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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67화 (67/150)

67화

따지고 들면 한우주와 허지훈의 사이가 그 사달이 난 건 내 탓이 아니었다. 망할, 나는 모르는 일이란 말이다. 억울하긴 한데, 여기 와서 생긴 억울한 일이 어디 한두 개인가? 벌써 수백 개는 될걸. 그걸 그대로 내비치며 곡소리 냈다간 조현우 몸으로 늙어 죽게 생겼으니 애써 넘기고 있는 거다. 한이 맺힌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하루하루 체감하는 심정을 당신이 알기나 하냐고.

한우주를 정말로 걱정하는 것도 아니면서 말짱한 낯으로 능란하게 입을 나불대는 꼴에 속이 들끓었다. 나는 날카롭게 벼려진 적의를 내비치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 했다.

내 속을 긁는 것은 윤태현뿐만이 아니었다. 오기에 찬 빈말이라도 ‘한우주는 괜찮다.’라고 말할 수 없는 현실을 상기한다. 입 안이 썼다. 안 그래도 속상한데 이런 식으로 건드려질 건 뭐냐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될 생각까지 떠올랐다. 와, 윤태현과 기타 등등이 나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쪼아 대는 것만 같았다.

-허지훈이 계속 시비 걸면 괜히 너만 피곤할 것 같아서.

-그럼 뭐야, 나 때문에 일부러 맞은 거라고??

-…….

아이고, 두통이야. 한우주…. 엄밀히 말해 휘말린 건 아니지만 내 처지 생각해서 그런 거잖아…. 덕분에 윤태현에게 반박할 거리가 마땅치 않다. 이판사판으로 주먹이나 갈기고 싶다. 솜방망이나 다름없는 조현우의 주먹을 내려다보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얼굴에 은근하게 번지는 분노를 더는 막을 수 없었다. 분노를 속상함으로 연기하는 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윤태현은 나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눈썹을 늘어트리며 난감한 티를 내었다. 이어 명백히 달래는 투로 말했다.

“속상하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너희끼리 의지하는 게 나쁘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야. 오히려 이해해.”

“…이해하신다고요?”

“그럼. 다만 상황이 위태롭게 흘러가는 걸 보니 더는 방관해선 안 되겠다 싶었어. 이제 지훈이도 학교에 나올 테니까.”

아, 더는 안 되겠다. 서둘러 고개를 떨궜다. 새카만 커피에 비친 얼굴에는 분노가 여실히 드러나 보였다. 숨을 느리게 뱉으며 빨대로 커피를 휘휘 저었다.

짤그랑, 윤태현 이 미친 새끼야. 짤그랑, 네 쥐꼬리만 한 양심은 어디에 갔냐. 중고 마켓에 팔아 버렸냐? 짤그랑, 그 돈으로 지금 밥이랑 커피 사는 거야? 짤그랑, 얼음이 유리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독 높고 흉포하게 들렸다. 차마 내 입으로 직접 뱉을 수 없는 모진 말들을 차가운 얼음이 대신 쏟아 내는 것만 같았다.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머금었다. 쓰다. 한우주나 좋아할 맛이네.

“방관하지 않으면요?”

치미는 화를 딛고 정신을 붙잡았다. 시선을 들어 겸연쩍게 웃어 보였다.

“뭘 하시려고요?”

“도와야지. 선생님이니까.”

“어떤 식으로 도우시겠다는 건지 감이 안 와서요.”

“아… 그건.”

윤태현은 여전히 턱을 괸 채로, 검지로 제 뺨을 몇 번 두드렸다. 내게서 도통 떠날 생각을 않던 눈동자가 엉뚱한 곳에서 헛돌았다. …윤태현이 저러니까 불안한데.

“현우야. 일단 우주 집에서 나오는 건 어때?”

…뻔하네, 윤태현. 저 말 언제 하나 싶었다. 나를 떼어 놔야 한우주에게 접근하기 편하겠지. 속으로만 비아냥거리며 살그머니 표정을 굳혔다. 당황한 척이라도 하는 게 그럴듯해 보일 것이다. 윤태현의 목소리는 아이를 타이르는 것처럼 유했다.

“우주랑 지훈이 사이를 푸는 게 가장 급하지 않니? 또다시 소동이 일어나면 안 되니까…. 현우야. 지훈이는 네가 우주 집에서 지내는 거 알고 있어?”

“…아뇨?”

“언젠가는 지훈이도 알게 될 텐데.”

“알면… 아는 거죠.”

