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나는 이 망할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한우주가 뺨을 맞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일을 겪는 모습을 숱하게 보았다. 뒤늦게 깨달은 사실은, 한우주는 그 모든 걸 혼자 버텨 왔다는 것이다. 한우주가 내게 한 것처럼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위로라도 건넬 사람조차 곁에 둔 적이 없다.
한우주는 미련할 정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줄 몰랐다. 무슨 일이든 티 내지 않고 혼자 해결하려고 드니까…. 굳이 한우주의 안부를 캐물으며 정말 잘 지내는지 확인할 사람 역시 없었다. 이를테면, 원작 게임에서의 한우주는 이런 단순한 질문 한 번 받아 본 적 없다는 것이다.
“야, 한우주.”
“응.”
“뭐 좀 물어봐도 돼?”
“아니.”
“…….”
“농담이야. 뭔데?”
욱하지 말자, 진정하자. 지금은 그럴 타이밍이 아니다. 나는 한우주를 잠시 째려봤다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아침에… 왜 그냥 맞아 줬어?”
이것이 내가 하루 종일 속에 품어 둔 물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자신을 지키려 드는 게 보통의 반응일 것이다. 하다못해 피하려는 시도라도 하는 게 맞잖아. 그러나 한우주는 허지훈의 주먹을 피하거나 막을 의지조차 없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떠올렸다. 수없이 많은 시간 선에 걸쳐 사방으로 뻗어 있는 가능성의 줄기들. 그 가장자리에 간신히 매달린 한우주의 미래는 무력하게 썩어 가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한우주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지키려 노력한 적이 없으니까.
한우주는 제게 다가오는 불길을 피한 적이 없다. 오히려 몇 번은 스스로 걸어 들어갔을 것이다. 나는 저들이 사랑이라 주장하는 감정을 연료 삼아 범죄를 저지르는 공략캐들을, 그리고 한우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아무렴 상관없었다. 상관하고 싶지 않았고, 상관할 일이 없을 것이라 여겼다. …분명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한우주? 내 말 들은 거 맞지?”
“글쎄….”
확실히 들었으면서 글쎄는 무슨. 한우주의 시선이 비껴간다. …말하기 싫다 이건가? 나는 한우주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대답을 들을 때까지 꿈쩍도 안 할 것이다. 나의 각오를 읽기라도 한 것인지, 한우주의 무거운 입술이 마지못해 떨어진다.
“갑자기 그건 왜?”
“갑자기 아닌데. 계속 물어보고 싶었는데 참은 거야.”
“그러면 계속 참아 봐.”
“참기 싫어졌어.”
“…맞아 준 거 아니야. 피할 틈이 없었어.”
“거짓말.”
“…….”
짧은 침묵 끝에 한우주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런 게 중요해? 어차피 지난 일이잖아.”
“…뭐? 지금 그게 할 말이야?”
“못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야. 너 진짜.”
뭐가 어쩌고 저째? 그런 게 중요해? 어차피 지난 일이야? 바로 오늘 아침 일이고, 상처가 버젓이 남아 있는데 저게 지금 뭐라는 거야? 한우주는 정말로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크게 뜬 눈을 끔뻑이기만 했다. 와, 속에서 열불이 난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단체로 사람 하나 못 괴롭혀서 안달이라도 난 걸까? 왜 다들 한우주를 함부로 대하고 지랄인데? 제일 빡치는 건, 한우주 본인조차 자신이 소중하지 않은 것처럼 군다는 것이다. 게임 장르 들먹이며 온갖 비상식적인 일에 땜질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피폐물은 무슨, 그놈의 얼어 죽을 피폐물.
짜증이 잔뜩 올라 볼 안쪽을 질겅이며 씹었다. 그러고 보니 한우주가 이 비슷한 부근을 다쳐서 꿰맸던 것 같다. 망할, 괜히 떠올라서 기분만 더 잡쳤다. 이마를 짚고 어떻게든 속을 진정시키고 있던 때였다.
“조현우 화났어?”
“몰라. 잠깐 말 걸지 말아 봐.”
“뭐에 화난 건데?”
“말 걸지 말라니까?”
“내가 맞아서 화난 거야?”
“아씨, 알면서 뭘 물어?”
“이해가 잘 안 가서.”
“뭐가.”
“그게 네가 화낼 일인가?”
“…….”
아, 머리야. 한숨 나온다. 눈에 열이 올라 피곤하다. 손으로 이마를 짚고 눈을 감아 버렸다. 그게 화낼 일이냐고? 나야말로 묻고 싶다. 한우주 넌 화도 안 나냐고. 네가 화를 안 내니까 내가 더 빡치는 거 아니야.
이런 식으로 저항 없이 맞아 주고, 누가 가스라이팅을 해도 그러려니 하고 듣고, 감금당해도 무덤덤…. 도대체 한우주 이놈은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거야? 화가 사그라들기는커녕 점점 솟구쳤다. 나는 한우주를 힘껏 노려보며 말했다.
“야. 내가 지금부터 너 팰 거라고 하면 어쩔래?”
한우주는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야, 한우주!”
“응.”
“왜 대답을 안 해? 또 가만히 맞기만 할 거야?!”
한우주의 시선이 아래로 옮겨 가 나의 손을 향했다. 나는 보란 듯 주먹을 꾹 쥐었다. 부드러운 시트가 손에 감기며 모양이 구겨진다. 이 와중에 값비싼 시트에 주름이 지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내가 싫다.
“칠 생각 없잖아.”
“뭐?”
