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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66화 (66/150)

66화

8. 불순물

길가를 서성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저 사람은 어디에 갈까, 놀러 가는 건가? 사실은 전혀 궁금하지도 않은 물음으로 머릿속을 메웠다. 그러다 핸드폰을 확인하고, 한숨을 쉬고…. 부산스럽기 짝이 없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약속 시간보다 일찍 집을 나왔다. 실내에 있으면 괜히 더 갑갑하고 불안할 것 같아서. 그런데 뭐, 밖이라고 다를 게 없다. 불안한 건 마찬가지다. 오히려 집이 나았지. 옆에 한우주라도 있었으니까.

‘한우주는 개운해 보였지….’

딱 봐도 푹 잔 모양새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까지 다녀오고. 새 나라의 모범 청소년이 따로 없다. 반면 나는 좀비처럼 끙끙대다가 슬슬 기어 나오기나 했지.

현관까지 쫓아와 어딜 가느냐고 묻는 한우주가 선연하게 떠올랐다. 약속 있다며 어떻게든 떼어 놓고 나오긴 했는데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이게 무슨 기분이냐? 그, 강아지 집에 혼자 두고 외출하는 기분이다.

한우주도 나가서 좀 놀지. 사람도 좀 만나고. 서연준이랑 놀면 되잖아. 아, 서연준은 학원 갔으려나. 그럼 뭐, 다른 친구…가 있던가? 아니, 이럴 수가. 한우주 친구 없네?

“현우야?”

“와악!”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손바닥이 서늘해 기분 나쁘다. 서둘러 뿌리치고 뒤돌아 상대를 확인한다. 윤태현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이내 빙긋 웃으며 말한다.

“미안하다. 많이 놀랐니? 몇 번 불렀는데 대답이 없길래.”

놀라서 간이고 심장이고 다 떨굴 뻔했다, 인마. 아니, 아니지. 안태원 정신 차려. 안면 근육 제어해라. 심혈을 기울인 끝에 웃는 데 성공했다.

“아, 아뇨. 괜찮아요. 뭐 좀 생각하느라….”

“음…, 현우야. 혹시 잠 설쳤어?”

“네?”

“피곤해 보이네.”

예. 당신 덕분에 피곤해 죽겠습니다. …이거 조심해야겠다. 졸려서 뇌에 브레이크 풀리면 아주 완벽히 망할 것이 틀림없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이다. 선량하고 마음속에 어둠이라곤 한 줌 없다. 나는 순수하다. 아주아주 순수하다…. 윤태현이 뭐 하는 새끼인지 알 턱이 없다. 기계에 명령어를 입력하듯 나 자신을 세뇌했다. 효과는 훌륭했다. 내가 듣기에도 간지러울 정도로 천진하게 말했다.

“조금요. 잠을 많이 못 자기는 했어요.”

“저런. 잘 쉬어야지. 점심은 먹었고?”

“아뇨. 아직이요. 선생님은요?”

“나도 안 먹었어. 그럼 밥부터 먹을까?”

“네….”

그냥 빨리 이야기나 나누고 헤어지고 싶지만, 점심시간에 만났으니 어쩔 수 없는 수순이라 생각하련다. 이렇게 된 거 윤태현 지갑이나 실컷 털어야겠다.

…라고 생각했지만, 메뉴를 먼저 고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가리는 음식은 없으니 선생님 원하는 곳으로 가세요.’라고 말한 뒤 윤태현 꽁무니나 쫓아다녔다. 윤태현이 떡볶이를 사든 국밥을 사든 상관없었다. 나의 알량한 기준에서는 만 원 이하의 식사만으로도 윤태현의 재정 상태에 스크래치를 냈다며 혼자 만족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서, 선생님.”

“응?”

“다른 곳에 가면 어떨까요?”

“이태리 음식 안 좋아하니?”

“그건 아닌데….”

이런 곳은 당신이 성인 애인을 사귄 뒤에 건전한 연애를 즐기며 데이트 겸 오는 게 적절할 것 같습니다. 누가 학생을 데리고 코스 요리 하는 곳에 오냐고요. 당신도 재벌이야? 대한민국의 초임 교사 월급이 넉넉하진 않을 거 아니야. 지갑 털어먹겠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알아서 탈탈 털 줄 몰랐다.

