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한우주는 눈썹만 조금 찌푸리곤 말이 없었다. 답답함에 대답을 재촉한다.
“한우주! 연락!”
“…누구 연락 말하는 거야?”
“그거! 그, 뭐냐. 선생! 선생님한테!”
“너… 일단 진정 좀 해 봐.”
아니, 그래서 연락 왔냐고, 안 왔냐고. 되묻기도 전에 한우주가 내 팔을 끌어 방 안으로 향했다. 나를 자신의 침대에 앉혀 놓고는, 방 한편에 있는 작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건넸다. 한우주의 표정과 행동이 너무나 침착해서, 나까지 덩달아 점점 차분해졌다.
“찬물 좀 마셔.”
고개를 끄덕이고는 찬물을 벌컥 들이켠다. 한우주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한 마디 던졌다.
“음, 선생님 연락이 오긴 했지.”
잘만 마시고 있던 물을 뿜을 뻔했다. 아오, 한우주! 왜 물 마시는 중에 대답하냐고! 그대로 사레에 들려 한참을 기침했다. 한우주가 내 등을 툭툭 두드린다. 목이 칼칼하니 아프다. 아, 쪽팔려. 대충 진정한 뒤에 손등으로 입을 훔치며 말했다.
“…이제 괜찮아. 그, 그보다 연락이 왔다고?”
“응.”
“뭐라고 왔어?”
“무슨 일 있냐고 하던데.”
“그래서 답장했어?”
“아니. 어차피 학교에서 볼 텐데 뭘 굳이….”
“허.”
순식간에 긴장이 풀려 헛웃음이 나왔다. 한우주의 상식 밖 행동이 이렇게나 달가울 줄이야. 그러면 윤태현은 뭐, 한우주한테 답장이 없어서 초조하기라도 했던 건가? 나한테 전화까지 건 것을 보면 어지간히 급했나 봐.
한우주를 흘끔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 윤태현이 메시지 몇 통 씹힌 것 가지고 뭘 포기할 위인은 아닌데…. 어떡하지? 한우주에게 윤태현을 조심하라고 일러두는 게 좋을까? 그렇지만 대외적으로 윤태현은 착하고 성실한 수학 선생일 뿐이잖아. 되레 내 쪽이 이상하게 보일 것이 뻔하다.
‘그렇다고 내버려 두자니….’
윤태현은 공략캐 중 루트 진입이 가장 쉬운 캐릭터이다. 한번 눈에 들면 알아서 졸졸 쫓아다니거든. 게임 공략을 작성할 때에, ‘윤태현 루트에 진입하는 법’보다는 ‘윤태현 루트를 피하는 법’을 정리하느라 골머리를 앓았을 정도이다. 사실 그 ‘피하는 법’도 별거 없다. 애초에 마주치지 않도록 노력하거나, 어떻게든 윤태현의 관심을 피하며 다른 공략캐의 루트를 밟는 것 정도….
그래, 생각해 보면 윤태현치고 꽤 오래 잠잠했다. 최근 윤태현 관련해서 발생한 이벤트가 없어 방심한 게 화근이 되었나 보다. 윤태현 이 음흉한 자식, 도대체 언제 한우주에게 흑심을 품은 거지?
그때, 바로 앞에 뭔가가 불쑥 나타났다. 아씨, 깜짝이야. 이게 뭐야, 손바닥? 한우주가 나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며 말했다.
“뭘 그렇게 생각해? 선생님 연락이 뭐 어쨌는데?”
“어? 그…, 그게.”
“그새 무슨 일 있었어?”
“으으으으음….”
한우주 앞에서 그 호들갑을 떨었는데 아무 말 안 하는 것도 좀 그렇지…? 넌지시 그 사람 어쩐지 느낌이 안 좋아, 딱 그 정도만 말해도 한우주가 윤태현의 수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저, 한우주. 있잖아.”
“어. 말해”
“유, 윤태현 선생님 말인데….”
“누구?”
“윤태현….”
“윤… 뭐? 태형?”
“엉?”
“응?”