한우주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며 말했다.
“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
그건… 진짜로 때릴 생각이 없었던 건 맞다. 그런데 이제 곧 생길 것 같다. 태평한 모습이 얄밉기 짝이 없다.
“내, 내가 못 때릴 것 같아?”
“음… 안 때릴 것 같아.”
“나 지금 엄청나게 열받았거든?”
“그래 보여.”
“너 맞고 싶어서 일부러 이러는 거야??”
“아니.”
말장난이나 하려고 든 게 아닌데. 한우주의 반응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내가 너무 오만한 생각을 했나? ‘왜 그냥 맞아 줬어?’하고 물으면 한우주가 나한테 넙죽 속내를 털어놓을 줄 알았어? 묻는다고 아무한테나 말하고 상의할 녀석이었으면 원작에서 그 파국을 맞지는 않았겠지.
눈가를 꾹꾹 누르며 심호흡을 했다. 열이 올라 어지러운 머리부터 어떻게든 식혀 볼 생각이었다. 망할 한우주가 장작을 잔뜩 패 와선 불을 붙이고 기름까지 콸콸 들이붓는 바람에 수포가 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조현우.”
“왜.”
“때려서 풀릴 것 같으면 그렇게 해도 돼.”
“…야, 이. 미친 자식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우주와 마주 선다. 나를 올려다보는 눈, 뺨을 제외하면 평소와 한 치 다름없는 저 망할 얼굴. 티 없이 단정한 표정에선 단 한 줌의 반항 의지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거의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선 한우주의 어깨를 때리듯이 밀쳤다.
밀친 건 내 쪽인데도 잔뜩 당황하고 말았다. 한우주가 그대로 밀쳐져 침대 위로 쓰러져 버렸기 때문이다. 조현우의 약해 빠진 몸으로 한우주를 제압할 수 있을 리 없다. 저건 그냥… 말 그대로 당해 준 거다. 아침에 허지훈에게 그랬듯 말이다. 순간 어지러울 정도로 속이 울컥했다. 이성이 아득히 멀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한우주의 배 위에 올라탔다. 그대로 멱살이라도 잡을 생각이었나 보다. 한우주를 향해 뻗은 손이 허공에서 멈춘다. 한우주는 여전히 반항하지 않았다. 왜 이러냐, 진정해라, 그만해라, 이런 말조차도 안 한다. 그게 너무 싫었다. 가슴이 미어져 터질 것만 같다. 차마 멱살은 잡지 못하고 양손으로 한우주의 어깨를 잡아 누른다.
아랫입술을 앞니로 한 번 물었다가 놓는다. 이내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왜 가만히 있어?”
“…….”
“왜 항상 당하기만 하냐고. 너라면 충분히… 안 그럴 수 있잖아.”
다물린 입술이 원망스럽다. 한우주 이 답답한 놈.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우주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저 속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망할, 아무런 반응도 없는 애를 데려다가 뭘 하고 있는 거야. 한우주가 저렇게 살겠다잖아.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면 나랑 이 게임 속 미친놈들이랑 다를 게 뭐야.
속이 안 좋다. 분명 나의 감정인데도 내 뜻대로 되질 않는다. 이렇게까지 흥분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일그러진 표정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돌린다. 어깨를 놓고 물러날 생각이었다. 제대로 사과해야겠지. 한우주가 껄끄럽지 않도록 집을 나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키려던 때에, 손목이 붙잡혔다.
“어?”
강한 힘이 나를 끌어당긴다. 그리고 순식간에 세상이 뒤집혔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등이 푹신하다. 바로 눈앞에 한우주의 얼굴이 보였다. 아래로 쏟아진 검은 앞머리가 나의 이마를 간지럽힐 정도로 가까웠다. 뭐, 어? 으응? 잠깐, 뒤집힌 건 나잖아? 뭐야?
“자, 잠깐.”
급한 대로 한우주의 가슴팍을 힘껏 밀었다. 꿈쩍도 안 한다. 미치겠네. 이거 봐, 아까 나한테 밀린 게 아니라니까. 자기가 알아서 뒤로 넘어간 거 아니야? 몰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꾸물꾸물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곧바로 저지당하고 말았다. 한우주는 침대를 짚고 있던 손으로 나의 손목을 잡아 눌렀다. 손길이 조심스러워 아프지는 않았으나 움직이지 못할 수준은 되었다. …아니, 어라. 왜, 왜 이렇게 됐지?
“하, 하, 하, 한우주.”
당황해 말까지 더듬었다. 한우주는 대답도 없이 남의 얼굴을 마음껏 들여다보기만 했다. 나는 의미 없는 짓인 걸 알면서도 몇 번이고 몸을 비틀었다. 시트에 옷이 스치는 소리만이 방 안을 메웠다.
“이러면 돼?”
“뭐?”
“네가 바란 거 아니야?”
“뭐???”
“내가 가만히 있는 게 못마땅한 눈치길래.”
“…….”
평소보다도 차분한 표정, 비스듬히 내리뜬 눈을 마주하자 가슴께가 뻐근하게 저려 왔다. 미치겠다. 아무래도 나는 지금 생명을 위협당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심장이 이렇게 세차게 뛸 리가 없다.
“대답 안 해 줄 거야?”
무슨 대답… 잠깐만, 뭐야. 왜 얼굴이 가까워져?
‘으악, 으악!!’
속으로 비명을 질러 댔다. 그리고 왠지 눈을 꾹 감아 버렸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한우주 얼굴이 보기 싫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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