코스 요리 몇 개와 몇십만 원짜리 와인이 빼곡히 적힌 메뉴판을 노려봤다. 런치 코스 A는 7만 원, 코스 B는 12만 원….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런 걸 먹이는 거지? 100만 원짜리 음식을 퍼먹여도 윤태현이 원하는 건 안 줄 건데. 한우주 관련한 것이라면 더더욱. 비장하게 다짐하고 있자니 맞은편에서 윤태현이 실실 쪼개기 시작했다. 저 인간이 미쳤나? 아니, 원래 미친 사람이긴 한데….

“여기 메인 셰프가 선생님이랑 친한 친구야.”

“아, 네?”

“제자 맛있는 거 먹이고 싶다고 미리 말해 뒀거든. 그러니까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돼.”

“……아, 아하.”

“그럼 선생님이 알아서 시킬게.”

윤태현은 코스 B를 주문했다. 셰프가 친구니 어쩌느니 하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나 보다. 중간에 요리복을 입은 사람이 찾아와 윤태현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더라. 내게도 자꾸 말을 거는 것을 윤태현이 겨우 쫓아냈다. 뭐랬더라? 제자가 부담스러워하니 얼른 가서 일이나 하라고 했던가? 나를 배려하는 모습마저 가증스러워 보였다. 윤태현이 뭘 하든 나의 사고는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한우주도 이런 식으로 살살 꾀어낼 생각인 거지? 이 나쁜 놈 같으니라고.

그러나 음식에는 죄가 없으니 맛있게 먹었다. 역시 비싼 게 맛은 좋더라…. 하지만 역시 이런 음식점은 내가 부자가 되어도 못 올 것 같다. 음식이 예쁘긴 한데 죄다 뭔, 손톱만 해서 간에 기별도 안 간다. 나는 이 12만 원짜리 코스 요리로 살 수 있는 게임 생각이나 했다. AAA급 게임 한정판으로 지를 수 있겠다. 그러면 한 100시간은 즐길 텐데.

“이만 일어날까?”

“아? 네. 좋아요.”

아기 주먹만 한 뭐였더라, 바주카포 앙뭐시기 타르트였나. 하여튼 이상한 이름의 디저트를 마지막으로 코스가 끝났다. 식사 동안 별 소득은 없었다. 그냥 음식은 입에 맞냐, 평소에 잘 챙겨 먹고 다니냐…. 이런 거나 묻길래 대충 답했다.

윤태현은 친구가 어쩌고, 공짜 밥 먹는 것처럼 말하더니 24만 원을 고스란히 계산했다. 진짜 뭐냐? 어리둥절해선 윤태현을 따라가는데, 길이 점점 좁아졌다. 어느 순간부턴 근처에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불안감에 걸음을 멈추고 외쳤다.

“선생님. 저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응? 이제 다 왔어. 저기.”

“이런 데 뭐가 있다고…. 어라.”

으슥한 골목에 뜬금없이 자리한 저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카페는 도대체 뭘까. 카페로 둔갑한 윤태현의 비밀 기지 같은 걸까. 황당해 아연한 채로 덩그러니 서 있었다. 윤태현이 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머쓱하게 웃는다.

“음… 내가 단골로 가는 카페야.”

“다, 단골이요?”

“응. 숨겨진 맛집이라고 해야 하나. 여기 케이크가 맛있어. 한국 호텔 출신 셰프가 차린 곳인데…. 조금 민망하네. 카페가 아기자기하긴 해. …안 어울리지?”

“아, 아뇨. 그건 아니고요.”

“아하하…, 다행이다.”

도대체 왜….

왜 수줍어하는 건데요…. 환장하겠네…….

“내가 단 걸 좋아해서 달에 한 번은 꼭 여기에 오거든. 제철 과일 올라간 디저트가 특히 맛이 좋으니 꼭 한번 먹어 봐.”

“네….”