…뭐야? 장난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윤태현. 윤태현 선생님 말이야.”
“그게 누군데?”
“…우리 수학 담당 선생님. 연락받았다며?”
“선생님 연락받았냐고 물었잖아.”
“응.”
“나는 담임 연락 말한 거였는데.”
“으응? 엥?”
설마 윤태현이 한우주한테는 연락 안 한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시선을 이리저리 정신없이 옮긴다. 애써 혼란을 잠재우고 다시 한우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모르는 번호로 연락 온 거 없어?”
“음…, 없을걸.”
“막, 스팸 처리된 거 아니야?”
한우주는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가, 아예 내가 볼 수 있도록 폰을 가운데 두고 메시지 목록을 보여 줬다. 담임, 조현우, 서연준, 아무리 봐도 윤태현은 아닌 기타 등등… 뭐야. 한참 전에 인하성이 보낸 메시지까지 있다. 저걸 삭제 안 하고 두고 있어? 볼 때마다 기분 상할 것 같은데. 아무튼, 스팸 메시지함은 깔끔하기만 했다.
윤태현은 오직 내게만 연락을 한 것이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것만 같았다.
“…….”
“조현우?”
“어?”
“너 아까부터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아니… 아니야. 별일 없었어.”
고개를 내저으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답했다.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다가 고개를 떨군다. 윤태현의 의도를 짐작하려 노력했지만, 속이 복잡해 잘 안 되었다.
“조현우.”
그때 착, 하는 소리와 함께 양 뺨에 손바닥이 닿았다. 한우주는 양손으로 내 뺨을 단단히 붙들고는 자신을 보도록 했다.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친다.
“이렇게 티 나게 거짓말하면 나더러 어쩌라고?”
“…….”
“…말하기 곤란해?”
그건…. 고개를 가로저으려 했으나 얼굴이 붙잡혀 움직일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킨 뒤에야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윤태현이….”
“수학? 수학이 왜?”
미치겠다. 지금 말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갑자기 사라진 학생이 걱정되어 메시지 몇 통 보내는 것쯤이야 선생님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것도, 다음에 또 이야기하자는 것도, 학생을 지도하기 위한 상담이라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겠지. 윤태현은 평범한 선생님이 아니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지만.
“조현우?”
“어? 응. 그러니까 수…학이….”
내 뺨을 감싼 한우주의 손을 슬쩍 떼어 낸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조금 이상한 것 같기도…?”
“어떻게 이상한데?”
나한테 연락하는 게 이상해. 아무래도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 어쩌면 네게 접근하기 위해 나를 이용할 속셈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조심해. …이 무슨 비약이냐? 떠오른 말을 고이 접어 넣고,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을 고안한 것이 고작 이거다.
“그냥 느낌이 싸해….”
“…….”
“…….”
정적이 무겁다. 이 새끼 왜 이러나 싶겠지. 억울해서 울며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다. 한우주의 황당한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때 한우주가 나의 오른손을 살포시 잡으며 말했다.
“수학이 너한테 연락했어?”
황당함이나 의심 따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어조였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되레 내 쪽이 당황해 버렸다.
“으, 응. 연락… 했던데.”
“뭐라고 했는데?”
“지금 어디 있냐. 괜찮냐. 이런 거.”
“음….”
“진짜 별거 아니지? 나도 알아. 그냥 뭐라고 해야 하나…. 으, 으음. 그러니까, 하….”
뭐든 그럴듯한 이유를 덧붙이려 했으나 수상함만 더해진 것 같다. 이거 진짜로 윤태현보다 내가 더 이상해 보이는 거 아니냐? 망했다.
“조현우. 아까부터 어딜 보는 거야? 나 좀 봐 봐.”
머쓱함에 목덜미를 문지르며 내리깐 시선을 겨우 들었다. 한우주의 곧은 시선이 오롯이 나를 향했다.
“그게 왜 별게 아니야? 싸하다며. 조심해서 나쁠 게 뭐 있다고.”
“어?”
“수학 번호 알아?”
“아, 잠깐만.”
