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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65화 (65/150)

65화

체감상 한 10년은 한우주 방에서 실랑이를 벌인 것 같다. 근래 들어서 오늘만큼 지친 날이 없을 것이다. 나는 한우주에게 돌아가서 쉬겠다고 이야기하고는 그대로 잠이나 청하러 가려고 했다.

“조현우.”

그런데 방을 나서려는 순간, 한우주의 목소리에 발목이 붙잡혔다. 사람을 불러 놓고는 한참 말이 없기에 나는 내가 환청이라도 들은 줄 알았다. 한우주가 뒤늦게 말을 잇는다.

“너도 몸 좀 사리고 다니라고.”

“나? 내가 왜?”

“…모르면 됐어.”

“뭐야, 싱겁게.”

“그냥 옆에나 잘 붙어 있어.”

“무슨 옆… 네 옆에 붙어 있으라고?”

“어.”

“왜?”

“걱정되니까.”

“…내가?”

“응.”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나는 내가 소중해 죽겠거든. 네가 위험한 일만 안 벌이면 안전하게 살아갈 자신 있다고. 턱 끝까지 차오른 잔소리를 겨우 삼켜 냈다. 입을 꾹 다문 채로 퉁명스레 고개를 끄덕인다. 누가 봐도 달가운 모양새는 아닐 텐데, 한우주는 여전히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쟤 왜 저렇게 신났어?

감정은 전염된다고 했던가. 나까지 덩달아 들뜬 마음이 정신없이 너울거렸다. 멋쩍어 헛기침을 몇 번하고 말했다.

“잠이나 자. 한우주 너 지금 졸려 보여.”

“음…졸린가?”

“안 졸려도 일단 누워.”

이제 10시쯤 되었을까? 분명 한우주가 잠들기에는 이른 시간인데도 웬일로 표정이나 말투에서 나른함이 잔뜩 묻어 나와서, 지금 얼른 재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말 더럽게 안 듣고 꿈쩍도 하지 않는 한우주의 등을 열심히 침대에 눕혀 놨다. 아오, 힘들어 죽겠네. 나도 방에 돌아가서 엎어져야겠다.

“잘 자라.”

“조현우, 잠깐만.”

“또 왜?”

“어디 가려고?”

“내가 어딜 가겠어. 옆방 가지…. 나도 잘 거야.”

“졸려?”

“안 졸려도 누우면 금방 잘걸. 왜? 할 말 있어?”

“응.”

“뭔데?”

“가지 말아 봐.”

“허?”

“너 가면 잠 깰 것 같아.”

얘는 지난번부터 옆에 누가 있어야 잠이 온다느니 뭐니 하더니 또 이런다. 눈가를 샐쭉 구기며 대놓고 못마땅한 티를 낸다. 한우주는 신경도 안 썼지만. 오히려 벽 쪽 자리로 붙으며 독촉의 시선이나 보냈다. 진심이냐?

‘뭐어…, 못 해 줄 것도 없나…?’

어려운 일도 아니고, 한우주를 일찍 재울 수 있다면야…. 기꺼이 한우주의 침대에 앉아 한우주를 곁눈질로 살폈다. 됐지? 얼른 잠이나 자라고.

“조현우.”

“왜? 빨리 눈 감고 자.”

“아니, 네가 내려다보니까 부담스러워서 못 자겠어.”

지랄… 아니, 진정하자.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나더러 어쩌라고?”

“누워 있어.”

“미친.”

그냥 버리고 갈까? 얼핏 스친 고민은 오래가지 못하고 사라졌다. 한우주의 눈이 점점 또랑또랑해져 냅다 옆자리에 누워 버린 것이다. 한우주는 그제야 만족스레 눈을 감으며 말했다.

“잘 자.”

“…….”

누가 옆에 있으면 잠이 잘 온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나 보다. 숨소리가 고르다. 한우주는 신기할 정도로 금방 잠들었다. 반면 나는 점점 잠이 깨기만 했다. 한우주가 신경 쓰여 침대에서 떨어질락 말락, 끝에 간신히 걸친 채로 천장을 보며 한숨이나 쉬었다.

한우주를 원망스레 흘겨본다. 세상 편안한 얼굴로 잠든 얼굴을 보자 미운 마음이 눈 씻듯 사라졌다. 나의 어이도 덤으로 함께 사라졌고.

‘한우주 얘는 어리광이 왜 이렇게 많아? 덩치만 컸지 애가 따로 없어.’

속으로만 칭얼거렸다. 한우주 재우다가 내가 불면증 생기겠다. 나는 누가 옆에 있으면 잘 못 자는 편인가? 조금 전부터 가슴 한구석이 불편했다. 명치끝이 아린 것 같기도 하고….