터덜터덜 걸어 카페 안에 들어선다. 주인 취향인지 앤틱 인테리어 소품이 이곳저곳 배치되어 있었다. 원목 가구로 꾸며진 실내는 꽤 고풍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역시 깜찍하다는 인상이 지배적이었다. 모든 가구가 분홍색인 탓인가 보다. 카페는 파스텔 톤의 분홍과 흰색, 그리고 앤틱을 테마로 이곳저곳 정성스레 꾸며져 있었다.

솔직히 당황했다. 아무래도 나는 윤태현의 숨겨진 취향을 알아 버린 것 같다. 굳이 숨길 필요가 있겠냐마는… 아마도 숨긴 게 맞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윤태현이 이런 카페 오는 거 원작에선 못 봤단 말이야…. 게다가 옆에서 자꾸 쑥스러워하는 것이 몹시 거슬린다. 제발 그만해. 윤태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현우도 단 거 좋아할 것 같은데.”

“네? 제가 그래 보여요?”

“아니야?”

“아닌데요. 저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해서 마셔요.”

당연히 뻥이다. 애 취급당하는 것 같아 기분 나빠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러면 케이크도 안 먹니?”

“아, 아뇨. 케이크는 먹는데요….”

“다행이다.”

망할.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샷 추가한 아메리카노에 당근 케이크를 시켜 버렸다. 윤태현은 정말로 단 걸 좋아하나 보다. 초콜릿 음료에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시키더라. 부럽다. 5월은 딸기가 제철인데….

윤태현은 또다시 집요하게 내 안부나 캐물었다. 할 얘기 있다더니 도대체 뭐 하는 거냐? 쓴 걸 마셔서 그런지 정신이 좀 들었다. 윤태현의 말을 적당히 끊고 묻는다.

“선생님. 저한테 할 이야기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응? 응. 그랬지.”

“무슨 이야기예요?”

“정말 잘 지내는지 얼굴 보고 확인하고 싶었어.”

뭐야. 지금 장난하나. 지, 진정해. 화내지 말자.

“잘 지낸다고 몇 번이고 말씀드렸는데….”

“그렇지. 그런데… 현우야. 지금 우주 집에서 지내는 게 맞니?”

아악, 드디어 나왔다. 한우주 이야기하려나 봐.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은요.”

“언제까지 있으려고?”

“그, 글쎄요. 그건 왜 물으세요?”

“우주도 너도 학생이니까…. 우주 집에도 어른이 안 계시다고 들었는데.”

“…….”

“둘이서 괜찮을지 걱정돼서 그래.”

“어른 없는 거야… 저희 집 가도 마찬가지인데요.”

무심코 날카로운 투가 나왔다. 더럽게 쓴 아메리카노를 쭉 빨아 마시고 인상을 쓴다. 내 말투나 표정이 어떻든 윤태현은 온화한 얼굴을 거두지 않았다. 재수 없어.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하다. 마땅한 보호자가 없는 것도 걱정이지만, 너희 둘이 있는 게 서로에게 좋아 보이지 않아서 이야기하는 거야.”

뭐, 인마?

“선생님 눈에는 그렇게 보이더구나. 이해해 주렴.”

“왜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생각해 봐, 현우야. 아마 너는 4월 초 즈음부터 우주 집에서 지냈겠지. 나랑 마주치고 난 뒤에 말이야. 맞니?”

“…….”

“지각 한 번 않던 네가 우주 따라서 몇 번을 지각하고…. 하성이 때엔 휘말려서 팔까지 다쳤잖아.”

“그건 휘말린 게 아니라….”

“휘말린 게 아니면?”

“그냥… 싸움을 말리려고 했을 뿐인데요….”

“그게 휘말린 거야, 현우야. 우주의 일에 네가 휘말렸을 뿐만 아니라….”

윤태현이 턱을 괴고 시선을 똑바로 맞춘다. 내내 입가에 감돌던 미소를 거두고 말했다.

“네 일에 우주가 휘말리기도 했지. 바로 어제 일이니 현우 너도 알겠지만.”

유순한 목소리가 귓전에 선득하게 와 닿는다.

“지훈이가 꽤 난폭하게 굴었다고 들었는데…. 우주는 좀 괜찮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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