“그런 식으로 어영부영 넘기면 안 되지.”

뭐라는 거야. 한우주랑 나랑 같이 사는 게 범죄라도 돼? 물론 허지훈이 곱게 보진 않을 것이다. 그 정도는 나도 당연히 인지하고 있다. 윤태현 저놈은 내 머리가 꽃밭이라서 한우주 집에서 지내는 줄 아는 거야? 자꾸만 신경을 긁어 대니 불쾌함만 깊어져 갔다.

“어영부영 넘긴 적 없어요.”

“…현우야.”

대답 대신 눈썹을 조금 찌푸린다.

“우주랑 지훈이 사이가 틀어진 원인은 네게 있잖아.”

“네?”

윤태현이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도 평소 말투가 워낙 온순한 탓인지, 아니면 내가 예민한 탓인지. 마치 나를 엄하게 꾸짖는 것처럼 느껴졌다.

“걔네 둘이 그러는 게 제 잘못이라는 말씀이세요?”

“잘못이라니. 나는 현우 네 잘못이라고 말한 적 없어. 그렇게 생각한 적도 없고.”

…그러면 뭐야. 저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벌써 이렇게 졸렬하게 나오시겠다? 윤태현의 망언은 고작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설마 네가 바라고 한 일이겠니. 현우 너라면 분명 둘 사이를 바로잡으려 했겠지.”

“…….”

“노력해도 잘 안됐으니까 어제 같은 일이 생긴 거겠지만….”

허, 윤태현 이놈은 얼굴 보면서 시비 걸고 싶어서 날 부른 건가? 한판 붙자는 거야? 내가 한우주 옆에 붙어 있는 게 그렇게 아니꼽냐? 무더운 여름날 내복에 스웨터에 패딩까지 껴입은 것처럼 열이 올라 터지기 직전에 이르렀다. 자연스레 말에 날이 서고 눈썹은 삐뚜름해졌다.

“선생님.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아, 미안하다. 안 그래도 예민할 텐데.”

지금 뭔, 이, 개…. 하다 하다 날 예민한 사람 취급한다.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윤태현에게는 말문이란 게 있기는 할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쉴 틈 없이 떠들어 대는 걸 보니 문짝을 아주 통째로 떼어 버린 게 틀림없다.

“혹시 내가 잘못 짚고 있는 거라면 이야기해 주렴. 우주와 지훈이 사이에 생긴 일에 현우 너는 아무런 관련이 없니? 그저 둘 사이의 문제일 뿐이야?”

“아예 관련이 없지는 않죠.”

“현우 너도 어느 정도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지 않니?”

“아니, 그러니까요. 저는 둘이….”

“현우야.”

사람 말을 잘라먹고 지랄이야. 그냥 한 대만 칠까? 주먹이 운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거였던가. 침착해. 흥분하면 지는 거야. 게다가 이 몸으로 쳐 봤자 전치 10분도 안 나올 것이다. 10분은 무슨, 주먹이 안 다치면 다행이다. 테이블 위에 나란히 올려 둔 주먹이 잘게 떨렸다.

“일단 우주 집에서 나오렴. 나머지는 선생님이 도와줄게.”

손의 떨림이 멎었다. 서늘하고 건조한 감각이 오른손 위로 떨어졌다. 관절이 도드라져 보이는 가늘고 긴 손가락이 피부에 징그럽게 달라붙었다. 호흡을 멈추고 이 불편한 접촉을 눈으로 좇았다. 윤태현이 양손으로 나의 오른손을 감싸 쥐고 있었다.

“선생님이 우주랑 지훈이랑 이야기해 볼게. 그러니까 현우 너는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저 일상에 충실하면 돼. 학교에서 갑자기 사라진다거나, 지각하는 일 없이. 여태 해 온 것처럼만. 응? 생활이나 학업에서 힘든 일 있으면 내게 편하게 상의해도 되니까.”

“저, 일단 이것 좀….”

맞닿은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것만 같다.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싫었다. 슬그머니 손을 빼려 들자 윤태현이 힘을 주어 붙잡았다.

“우주랑 지훈이는 워낙에 돌발 행동이 잦았지만, 현우 너는 아니잖아. 선생님이 요즘 들어….”

윤태현의 손끝이 나의 손목에 은근하게 닿았다. 불길한 냉기가 확 끼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놔주세요.”

“네 걱정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

이 미친놈은 내 말이 안 들리나? 끈덕진 시선도, 나를 붙잡은 손도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놔 달라니까요?”