안 되겠다. 나는 한우주가 푹 잠든 걸 확인하고 조심조심 침대에서 벗어났다. 한우주의 방을 나서자 숨쉬기가 좀 편했다. 어쩐지 힘이 쭉 빠져 다리가 허우적거렸다. 겨우 손님방에 돌아와선 침대에 풀썩 누웠다. 피곤한데도 잠이 오질 않았다. 이게 다 한우주 때문이다. 내 잠을 한우주가 뺏어 가 버린 게 틀림없다.

깜깜한 가운데 천장만 멍하니 보고 있는데 자꾸만 한우주 생각이 났다. 반은 걱정, 반은 욕인 말을 속으로 마구 쏟아 낸다. 그러다 문득, 참 뒤늦게도 나의 멍청함을, 내가 처한 곤경을 눈치챘다.

‘…제대로 망했네.’

내가 한우주와 나눈 말 중 거짓은 없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나는 한우주의 삶이 힘들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만한, 평범하면서도 이겨 낼 만한 불행을 만났으면 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자주 행복한 일들을 마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별거 아닐 것이라 여기고 내버려 둔 연민과 우정이 더는 잘라 낼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자라 버렸다.

사리 분별 못 하고 정에 휩쓸린 건 내 쪽인 것이다. 내가 무얼 해야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 어느새 원작 시나리오에서 한우주가 당한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속에서 화가 치미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앞으로 어쩌려고 이러냐, 안태원.’

막막함에 파묻힌 채로 메뉴 창을 들락거리다가, 인물 수첩을 확인했다. 어떻게 볼 때마다 이렇게 똑같냐. 새로운 이벤트도 열린 게 없고…. 그러다 아주, 아주 작은 변화를 발견하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으학, 이게 뭐야?”

‘수학?’이라고 적혀 있던 윤태현의 이름이 ‘수학ㅗ’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게 인물 수첩에도 반영됐다고? 한우주 얘 윤태현 이름 외울 생각이 추호도 없구나. 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이 잦아들 즈음이었다. 한우주의 맑은 웃음, 편안히 잠든 얼굴 따위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렇게 결심의 순간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역시 안 되겠다. 윤태현을 처리하자.’

이딴 쓰레기 하나 사라진다고 엔딩을 못 보진 않을 거야. 화초 옆에 난 잡초를 뽑는다고 생각하자. 아니, 잡초도 아니다. 윤태현은 해충이다. 한우주를 갉아먹을 해충 놈…. 차라리 진짜 해충이면 좋았을 것을 사람이라 깔끔히 제거할 수도 없다. 어째 내 생각이 점점 과격해지는 것 같은데, 대충 넘어가자.

그러니까… 윤태현과 한우주가 이어질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고, 서연준같이 그나마 고쳐 쓸 가능성이 보이는 공략캐에 집중하자는 나름의 전략인 셈이다. 혹은, 정체라곤 짐작도 안 가는 ‘???’라는 공략캐에 대해 더 알아보거나.

인하성 때의 일을 떠올려 본다. 루트 삭제의 정확한 조건은 알 수 없다. 한우주의 심기를 거슬러 완전히 눈 밖에 나 버리면 삭제되는 게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다. 어쨌든 한우주와 윤태현 사이에 사건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위험성은 존재한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윤태현의 속내를 파악해 위험성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것 정도…. 아, 한우주 옆에서 윤태현 좀 싫어해 보라고 부채질할 수는 있겠다.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한숨을 깊게 내쉬곤 핸드폰을 지그시 노려본다. 윤태현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더 온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그저 텍스트일 뿐인데도 윤태현의 얼굴이 떠올라 오만상을 짓게 된다. 으.

「윤태현: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렴.」

‘…….’

하, 할 수 있다. 해야만 한다. 내게 반항하는 엄지손가락을 어떻게든 움직여 메시지를 적는다. 발송 버튼만 누르면 되는데 못 누르겠다.

「조현우: 선생님.」

“헉. 미친.”

손을 바들바들 떨다가 그만 엄지손가락이 액정에 스쳐 발송해 버렸다. 이놈의 핸드폰. 쓸데없이 터치는 왜 이렇게 잘 먹는데?? 그리고 망할, 윤태현은 종일 핸드폰만 붙들고 있는 건가? 곧장 답장이 왔다.

「윤태현: 현우야? 피곤하다면서. 안 자고 있었어?」

「조현우: 조금 자다가 깼어요.」

「윤태현: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니?」

하…. 메시지 몇 번 주고받았을 뿐인데 머리 아프다.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다.