나는 핸드폰 통화 기록에서 윤태현의 번호를 찾아 알려 주었다. 한우주는 윤태현의 번호를 제 폰에 등록하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뭐가?”
“수학 관련한 거 뭐든 간에.”
“…….”
뭐래.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뭘 믿고 그렇게 확신하는데? 나는 이미 네가 윤태현에게 말려드는 꼴을 몇 번은 봤단 말이야. 한껏 예민해져 날 선 질문이 머릿속에서 빗발치면서도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한우주의 말대로 정말 뭐든 괜찮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런 근거 없이 내뱉은 위로인 걸 뻔히 알면서 이런다.
…야, 정신 차려 안태원. 한우주는 윤태현을 모르잖아. 그래서 쉽게 말할 수 있는 거야. 걱정이 지나치게 깊으면 독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마음 놓아 버리면 안 되지.
나 자신을 꾸짖으며 마음을 다지던 중, 한우주가 후련한 얼굴로 핸드폰 액정을 내 쪽으로 돌려 보였다. 핸드폰 화면에는 전화번호부가 떠올라 있었다. 공평하게 모든 사람이 본명 그대로 저장되어 있었는데, 딱 하나. 하나만 조금 달랐다. 저장된 이름이….
「수학ㅗ」
이게 뭐야. 어쩐지 번호 저장하는 데 너무 오래 걸린다, 싶더니만 저장할 이름을 고민하고 있었나? 이게 고민의 결과물이고? 수학도 아니고, 윤태현도 아니고, ‘수학ㅗ’는 도대체 뭔데?
“너 수학 이름 아직도 못 외웠어? 윤태현이야.”
“걔 이름 알아서 뭐 해. 수학이 편해.”
“그래…. 그런데 수학 옆에 저건 뭐야? 오?”
“싸한 놈이라는 표시.”
“…이거 욕이야?”
“응.”
“…수학 엿 먹으라고?”
“응.”
아, 미친. 한우주 진짜.
“푸흡.”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한우주 이 웃긴 놈. 힘 빠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느낌이 싸해. 이상한 것 같아.’ 이런 근거 없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 주는 것도 그렇고, 욕이라며 모음 하나 슬쩍 붙여 둔 것도 그렇고. 고마우면서도 어이없었다. 한우주는 그런 나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웃음이 겨우 잦아들 즈음이었다.
“야.”
“아하하…… 하…. 아, 미안. 비웃은 건 절대 아니야. 진짜야!”
“…됐어. 웃고 싶으면 계속 웃든가.”
퉁명스레 말하며 고개를 홱 돌려 버린다. 어라, 너무 웃었나. 한우주 설마 삐진 건가?
“야, 야아. 이제 안 웃을게.”
묵묵부답이다. 미친, 어떡하냐. 진짜 삐졌나 봐.
“한우주. 기분 상했어?”
한우주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어떻게든 시선을 맞추려 했다. 그러다 겨우 한우주의 얼굴을 보았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저거 입꼬리 묘하게 올라가 있지 않아? 아니나 다를까, 한우주는 내 얼빠진 표정을 한 번 흘겨보더니 소리 내 웃었다.
이게 날 또 놀렸구나. 사람 좀 그만 놀리라고 화를 내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한우주가 표정을 구기며 짧게 신음했기 때문이다. 뺨을 맞아 생긴 상처가 아픈 모양이었다. 온종일 나를 괴롭힌 정체 모를 갑갑함이 또다시 찾아왔다. 숨이 턱 막히고 어쩐지 애달프기도 했다.
“괜찮아? 많이 아파?”
걱정스레 건넨 말에 한우주는 손만 대충 내저어 보였다. 그 모습에 마음이 괜히 울컥했다. 남 위로하고 챙길 시간에 자기 몸이나 잘 돌보지. 도대체 왜….
문득 한우주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떠올랐다. 아침부터 입 안을 맴돌았으나 적절한 때를 찾지 못해 가라앉고 만 것이었다. …아니지. 문득 떠오른 것이 아니다. 한우주가 내게 건넨 말을 통해, 지금껏 눈치채지 못한 어떤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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