윤태현은 나의 속에 자꾸만 먹을 퍼부었다. 복잡하게 뒤엉킨 생각들이 하나씩 잠겨 갔다. 마침내 모든 것이 검게 침몰되고, 가장 간절한 바람 하나만이 남았다. 윤태현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거, 좀. 놓으라고!”

손을 비틀어 뿌리치려 해 보았지만, 윤태현의 손은 꿈쩍도 안 했다. 힘의 차이가 너무 컸다. 눈을 부릅뜨고 저 망할 면상을 노려보며 악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놔!”

지금껏 선의에 찬 걱정을 가장해 온 윤태현의 눈동자가 가라앉는다. …좆 됐다. 이미 충분히 좆 됐지만 앞으로 더 좆 될 것 같다. 망할…, 이대로 윤태현에게 휘말릴 수는 없다. 어디든 솟아날 구멍이 있을 것이다.

“저기… 손님. 실례지만 목소리 좀 낮춰 주실 수 있을까요?”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홱 돌려 상대를 확인한다. 앞치마를 두른 남성이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사장님. 그럼요.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금방 미소를 띠며 대답하는 윤태현의 모습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윤태현이 ‘사장님’이라 부른 남성은 윤태현의 얼굴을 발견하곤 반가운 듯 웃었다. 이어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윤태현 선생님! 오신 걸 알았으면 진작 뭐라도 서비스로 내어 드렸을 텐데. 드시고 싶은 차나 케이크 있으세요?”

“아하하…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손님으로 온 거니까요. 괜찮습니다.”

“괜찮긴요! 학교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실까. 지혜가 말을 좀 안 듣죠?”

“아닙니다. 지혜만큼 착한 학생은 드물죠. 성적도, 학습 태도도 우수하고요.”

“어, 어허허! 그런가요?! 선생님 뵙고부터 더 열심히 하는 것 같던데요!”

윤태현의 정신이 카페 사장이자 학부모에게 팔렸을 때 겨우 손을 떨쳐 냈다.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무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끔찍하게 들렸다. 손으로 테이블을 딛고 가까스로 자리에 바로 섰다. 알바할 때 진상을 만난 경험을 떠올리며 최대한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선생님. 전 이만 가 볼게요.”

“…현우야.”

“말씀하신 일은… 사양할게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 염려 마세요. 기껏 시간 내어 주셨는데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야. 사과할 필요 없어.”

사장이 직접 테이블에 찾아온 게 천운이었다. 윤태현은 학부모 앞에서는 순한 양과 같이 굴었다. 나는 고개를 한 번 꾸벅이고 서둘러 카페를 빠져나왔다. 뒤통수에 윤태현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월요일에 학교에서 보자, 현우야.

혹여 윤태현이 쫓아오기라도 할까 걸음을 서둘렀다. 목적지 없이 계속해서 걷기만 했다. 걷는 동안 윤태현에게 저주를 수백 개는 퍼부었지만, 끔찍한 기분은 가실 기미를 보이지 않고 내내 나의 곁을 맴돌았다.

힘이 풀려 휘청이는 다리로 어떻게든 움직였다. 윤태현의 저의를 파악하기 위해선 방금 있었던 일을 곱씹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오늘 이 이상으로 윤태현을 떠올렸다간 정신이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컴퓨터를 재부팅하듯 머릿속을 한 번 비울 필요가 있었다.

우뚝, 이제는 당연하게 한우주의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췄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대로 집에 가면 한우주를 보게 되겠지? 오늘 내가 윤태현을 보러 간 이유는 한우주에 있으니까…. 그럼 자연스레 윤태현을 떠올리게 될 거다. 솔직히 내가 표정 관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니까 티가 날 텐데, 한우주에게 오늘의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정리가 안 되었다. 정리하려면 또 윤태현과 있었던 일을 곱씹어야…….

‘아… 죽겠다. 머리 아파.’

조현우 자취방 가서 한숨 자면 좀 나을까?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다. 자고 일어나면 정신이 좀 맑겠지. 두 시간, 아니 한 시간만…. 하품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거의 자면서 걷는 수준이다.

마침내 낡은 빌라의 앞에 도달했을 때, 나는 내 선택을 사무치게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빌라 앞에서 낯익은 인영을 발견한 탓이다. 상대는 낡은 벽에 기댄 채 고개를 숙여 바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시선을 들었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나는 힘 빠진 목소리로 달갑지 않은 이의 이름을 불렀다.

“…허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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