「조현우: 저한테 할 얘기 남으신 것 같아서요.」

「윤태현: 아, 응. 그렇지.」

「윤태현: 이대로는 좀 그렇고. 웬만하면 얼굴 보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윤태현: 혹시 주말에 시간 괜찮니?」

주말? 주말이면 내일이잖아. 주말에 바로 만나기는 좀…, 마음의 준비가…. ‘주말은 좀 그래요. 그냥 월요일에 학교에서…’

‘…….’

「조현우: 네.」

적어 둔 것을 전부 지우고 새로 답장했다. 몇 번의 메시지가 더 오가고, 내일 점심에 보는 것으로 대화는 일단락되었다.

“으아악!”

핸드폰을 집어 던지려다가 살포시 옆에 뒀다. 이게 얼마짜린데. 그나저나 미친, 윤태현이랑 약속 잡아 버렸어. 그것도 당장 내일 봐야 해. 자고 일어나면 나가서 그 재수 없는 면상을 봐야 한다고. 진짜 싫다.

하지만… 한 번 미뤘다간 영원히 미룰 것만 같아서…. 그래, 잘한 일이다. 윤태현 속내도 모른 채로 월요일에 한우주랑 마주치게 두긴 싫다. 윤태현에게서 뭘 캐내려거든 이번 주말이 제일 나아. 기분 좀 더러운 것만 빼면 내게 나쁠 것 없다.

그냥 만나서 윤태현이 한우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슨 일을 벌일 계획인지 잘 떠보기만 하면 되잖아. 그 뒤엔 한우주에게 최대한 안전한 방식으로 윤태현 루트 삭제할 궁리나 하면 되고…. 삭제한 뒤에는 상큼한 기분으로 다시 한우주 연애나 도우면 된다.

‘하하…, 정리하고 보니 별거 아니네.’

하하…하하하.

하아……. 기분 더러워…. 그런데 어떡하냐. 이게 내 마음 제일 편한 길인데. 나 어쩌다 이 꼴이 났냐.

솔직히 나는 내가 ‘한우주가 무슨 짓을 당하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그렇게 설계된 걸 어떡해.’ 하고 넘어가길 바랐다. 아무리 한우주에게 정이 들었다고 해도 나의 현실과 저울질할 것은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한우주에 대한 건 얼른 체념하고 내 상황을 해결하는 데 집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냐고.

그러나 한우주의 존재성을 부정할수록, 한우주의 불행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려 들수록 나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발목이나 간지럽히고 말 잔물결인 줄 알았던 것이, 나의 마음을 휩쓸 정도로 거친 파란을 몰고 왔다. 덕분에 나의 속은 지독할 정도로 어수선해졌다. 난장판 속에서 그나마 위로가 될 만한 것을 찾아다녔다.

‘생각해 보면 현실에서 게임이나 할 때도… 죄다 한우주가 불행한 엔딩뿐이라 분노했잖아. 행복한 엔딩 하나쯤 남겨 놓으면 어디 덧나냐면서.’

주인공이 행복하길 바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엔딩에서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한우주가 기쁘게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아. 매일 밤을 방금처럼 편안한 얼굴로 잠들 수 있다면…. 이게 그렇게 큰 바람은 아니잖아.

생각해 보면 이 게임은 내가 아는 방향으로 흘러간 적이 없다. 사건, 인물의 행동, 한우주의 태도와 감정까지 원작과는 완전히 다르게 전개됐다. 그렇다면 내가 한우주를 원작에는 없는 방향으로, 조금 더 나은 길로, 행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다만 시도할 가치는 있을 것이다.

나는 허공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슬쩍 중지를 내밀어 보였다. 엿 먹어라, 시스템. 엿 먹어라, 망할 게임아. 내가 어떻게든 이 게임 피폐물 딱지 떼고 만다. 그렇게 해서….

‘한우주. 좀 행복해 봐.’

너 행복할 줄 알잖아. 잘만 웃고 다니면서. 막, 같잖은 장난 치면서 좋아하고…. 계속 그렇게 살아. 자신을 좀 더 아껴 보라고.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널 아낄 거 아니야. 굳이 좋은 것들 등지면서 살지 말란 말이야.

차마 직접 건넬 수 없는 간지러운 말들을 읊었다. 아,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한우주가 내 잠을 뺏어 간 것이 틀림없다. 깊어지는 밤이 나를 더욱 간절하게 만들었다. 간절함은 때때로 이성 속에 침투해 작은 균열을 일으키곤 했다. 그리고 당시의 나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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