“저 정말로 괜찮아요. 안전한 곳에 잘 있어요.”

[안전한 곳이라. 네 집에 무사히 들어갔다는 뜻이야?]

“그건….”

대충 그렇다고 말하며 넘기려 했다. 그러나 윤태현은 조현우의 집이 어디인지 알고 있고, 혹 잊었더라도 알고자 하면 언제든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음을 떠올리곤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건 아니에요. 문제는 대충 해결됐는데….”

꺼림칙한 기분에 무심코 ‘지도’를 열어 보았다. 한우주와 공략캐들의 도트 캐릭터가 지도 이곳저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빠르게 윤태현의 위치를 확인하곤 완전히 굳어 버리고 말았다.

윤태현은 조현우의 집 근처에 있었다. 윤태현이 왜 저기에 가 있지? 윤태현이 저 근처에 살았던가? 아니다. 저 주변에 윤태현의 친구라든가… 누군가 살고 있던가? 내 기억으로는 이 역시 아니다. 망할, 지난번에도 그렇고 왜 자꾸 저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건데?

[여보세요, 현우야?]

“아…. 저 사는 집에 있는 건 아니고요.”

[그러면?]

“…잠깐 친구 집에 신세 지고 있어요.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짧은 순간 침묵이 공기를 메웠다가 사라진다. 듣기 싫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린다.

[친구라, 우주 말이야?]

“네?”

[한우주. 우주도 오늘 자리에 없던데.]

“……그, 그랬어요?”

입 안이 바짝 마른다. 오래 통화한 것도 아닌데 급격히 피곤해져 머리까지 어지러웠다. 더는 윤태현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 제가 오늘 좀 피곤해서…. 아까부터 잠이 쏟아져서요. 이만 끊어 봐도 될까요?”

[…물론. 오래 붙잡고 있어서 미안하구나.]

“네. 그럼 먼저….”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마저 이어 가면 되니까….]

“네?”

[또 연락할게. 일단 푹 쉬어, 현우야.]

“…….”

[좋은 저녁 보내고.]

통화 종료 버튼을 필사적으로 연타한다. 미친, 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만 같다.

…남은 이야기? 그딴 게 어디 있어? 나는 숨 쉬는 것도 잊고 한동안 윤태현이 한 말을 곱씹었다. 불안정한 호흡을 고르고, 액정에 떠오른 윤태현의 번호와 통화 종료 화면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좋겠다. 혹시 몰라 손등을 세게 꼬집어 보았다. 꿈은 무슨, 더럽게 아프잖아.

이대로 정말 악몽을 꾸더라도 잠으로 도피하는 게 나을 것만 같다. 조금 전의 통화가 뭐였던 간에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무덤덤하게 굴려고 애쓰며 핸드폰이나 마저 확인했다. 그리고 나는 도저히 잠들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스트레스로 잔뜩 부푼 속이 기어코 터져 잠이고 뭐고 전부 달아나고 말았다.

마지막 메시지는 다름 아닌 서연준에게서 온 것이었다. 무슨 일 있느냐, 괜찮냐, 한우주랑 같이 있느냐, 하는 지극히 서연준다운 걱정의 말들이었다. 일단 친구 사이이긴 하니까… 충분히 걱정하고 연락할 수 있겠다마는….

윤태현에 대한 짜증이 솟구쳐 죄 없는 서연준한테까지 불똥이 튀었다.

‘귀찮아. 짜증 나.’

속으로 투덜대며 답장도 하지 않고 핸드폰 화면을 꺼 버렸다. 이게 다 윤태현 때문이다. 그 자식은 도대체 왜….

‘윤태현 이놈은 왜 엉뚱한 사람한테까지 이 지랄이냐? 토할 것 같아….’

……어?

가슴이 묵직해 인상을 찌푸린다. 곧, 이 불편함의 이유를 깨닫고 헛숨을 들이켰다. 나의 말에서 모순과 어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별 의미 없이 속으로 읊은 것뿐이지만, 그래서 더 문제였다. 너무나 당연히 여기고 있던 것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양심이 나를 질책한다.

나 방금 뭐랬냐? 엉뚱한 사람한테까지? 그러면 이런 일을 당해 마땅한 사람이 따로 있어?

…한우주한테는 이딴 식으로 굴어도 문제없다는 거야?

마음 한구석에선 그에 반박하며 나 스스로를 변호했다. 그야 한우주는 주인공이고, 이 게임은 피폐물이고…. 게임 시나리오상 그게 맞지. 다 알고 있으면서 이제 와서 왜 이러는데?

망할…. 머리가 점점 더 아파 와 결국에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가만히 있기 힘들어 방 안을 걷고, 또 걸었다. 동시에 한우주와 윤태현 생각을 했다. 윤태현은 ‘수학?’이라는 이름으로나마 인물 수첩에 버젓이 남아 있으니, 루트 진입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윤태현의 존재는 꽤 중요하다. 일단 공략 캐릭터고, 게임의 엔딩으로 향하는 귀중한 수단 중 하나인 건 부정할 수 없으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윤태현은 좀 그렇지 않나?’

나는 윤태현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 비뚤어진 지배욕을 충족하기 위해선 타인의 희생이 필요하므로, 상대가 자신을 따를 수밖에 없도록 길들인다. 그 망할 짓을 애정이라는 단어로 보기 좋게 포장했을 뿐이다.

‘나의 결핍은 스스로 채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는 윤태현이 필요하고, 윤태현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뭔 개소린가 싶겠지만… 윤태현은 상대방이 이딴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내가 공략캐 중에서도 ‘특히’ 질이 나쁘다고 여기는 것이다.

…역시 안 되겠다. 내 사정 급하다고 한우주를 그딴 놈한테 던져 버릴 수는 없다. 그야 한우주는 내 친구니까. 물론 게임 캐릭터에 불과하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어라, 이런 말은 좀 이상한가?

아, 몰라. 이상하든 말든 뭔 상관이야. 내가 찝찝하다고. 짜증스레 머리를 헝클어트린다. 그러다 문득 윤태현이 한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통화했을 때 분명….

-친구라, 우주 말이야?

-한우주. 우주도 오늘 자리에 없던데.

……윤태현의 입에서 한우주의 이름이 나왔다.

…윤태현 이 새끼 한우주 이야기 캐물으려고 나한테 연락한 거 아니야? 내가 한우주랑 자주 같이 다니니까, 한우주랑 친하니까, 나를 통해서 한우주한테 접근하려고…. 그렇다면 이 자식 한우주한테도 연락했겠네? 어쩌면 지금 둘이 통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나야 윤태현이 얼마나 끔찍한 놈인지 알고 있지만, 한우주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선량한 교사의 탈을 쓴 놈의 감언이설에 홀랑 넘어가 버리면 어떡하지? 혹시라도 윤태현 루트를 밟게 된다면…. 한우주가 자신을 윤태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여기게 된다면….

‘안 돼.’

불길한 예감에 나도 모르게 그대로 방에서 튀어나와 버렸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한우주의 방문을 두드렸다. 시간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1초가 1분 같아서, 그냥 문을 박차고 들어가 버릴까 고민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전에 방문이 열렸다. 나는 한우주의 얼굴이 보이기 무섭게 바짝 다가가 팔을 붙들고 다급히 말했다.

“야, 야! 한우주! 너 혹시… 그거, 연락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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